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재난은 아주 특별한 정치의 공간을 연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만 하는 재난의 시기에, 정치는 평소라면 엄두도 내기 힘든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재난은 사회를 더 불평등하게 만들기도 하고, 더 평등하게 만들기도 한다. 1990년대 한국의 외환위기는 불평등한 각자도생 사회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극적인 평등화를 경험했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하도 인상적으로 줄어서 ‘대압착’이라고 부른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어느 길로 가려 하는가가 중요하다. 이런 집단적 결정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치의 본령이다. 코로나19 시대는 그래서 정치의 시대이기도 하다.

‘뉴딜’이 화두다.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계약이 시급히 요구된다. 재난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을 때린다. 이 고통을 어떻게 나누어 져야 할까. 재난은 본질상 새로운 사회계약을 요구하므로, 코로나19 시대에 ‘한국판 뉴딜’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재난기의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드는, 정치의 본령에 이토록 가까운 일을 할 기회는 정치가들에게도 흔치 않다.

〈시사IN〉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주창하는 정치가들을 연속해서 만나본다. 질문은 하나다. “진짜 뉴딜은 ‘○○○○’이다.” 이 문장을 주고 빈칸을 채워달라고 했다. 단순히 그럴듯한 아이디어나 혹하는 아이템만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자신이 제안하는 변화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새로운 사회계약인지, 그게 코로나19 재난에 맞서는 데 왜 중요한지, 그 새로운 계약을 만들어내는 데 어떤 난관이 있는지, 그걸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를 모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재치가 아니라 철학이 필요하다.  

‘진짜 뉴딜’ 시리즈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의제를 선도해온 지방정부 수장들을 3회 연속으로 만난다. 첫 타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6월16일 서울시장 집무실에서 60분 동안 만났다. 그는 〈시사IN〉이 준 빈칸을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채웠다.

왜 전 국민 고용보험이 진짜 뉴딜인가?

코로나19는 대전환의 시대를 만들 것이다. 인류 역사에 남을 문명 대전환까지도 갈 수 있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을 겪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을 내걸었다. 한국에서는 이걸 단순히 공공 일자리를 제공한다거나 경기부양용 토목사업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당대 자본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냈다. 독점금지법, 노동조합 강화, 복지 강화까지 일련의 정책이 미국을 바꿨다. 뉴딜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시대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뉴딜 이전 극에 달한 불평등·불균형·부조화의 국가로는 한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지금이 대공황기에 준하는 전환기라고 보나?

그때보다 더 큰 전환기다. 한국에 닥친 가장 큰 위기는 양극화와 불평등이다. 한국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인구도 5000만명인 강대국이다. 그런데 왜 헬조선이란 말이 나올까.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가 위기를 잘 졸업했지만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다. 지금은 달라야 한다. 진짜 뉴딜은 기존의 병든 사회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그 큰 기획 중 하나로, 중심이자 상징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질서는 전통적인 기업과 노동자 관계, 대공장 제조업, 남성 풀타임 임금노동자 중심으로 굴러가는 질서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그게 전 국민 고용보험의 의미다.

ⓒ연합뉴스임대 전단이 붙은 폐업 상가. 박원순 시장은 자영업자도 전 국민 고용보험에 가입하면 이익이라고 말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뭘 어떻게 바꾸자는 얘기인지부터 해보자.

우리나라 취업자 수가 2700만명쯤 된다. 취업자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임금노동자보다 넓은 개념이다.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처럼 일을 해서 돈 버는 사람을 다 포괄하는 말이다. 취업자 중에서 고용보험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1400만명쯤 된다. 대부분 아주 취약한 분들, 특수고용 노동자나 생계형 자영업자 같은 이들이다. 이분들이 코로나19 경제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장대비가 막 내리는데,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이 절반밖에 없는 거다, 지금.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우산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복지체제는 없다. 전 국민 고용보험을 해낸다면 우리가 과거에 해낸 전 국민 건강보험보다도 더 중요한 복지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월급 받는 사람들은 회사와 노동자가 고용보험료를 나눠 낸다. 월급이 아닌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보험료는 어떻게 걷나?

