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기본소득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부가 돈을 그냥 주는 것’이라는 설명이 워낙 단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지 파악하는 이도 많지는 않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낯설지 않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개념이다.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BIEN)는 기본소득이 “수입이나 고용 상태 조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정기적 현금”이라고 정의한다. 쪼개어보면 정기성·현금성·개별성·보편성·무조건성 등이 기본소득의 요소다. 기본소득을 정의하는 출발점이자 타협할 수 없는 제1원리는 학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되어 있다. ‘무조건 지급하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하든, 일할 의사가 있든 없든, 가족이나 친척이 얼마를 벌든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고 현금을 주는 제도가 기본소득이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이라는 생각에는 철학적 논거가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을 이끈 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1796년 〈농업의 정의〉에 기본소득과 흡사한 제안을 했다. “전국적 기금을 창출해 21세가 된 이들 모두에게 15파운드를 주는 것”이다. 당시까지 나온 공공복지 제안은 대개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시혜에 가까웠다. 하지만 페인은 “자선이 아니라 권리” 차원에서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페인에 따르면, 토지는 인류의 공동재산이다. 그렇다면 설사 어떤 부지런한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서 쓸 만한 농토로 만들었다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 그 농부의 몫은 황무지가 농터로 변하면서 추가된 가치(부가가치)이지 토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간자가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까지 행사하게 되는데, 페인은 그 소유자가 공동체(토지의 진정한 주인)에 대해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내고, 공동체 성원이 그 돈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게 페인의 주장이었다.

오늘날의 기본소득론자들 역시 이 같은 ‘권리론’에서 정당성을 찾는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토지 이외의 유·무형 자산에 대해서도 점검할 필요가 생겼다. 공기는 만인의 것이다. 그런데 대기질을 저하시키는 대가로 얻는 이익은 공장이 가져간다. 개인정보도 만인의 것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를 이용해 번 돈은 기업이 얻는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단순한 사회적 불평등 해소책이 아니라, 공통 부(共通富)의 기원을 밝히고 이를 재분배하는 작업에 가깝다.

고용률이 높고 이에 따라 공통 부가 원활히 분배되던 시기에는 이런 논의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임금의 혜택을 안정적으로 누렸기 때문이다. 기업은 ‘만인의 것’에서 얻은 이익을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하고, 노동자는 가족을 부양한다. 이 모델은 국가가 사회적 부를 추산한 뒤 성원들에게 현금으로 분배하는 일에 비해 더 손쉽고 효과적이다.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대기업이 그 중심에 있었다. 1950년대 제너럴모터스(GM)의 CEO였던 찰스 윌슨은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 좋고,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라고 말하곤 했다.

‘임금을 통한 분배’ 모델이 위태로워졌다는 게 기본소득론자들의 위기의식이다. 기업이 사람을 직접 고용할 필요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글로벌 IT 기업은 거대 제조업 기업들보다 훨씬 적은 인력을 쓰면서도 훨씬 많은 매출액을 과시하고 있다. 제조업 대기업들 역시 자동화하면서 노동자들을 평생 고용할 이유가 줄었다. 업무별로, 단기적으로 사람을 쓰는 기업이 많아졌다. 인터넷을 통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인력을 충원할 수 있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혼자 받는 임금으로는 수십 년간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한 나라는 사정이 낫지만 어떤 복지제도도 고용계약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불가능하다.

