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과 원폭 피해자 유족의 끝나지 않은 싸움
  • 정희상 기자
  • 호수 622
  • 승인 2019.08.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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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14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원고단 단장 박상복씨(사진)는 ‘귀국선 침몰 유족회’와 연대해 별도의 소송을 낼 계획이다.

“승소했다고 한국에 있는 일본 전범기업 자산을 강제 매각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아베의 진정 어린 사과다.” 강제징용 피해자 14명이 낸 소송의 박상복 원고단 단장(74)이 말했다. 그의 부친 고 박남순씨는 일본 히로시마의 미쓰비시중공업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다. 1945년 8월6일,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피폭됐다. 아버지는 목숨만 부지한 채 귀국해 피폭 후유증을 겪었다. 평생 신경성 질환에 시달렸다.

ⓒ시사IN 신선영강제징용 피해자 14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원고단 단장 박상복씨

 

피해자 모임 집계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1943~1944년) 경기도 수원·평택 일대에서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이들은 370여 명이다. 이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 등 군수품 공장 밀집지역에 주로 배치됐다. 회사가 제공하는 식사의 양과 질은 부실했다. 작업을 마치면 미쓰비시가 마련한 숙소로 돌아갔다. 좁은 방에서 10~12명이 함께 생활했다. 숙소 주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교도소 죄수처럼 헌병과 경찰이 24시간 감시했다.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검열을 받았다. 숙련도에 따라 월급 20~30엔이 나왔지만, 실제로 직접 지급되지는 않았다. 큰돈을 갖고 있으면 사고가 나거나 다 써버린다며 회사가 ‘관리 명목’으로 가져갔다. “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지 1년여 만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미쓰비시중공업도 삽시간에 파괴됐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긴 아버지는 일본의 항복 방송을 듣고 귀국 편을 찾아 헤매다 1945년 9월 부산행 배에 올랐다.” 아버지처럼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들은 대부분 고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피폭 후유증을 앓고 생활고를 겪었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원폭 피해자 모임을 꾸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지냈다. 수원·평택 지역 강제징용 피해자 박남순씨를 포함해 14명이 2013년 7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원고인 피해 당사자가 숨졌다. 유족들이 소송을 이어갔다. 지난 6월27일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판사 설범식)는 “피해자 1인당 9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경기도 원폭피해자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박상복씨는 승소 판결 뒤 다른 원고들과 함께 주한 일본대사관과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미쓰비시중공업은 상고를 포기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배상하기를 촉구한다”라고 외쳤다. 박상복씨는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대를 이은 핵 피해, 원폭 가해자 미국은 사죄하고 배상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월6일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74주년 위령제에 참석해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한국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상복씨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2차 세계대전 전범인데, 아직도 식민지 지배 향수에 젖어 있다”라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미쓰비시, 귀국선 침몰 ‘외면’

그는 일본 정부가 끝까지 사과와 배상을 외면하면 또 다른 소송을 하겠다고 했다. 미쓰비시중공업 강제징용과 원자폭탄 피폭이라는 이중 피해를 입은 이들이 광복 직후 귀국선을 탔다가 겪은 참사와 관련한 소송이다. 유족들에 따르면, 당시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에는 주로 서울·경기 지역에서 끌려간 3000여 명이 1945년 9월15일에야 배 수십 척을 나눠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배가 난파해 1000명 이상이 수중고혼이 됐다고 한다.

이러한 참사는 30여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1976년 유골 86위가 일본 이키섬에서 발견됐다. 시민들로부터 진상규명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가 1983년 45위를 추가로 찾았다.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은 그동안 수차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측에 보상과 함께 유해 귀국을 책임지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 박상복씨는 바로 그 침몰 유족회와 연대해 미쓰비시중공업 및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별도의 손배 소송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군은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지난 4월 보건복지부의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현재 생존해 있는 피폭자 1세대는 2283명(2018년 8월 기준)이다. 1945년 당시 한국인 피폭자 규모는 약 7만명이다. 이 중 4만명이 피폭으로 숨졌고, 생존자 중 2만3000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피폭자 자녀들은 자신도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산다고 조사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 피폭자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실태조사와 더불어 평생에 걸쳐 추적검사와 치료를 지원해줬다. 반면 한국인 피폭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국내 원폭 피해자들은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해 일본의 사죄와 배상, 인도적 치료 조처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피폭자 문제도 책임을 다했다며 묵살했다.