그게 우리가 제안하는 혁명적 변화의 본질이다. 지금은 기업이나 노동자나 월급 기준으로 보험료를 낸다. 이걸 소득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 월급이든 배달 수수료든 자영업 소득이든 따지지 말고, 번 돈만큼 내도록 하자는 얘기다. 기업도 고용한 숫자만큼 내는 게 아니라 번 돈, 그러니까 이윤 기준으로 보험료를 낸다. 원칙은 단순하다. 근로소득이든 사업소득이든, 소득이 있는 사람은 다 고용보험에 들어온다. 그리고 고용보험은 소득 상실 상태에 빠진 모든 취업자를 보호한다. 그래서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얘기를 한 것이다.

둘이 어떻게 이어지나?

탈산업화와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옛날처럼 고용과 피고용 관계로 잡히지 않는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아르바이트 이런 게 워낙 많다. 이걸 기존 개념을 고쳐가며 대응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월급 중심 고용보험을 소득과 이윤 중심으로 바꾸면 이런 구별이 고용보험에서는 다 사라진다. 누구에게나 공평해진다. 누구든 버는 만큼 보험료를 내고 어려울 때 도움받으면 된다. 굉장한 패러다임 전환이다. 투잡, 스리잡 하는 식으로 노동문화가 바뀌어도 바로 대응할 수 있다.

기업도 고용 중심에서 이윤 중심으로 바뀌면 변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지금은 고용을 많이 하면 그만큼 보험료도 많이 낸다. 우리가 기업들한테 고용 창출하라고 얼마나 많이 요구하나? 지금 사회보험은 기업이 고용을 많이 할수록 보험료를 더 내는 구조다. 이윤 중심으로 바꾸면 고용을 많이 하는 기업이 득을 보고, 자동화해서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이 돈을 더 내게 된다. 고용을 많이 하는 사용자 처지에서도 좋은 일이고, 우리 사회가 가려는 방향과도 맞다.

좋은 변화만 있다면 지금까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이 변화로 누가 손해를 보나?

문제는 ‘고용보험료를 누가 낼 것인가’다. 소득에 따라 내면 기존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인데, 다만 고용보험 지출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미 가입한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들이 약간 더 부담할 수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을 사회적 연대라고 말하는 이유, 사회적 대화가 꾸준히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그거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이 변화를 선도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거대한 신호다. 왜냐? 지금까지 우리 노사관계는 지나치게 투쟁적이고 갈등적이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게 참으로 어려웠다. 서로 분노와 적대가 깊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기업 소속 조합원이 많은 양대 노총이 전 국민 고용보험 의제를 먼저 제기했다. 나도 놀랐고, 이것이 한국 사회가 거대한 전환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연합뉴스6월10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양대 노총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양대 노총 지도부 상견례 및 주요 현안 간담회’를 열었다. 양대 노총은 사회적 연대를 선도하려 하고 있다.

자영업자에게도 안 내던 돈을 새로 내라고 해야 한다. 예산도 더 써야 한다. 정치가로서 부담스럽지 않나?

맞다. 그런 부분이 있다. 그런데 따져보면 (자영업자가) 보험료를 내는 손실과 비교할 때 보험 가입으로 얻는 이익이 워낙 크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정부로서도 손해가 아니다. 사람들이 계속 추락하는 절벽이 있다고 치자.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자고 앰뷸런스를 절벽 밑에 대기해놓을 거냐? 절벽 위에 울타리를 치고 사전 예방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정부 처지에서 계산해보면, 일자리안정기금 5조원과 근로장려금 4조원 등으로 나가는 돈에서 일부만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돌려도 된다.

가입을 강제하되 취약계층의 보험료 일부는 정부가 보조해주는 방식인가?

그렇게 가야 할 것이다.

월급 기준에서 소득 기준으로 바꾸면, 소득을 파악하고 보험료를 걷는 주체가 필요한데? 고용보험공단이 이걸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운영하고 집행하는 기관이 달라져야 한다. 국세청이 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세청이 취업자 소득을 파악하는 수준이 대단히 높다. 몇 가지 준비만 하면 월급 말고 다른 소득도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만큼 소득 자료가 전산화된 나라가 몇 없다.