ⓒ연합뉴스2016년 7월 김종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축사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세상 올까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감염병 때문에 일이 멈추는 사태 앞에서 나온 고민이었다. 기본소득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지난 2월이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코로나19의 경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가계 지원책으로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제안했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도 공감을 표했다. 이 지원책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시사IN〉 제653호 ‘재난기본소득 지급, 보편적? 선별적?’ 참조). 결국 정부는 지난 5월 가구 단위로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준 뒤에도 기본소득은 정치권에서 인기 있는 의제로 남아 있다. 이재명 지사는 6월5일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은 코로나 이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정책”이라고 썼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6월8일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이해한다. (…) 재원 확보 방안과 지속 가능한 실천 방안 등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미래통합당에서도 기본소득에 전향적인 의견이 나온다. 6월3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물질적 자유의 극대화가 정치의 기본적 목표”라고 말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배고픈 사람이 돈이 없어서 빵을 사먹을 수 없다면 그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나?”라며,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기미까지 풍기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 6월23일에는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식 기본소득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보수 세력에서 말하는 기본소득은 ‘공통 부에 대한 권리’에서 출발한 구상과는 결이 다르다. 이들은 기본소득의 논리적 원천보다 그 ‘효용’에 더 집중한다. 비대한 정부가 운영하는 비효율적인 사회보장제도를 기본소득으로 단순화하자는 것이다. 지난 5월의 인터뷰에서 김세연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 기본소득 도입의 전제가 “정부의 규모와 기능을 대대적으로 축소 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세출 구조조정, 공무원 감축 등을 거론했다.

보수적 기본소득론의 뿌리는 미국의 보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0년대에 주창한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이다.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보다 적게 버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자는 제안이다(〈시사IN〉 제468호 ‘판도라의 상자, 기본소득’ 참조). 프리드먼은 “누구든 남의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행 복지의 혼란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특히 복지정책 전문가들의 비판이 거세다. ‘부를 나눠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할 방법이 기본소득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같은 금액을 나눠주는 것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몰아서 지급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 분배 방식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구직 의사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타당할까? 기본소득론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재명 경기도지사(왼쪽 두 번째)가 2019년 4월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전시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2017년 나온 〈21세기 기본소득〉은 기본소득 이론을 집대성한 안내서로 꼽힌다. 저자 중 한 명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루뱅 대학 교수는 BIEN의 전신인 ‘기본소득 유럽네트워크’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모두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사회적 약자들의 ‘협상력’을 높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본소득과 달리, 구직급여 같은 조건부 수당은 ‘구직 노력을 입증해야 지급한다’는 요건이 있다. 저자들은 사회학자 빌 조던의 글을 인용했다. “이(조건부 수당) 시스템은 국가의 수당을 주는 경우와 빼앗아가는 경우를 정해놓은 규정들에 기초하고 있다. 고용주들은 바로 이러한 규정들 덕분에 권력을 쥐게 된다. 당국자들은 그런 규정들로 인해 사람을 아주 끔찍하고 보수도 형편없는 일자리에 억지로 밀어넣을 수 있게 된다.” 구직 의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나쁜 일자리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자의 이런 처지를 아는 고용주는, 위험한 일과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으로도 사람을 쓸 수 있게 된다.

어떤 의무도 지우지 않고, 재산이나 소득 조사 없이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이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불균형을 흔들 수 있다고, 저자들은 본다. 기본소득으로 생계가 해결되는 사람은 임금이 적고 고된 일자리를 거절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도태된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면 고용주는 결국 임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좋은 일자리’의 상 자체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보다 그 일자리가 충분히 매력적인가 여부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임금이 아주 낮더라도 일 자체가 매력이 있거나 유용한 훈련의 기회가 되거나 좋은 네트워크를 갖게 되거나 승진 전망이 밝거나 하는 조건이 충족되면 쉽게 그 일자리를 수락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래서 ‘일하지 않아도 주는 돈’은, 일을 ‘하고 싶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생필품을 사는 데 충분한 소득을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지급하자”라고 주장한 버트런드 러셀은 1918년 발간한 〈자유로 가는 길〉에 이렇게 썼다. “경제적으로 게으름을 가능케 했을 때 얻게 되는 한 가지 이점은, 노동을 가급적 하고 싶은 활동으로 만들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가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 대목은 특히, 기본소득이 ‘가구당 지급’이 아니라 ‘개인별 지급’을 고집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생산가능인구에 속하지 않거나 가사를 전담하는 가족 구성원 개인은 경제적으로 ‘가장’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도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받는다면 구성원들의 권력관계가 바뀔 수 있다. 가족 내부에 존재하는 억압과 통제를 완화할 수 있다.