그 와중에 피폭자 손진두씨의 일본 밀항 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 손씨는 피폭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 병원으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손씨는 불법입국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지만, 피폭 후유증 등으로 형 집행이 정지됐다. 손씨는 이때부터 6년 동안 법정투쟁을 벌였다. 손씨는 일본 정부로부터 피폭자 지원을 받기 위해 건강수첩 교부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손씨의 사연은 일본 사회에 일본인 외에도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을 널리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양심 있는 일본 시민들이 움직였다. 이치바 준코 씨도 그중 한 명이다.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손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만 승소 혜택은 손씨 한 사람에게만 국한됐다.

일본 내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은 이후 한국에 생존해 있는 피폭자 모두에게 원호 혜택을 적용하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끈질긴 싸움은 일본 정부를 움직였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는 일본 정부가 한국인 피폭자에게 40억 엔, 사할린 거주 한국인에게는 60억 엔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인 피폭자 1세대들은 건강수첩을 받아 일본의 지정 의료기관을 방문해 방사능 후유증을 치료받거나 의료비를 지원받았다. 2015년 9월에는 일본 최고재판소가 일본 국외 피폭자에게도 동등하게 의료비 전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연합뉴스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 세 번째) 등이 8월6일 열린 원폭 희생자 추모제에 앞서 원폭 피해자들에게 절하고 있다.

 

박상복씨는 “일본 시민단체에서 우리들 국내 소송비용까지 지원해주며 도왔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처음 방문해 한국인 피폭자를 언급한 것도 이치바 준코 씨의 노력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미국도 원폭 피해자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준코 씨의 의견에 한국 피폭자 단체도 공감하며 연대하고 있다.

박상복씨는 원폭 및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국내의 냉대와 무관심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다.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을 생전에 찾아간 적이 있다. 강제징용 배상에 대한 입장을 따져 물었다. 박 회장은 ‘우리가 그때 그 청구권 자금 받은 걸로 기업도 나라도 이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징용 끌려가신 분들에게 보답을 해드려야 한다’고 말하더라. 그러고 1년도 안 돼 작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폭자 1세대 규모는 줄어든다. 피폭자 2~3세대에게 원인 모를 희귀 질환이 발병하고 있다. “피폭자 부모를 둔 2~3세대는 절반 이상이 희귀병을 앓고 있다. 최근 국회에 이들의 심각한 유전병 실태를 알리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피폭자 후손의 건강 문제는 2002년 김형률씨가 공론화했다. 국내 원폭 2세 환우 문제를 세상에 알린 그는 반핵평화인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닌 전쟁과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한국 원폭 2세 환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아, 원폭 2세 환우에 대한 지원이 담긴 특별법 제정 운동을 벌였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결국 2005년 5월29일 서른네 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2016년 원폭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이듬해부터 시행되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실질적 지원으로 이들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김형률씨가 주장한 후세의 건강권 문제가 빠진 법안이라, 관련 시민단체들이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원폭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 8월6일 오전 10시, 경남 합천에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한국인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날짜에 맞춰 해마다 열리는 희생자 추모제에는 올해 처음 장관이 참석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일본의 침략과 지배로 인한 역사, 이런 아픈 역사의 희생자를 가슴에 새기고 원폭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며 평화의 초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합천 추모제에 참석한 박성복씨는 “74년 동안 한국 정부, 특히 외교부는 우리가 일본 대사관과 정부를 향해 따지고 소송할 때, 피해 당사자들을 만나서 어떤 논의도 한 적 없다. 솔직히 그게 제일 괘씸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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