국세청에 그런 기능까지 주면 국가가 너무 비대하고 강해지는 건 아닌가?

그래서 정부 투명성과 공적제도의 신뢰를 높이는 정책이 같이 가야 한다. 시민들이 언제라도 국세청 업무를 들여다볼 수 있으면 안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코로나19 위기는 우리에게 대전환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저신뢰 사회, 불신이 높은 사회다. 세금 부담으로 따지면 우리 사회가 저부담·저복지 사회라고 얘기한다. 이걸 부담도 좀 더 올리고 복지도 끌어올리는 사회로 가야 한다. 그런 사회가 국민 행복도와 삶의 질이 높다. 우리 국민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문제는 국민이 내는 돈을 정부가 정말 제대로 된 곳에 효율적으로 투자해서 내 삶을 바꿔줄 것이냐, 이걸 못 믿는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투명성을 끌어올리고 신뢰를 증진하는 정책이 함께 가야 한다. 고신뢰 사회로 가야 복지 강화도 가능하다.

투명성을 끌어올릴 복안이 있나?

예를 들어 미국에 이런 정책이 있다. 정부의 부패나 예산 낭비에 대해 민간이 신고를 할 수 있다. 신고가 받아들여지거나, 안 받아줘도 소송까지 가서 이기면, 그 사람이 적발한 금액의 25%를 받는다. 국방산업 같은 건 예산이 워낙 덩치가 크니까 25%만 해도 큰돈이다. 워싱턴에 가면 하루 종일 이것만 들여다보는 전문가 그룹이 있다. 정부 처지에선 소송에서 지더라도 75%만큼 이득이다. 이러면 정부가 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시에서 이걸 도입해보려 했는데 포상금 상한선이 1억원으로 묶여 있어서 못했다.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 차별 문제가 있다. 소득 기준으로 재편하면 건강보험도 같은 방식으로 바꿀 수 있나?

지금은 고용보험에만 집중하고 싶다. 얼마든지 차츰 논의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부·여당은 예술인,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자영업자를 단계적으로 가입시키는 방향을 잡았다. 박 시장의 접근법과는 결이 다른데?

대통령이 점진적 접근을 말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게 직역별 단계적 접근을 뜻한다고 보지 않는다. 워낙 큰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그러니까 합의 과정에서 갈등과 분란을 최소화하도록 점진적으로 논의해가자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후 논의 과정을 보면 민주노총이 가장 앞장서 주장하는 등 사회적 연대가 작동하고 있다. 중요한 기회가 열린 것이다. 소득 기준으로 바꾸면 예술인,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자영업자를 구분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전면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큰 재난을 맞이해서 큰 틀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그걸 못하면 갈수록 힘들어진다. 큰 변화는 늘 큰 위기에서 탄생했다.

직역연금 가입 직종인 교원, 공무원, 군인은 고용보험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은?

이분들은 사실 정년이 안정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고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취약한 분들을 새로 가입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위험이 크든 작든 똑같이 나눠 부담하자는 게 사회보험의 기본 원리다. 그렇다면 이들도 들어와야 하지 않나?

그 부분은 얼마든지 검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핵심은 비 맞는 사람을 함께 우산 씌워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전 국민 고용보험이라는 기획의 정치적 난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미가입자 중 가장 고용이 안정적인 교사와 공무원은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얻을 이익이 사실상 없지만, 사회보험의 기본 원리로 보면 이런 직종도 모두 가입시켜야 한다. 하지만 정치가는 당사자의 반발을 부를 이런 제안을 내놓기가 매우 어렵다. 박원순 시장은 “이분들도 들어와야 한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비 맞는 사람”, 그러니까 미가입자 중 취약계층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미가입자 문제를 다루면서 교사와 공무원 문제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접근법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최선의 결론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길을 어떻게 열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정치는 자주 이런 덫에 빠져 옴짝달싹 못한다. 대규모 재난이 예외적인 정치의 공간을 열어주는 이유는 이런 덫을 훌쩍 뛰어넘을 예외적인 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뉴딜은 사회 재계약 프로젝트였던 동시에, 미국 민주당을 장기 집권으로 이끈 정치가의 기획이기도 했다.