긴급재난지원금 이후 바뀐 상황

문제는 남는다. 기본소득이 개인의 협상력을 증진하려면 그 액수가 충분해야 한다. 〈21세기 기본소득〉 저자들은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기본소득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본소득이 “기본적 필요 욕구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들을 구매하는 데 충분한 액수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그러나 이들은 “지급 액수는 기본소득 제안을 평가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저자들이 제안한 액수는 각국 1인당 GDP의 25% 정도인데, 한국 기준으로 500조원 정도다. 국내에서는 도입 초기 GDP 10%를 지급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렇게 해도 연간 약 200조원이 든다.

ⓒAP Photo2016년 5월14일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앞둔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소득 걱정을 덜게 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대형 펼침막이 등장했다.

2009년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를 창립한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증세를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 사회가 긴급재난지원금 수령 경험을 겪었기에 그 실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강 교수는 말했다. “두 가지 선입견을 넘었다. 첫째, ‘가계 지원은 경제에 해로운 포퓰리즘이다’. 하지만 막상 기업 지원의 10분의 1쯤을 가계에 줘보니 경제에도 좋았다. 둘째, ‘세금 운용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진짜 돈을 다 주네?” 국가경제를 위해 지원금을 ‘사양’하거나, 세금 용처를 불신하던 사람들은 기본소득 제안 앞에서 이제 계산을 하게 된다. 증세론에 무조건 고개를 젓던 사람들이 ‘얼마 걷어서 얼마를 주는 건데?’라고 묻게 된 것은 큰 변화다. 강남훈 교수는 공통 부 개념에 기대어 탄소세, 데이터세, 토지보유세 등을 기본소득 목적세로 걷자고 주장했다.

‘추가 세수가 발생하면 열악한 현행 사회보장제도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두고 강 교수는 “선후 관계가 잘못됐다”라고 말했다. 증세라는 사회적 합의를 용이하게 만드는 수단이 기본소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조건 되돌려준다’는 보장이 없다면 세금을 더 내지 않을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게 강 교수의 견해다. 6월23일 이재명 지사는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은 증세를 전제로 한 복지적 경제정책입니다. (…) 세금이 나를 위해 쓰인다고 확신되면 저항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기본소득 도입 주장에 고개를 젓는다. 실례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정책은 ‘실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조세부담률이 높은 유럽 복지국가들은 기본소득을 도입하지 않았다. 2016년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기본소득 도입안은 찬성 23%, 반대 77%로 부결됐다. 핀란드의 중도우파 정부는 2017년부터 2년 동안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 조건부 실업급여 560유로(약 70만원)를 받던 사람 2000명을 뽑아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준 것이다. 취업한 뒤에도 지급했다. 기본소득을 받으면서도 구직과 노동에 충실해서 노동일을 더 늘린다면,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을 꺾지 않으며, 이에 따라 국가경제 차원에서 노동 공급을 줄이지 않을 것’이라는 실증 사례가 된다. 실험 결과,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실업급여만 받는 사람에 비해 연간 평균 6일을 더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소득 수령자의 노동일이 늘어나긴 했지만 당초의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은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고취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해 펴낸 책 〈소득의 미래〉에서 핀란드 실험을 다룬 이원재 LAB 2050 대표는 실험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핵심은 두 가지다. 취업 일수는 늘지 않았다. 자유롭게 해주면 행복하다. 실험에서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에게 취업하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 시간을 어디 썼는지 물었다. 대부분 자녀를 돌보았고 지역사회 활동, 봉사를 했다고 말했다. 고용 계약을 맺고 돈을 받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데에 자발적 활동을 한 것이다. 이것도 사회적 부가가치다.” 이 대표는 큰 규모의 사회복지제도가 오랫동안 뿌리내린 유럽보다 오히려 한국이 기본소득 도입에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제도가 견고한 유럽은 기본소득과 겹치는 수당이 많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아 제도 개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유럽이 지금의 복지제도를 시작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다. 백지 상태에서 사회 시스템을 설계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굳이 1930년대 스웨덴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 “수중에 있는 돈은 자유의 도구이지만, 기를 써서 벌어야 하는 돈은 노예를 만드는 도구이다”라고 썼다. 루소 자신은 기본소득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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