2016년 ‘사도광산 노동자를 추도하는 모임’이 아이카와의 한 절에 세워진 공양탑 앞에서 추도식을 하고 있다. ⓒ아라이 마리 제공

도쿄역에서 조에쓰신칸센을 타고 2시간을 가면 니가타역이다. 니가타항으로 이동해서 고속선으로 1시간16분, 카페리로는 2시간30분을 더 가면 사도섬에 도착한다. 이 섬에 지금은 폐광된 후 관광지로 변모한 사도광산이 있다. 80년 전 이 광산에 1500명 이상의 가난한 조선인들이 광부로 동원되었다.

1988년 10월, 니가타현의 한 시민단체가 애쓰던 운동이 니가타현 언론에 크게 보도된다. 이 운동은 1922년 7월 니가타현 나카쓰가와 수력발전소 건설 중에 발생한 조선인 학대와 학살의 진상을 조사해 알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사도로 돌아와, 17세기부터 사도광산이 번영하면서 기항지로 발전한 바닷가 마을 슈쿠네기의 지역사를 조사하고 있던 하야시 미치오는 이 운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우연히 사도광산의 조선인 노동자였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미쓰비시광업(주) 사도광산의 노동 실태와 해방 후 귀향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400년 역사를 지닌 아이카와의 사도광산에 조선인 노동자가 집단 동원된 것은 1940년경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사도에 남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정착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 조선인이나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와 함께 조사 활동을 벌인 고스기 구니오 전 사도 시의원은 어린 시절 차별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도에 남은 조선인들을 ‘반도인’이라 불렀다고 했다. 일본제국 시절 조선인을 차별해 부르던 호칭은 제국 멸망 후에도 남아 있었으나, 조선인 노동자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1991년 8월, 하야시는 ‘미쓰비시 소아이료 연초배급대장(조선인 명부)’을 입수하고 그 뒤 ‘과거·미래-사도와 한국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을 만들었다. 하야시는 니가타현의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조사를 하는 ‘코리안 강제연행 등 니가타현 연구회’(이하 니가타현 연구회)의 재일조선인 1세 장명수씨 등과 함께 아이카와마치(현 사도시)사 편찬위원 혼마 도라오를 방문해 그가 찾아낸 연초배급대장의 사본을 제공받아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이 명부에 기록된 조선인 노동자 400여 명의 인적사항과 기초 문헌조사를 통해 당시 충청남도의 20~40대 남성들이 사도광산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혼마는 1964년에 〈무숙인 사도광산비사(無宿人 佐渡鑛山秘史)〉라는 책을 냈다. 무숙인이란 빈곤 등으로 거주 대장에서 말소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이 책은 에도 막부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무숙인들을 사도광산으로 보내 강제노동을 시킨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그 무숙인의 자리를 조선인이 채웠다.

1991년 11월, 잇는 모임과 니가타현 연구회는 생존자 조사 및 증언 채록을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 조사단의 방문을 한국의 언론, 논산문화원 등이 전폭적으로 돕는다. 장명수씨가 명부의 일부를 엑셀 파일로 만들어 그해 11월13일 대전을 방문해 사전조사를 했다. 〈대전일보〉는 조사단의 방문을 알리고 당사자에게 연락을 부탁하는 기사를 11월16일자 1면에 크게 실었다. 도민들의 반향이 대단했다. 현지 연락소를 자청한 민주당 임덕규 전 의원의 서울사무실과 민주당 논산지부사무소에 문의 전화가 쇄도했고 바로 두 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해 11월27일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대전에 도착한 조사단은 이후 1992년 4월, 1995년 7월까지 총 네 번의 현지 조사를 실시했고, 30여 명의 소식을 확인했다.

1940년경 조선인 1500명 이상이 강제노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니가타현의 사도광산. ⓒKyodo News

한국 신문도 관광지로 소개했던 사도광산

한 맺힌 세월을 풀어놓던 노인들은 하야시에게 ‘왜 이제야 왔느냐’고 말했다. 그 ‘왜’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찾아와 손을 내밀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사도광산 강제동원자와 그 유족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1991년 6월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 주요 신문은 해외 관광 활성화 바람을 타고 한국에서 가까운 해외 관광지로 니가타와 사도광산을 소개했다. 당시 젊고 건강한 광부도 진폐증으로 3년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는 사도광산의 어두운 역사를 재현한 관광시설을 소개하면서도, 조선인들이 그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역사를 보도하는 신문은 없었다. 1991년 8월 김학순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고, 같은 해 12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사죄,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던 시절이었지만,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관심 밖이었다.

잇는 모임은 조사단이 한국에서 직면한 사도광산 강제노동의 증언을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조사 보고 집회를 열고 1992년 9월과 1995년 11월 말 두 차례 당사자와 유족을 아이카와에 초청해 증언 집회를 열었다.

조사단이나 사도 시민들이 들은 증언은, 고용주 미쓰비시광업이나 관계 당국 자료의 기술과는 상이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는 표면상으로는 일본인과 동일임금이라 했지만 성과급이어서, 농부였던 조선인들은 기능 면에서 뒤떨어져 불리했다. 기숙사는 무료였으나 작업에 필요한 도구비, 식비, 침구, 노동자연금, 강제 저금을 빼면 고된 노동을 잊게 해줄 담뱃값 정도만 남았다. 더 힘든 것은 죽음의 공포와 배고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갱도 노동에 배치된 조선인들은 다이너마이트 폭발 파장으로 휴대용 등불이 꺼지면 ‘오늘은 내가 갱도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들에겐 일을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갈 자유가 없었다. ‘모집’이든 ‘징용’이든 2년 계약이 끝나면 죽음의 갱도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재계약을 강요당했고, 전쟁 말기에는 사도광산에서 그대로 일본군으로 징집당하기도 했다. 도주를 도와주는 주민도 있었지만, 증언에 따르면 미쓰비시 측은 포상금을 줄 테니 도주자를 발견하면 신고하라고 주민들을 독려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수의 노동자는 평생 진폐증에 시달렸고, 병간호는 오롯이 가족 몫이었다. 사도광산의 의료시설은 진폐증 예방과 완화에 효과적인 역할을 못했다.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사도광산의 조선인들이 ‘강제연행’을 당해서 ‘강제노동’을 했다는 것이 충분히 인정된다.

1992년 집회에서 증언을 들은 한 참석자는, 행사 명칭에 ‘강제연행’ ‘강제노동’이라는 글귀를 넣어야 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1995년 아이카와마치 단체장은 사도로 초청받은 윤종광·노병구씨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고 두 사람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물론 잇는 모임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런 교류를 통해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알게 된 시민과 지역 기업이 지원금을 냈고, 지역 언론은 신중한 어조로 사실을 보도했다.

1995년 ‘잇는 모임’ 초청으로 사도를 방문해 증언하고 있는 윤종광씨(왼쪽)와 노병구씨. ⓒ다케우치 야스토 제공

연대는 끊어졌지만 기록이 남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도와 한국의 연대 운동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1995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조사단은 보상 청구를 위해 19명의 후생연금 가입 기록 확인에 필요한 위임장과 이력 신청서를 받았다. 1991년 조사단의 첫 방문 때부터 피해자들은 보상을 원했고, 이 사안은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끝난 일’이라는 입장이고, 한국에서 피해 조사가 시작된 것은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 위원회’가 설립되어 피해 신고를 받고부터다. 그러는 사이 고령의 피해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떴다.

조선인 기숙사 터와 공동 취사장 터에 해설판을 세우고 한·일 학생 교류를 추진하겠다는 잇는 모임의 꿈도 무산되었다. 그러나 기록이 남았다. 사도광산 노무관리자의 수기나 잇는 모임의 조선인 노동자 조사 내용이 1995년에 발간된 아이카와마치의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에 반영되었다. 집필을 담당한 혼마 씨는 자신의 연구에 잇는 모임의 활동 성과를 수렴해,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 실태와 역사를 지역사에 공적 기록으로 남겼다. 하야시 씨는 10여 년 전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사도광산 현장답사 활동을 하며 당사자들의 증언을 전했다. 2010년엔 니가타현 고교교직원노동조합의 평화교육연구회가 강제연행의 가해 역사를 엮은 가이드북을 만들어 학교 교재로 사용했다.

잇는 모임의 활동에 공감하는 지역민들이 2015년 10월 사도시와 사도시 교육위원회 후원을 얻어 국적과 신앙을 뛰어넘어 사도광산에서 사망한 모든 노동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이후 사도광산의 번영 속에 차별받는 약자(에도 시대의 크리스천과 무숙인, 식민지 시기 조선인 노동자)의 피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추도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도의 시민단체가 ‘사도와 한국을 잇는 모임’의 운동 기록을 남기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필두로 한 역사 부정론자들이 이번에는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노동을 부인하며, ‘역사 문제로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한국과의 역사 전쟁’을 선동 중이다. 자국에 유리한 단편적 사실만 모아 선전하고 불리한 사실들은 무시하며, 역사를 조작하려는 세력이 사도광산을 제 맘대로 이용하게 놔두어선 안 된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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