서울시장을 9년째 하니까 이제야 뭔가 정착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질문에 굉장히 공감한다.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빈에는 공공임대주택이 40%가 넘고, 사회적 조합까지 포함하면 주거 문제로부터 거의 해방된 도시 같았다. 빈 시장이 그러더라. 오스트리아가 1944년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뒤로 사회민주당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고.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힘도 스웨덴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었다.

ⓒAP Photo사회민주당 대표인 스테판 뢰벤 총리.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힘은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었다.

한국 민주당도 총선 승리로 기회를 받았다.

국민들이 이 재난 국면에서 177석을 몰아주지 않았나.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의 대전환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실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개혁은 전광석화로 해내야 한다. 그것이 진보적 집권 세력으로서 민주당이 감당해야 할 책무다. 그걸 해내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 장기 집권으로 가야 한다. 아직은 이 단계라고 보지 않는다. 미래통합당이 워낙 시대착오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국민이 민주당에 기회를 준 단계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국민이 준 그 기회에 대한 응답이다. 국가 재설계 방향을 보여주는 의제다. 사회가 작동하는 철학을 바꾸자는 주장을 고용보험이라는 의제로 압축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대전환을 만들어내야 장기 집권이 가능하고, 장기 집권해야 대전환을 정착시킬 수 있다.

재난 국면에서 등장하는 다른 대안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중국사에서 춘추전국시대가 빛이 났던 이유는 자유로운 사상의 대개방 시대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전환기에 정치권이 논쟁다운 논쟁, 비전의 충돌, 여러 구상이 앞다퉈 꽃피는 시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논쟁은 자체로 환영하고 반가운 일이다.

왜 기본소득이 아니라 사회보험이 진짜 뉴딜인가? 예산 문제를 말하기 전에, 철학이 어떻게 다른가?

기본적으로 이 차이다. 기본소득은 일자리가 소멸해가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일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기본소득은 무차별로 지급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위험이 발생하면 지급한다. 이것은 굉장히 근본적인 철학 차이다. 복지체제를 흔히 선별주의와 보편주의로 분류하는데, 나는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무차별주의도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을 선별주의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직한 사람에게만 돈을 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보편주의다. 왜? 위험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모두가 평등하게 위험을 나눠 지기 때문이다. 선별주의는 미국식 의료보험 같은 것이다. 돈이 많거나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좋은 보험에 가입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아예 보험도 없는 것. 이러니까 미국은 방역에 구멍이 뚫리잖나.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주니까 보편주의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기본소득은 무차별주의다. 보편주의는, 건강보험으로 치면, 누구나 아플 수 있으니까 그 위험을 나눠 지자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한테도 돈을 똑같이 주자는 게 무차별주의다. 그게 기본소득이다. 나도 사실 기본소득 학습을 많이 했다. 서울시에서 실험해볼 고민도 했다. 그런데 정책 당국자로서 한정된 자원과 재정 안에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전 국민에게 월 10만원씩만 지급해도 60조원이 든다. 최근 우리나라 현금복지 지출을 전부 합치면 73조원 정도다. 이걸 전부 몰아줘야 감당 가능한데, 월 10만원을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나 있나. 충분성 원칙(기본소득은 기본 생계를 꾸려갈 만큼은 충분해야 한다는 원칙)에 해당 안 되잖나. 나는 실용주의자다. 기본소득이 좋은 정책이고 실현 가능하다면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정책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Xinhua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공장. 시대 흐름상 일자리나 직무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에 대한 철학도 극적으로 다르다. 기술 발전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숙명이라고 기본소득론은 보는데?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다. 노동이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전 국민 고용보험 구상 중에서 중요한 게 전 국민 평생학습체제다. 디지털 자본주의에서는 일자리의 성격이 너무나 빨리 바뀌기 때문이다. 영원한 일자리가 없으므로 실업의 충격은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흡수하고, 새로 생기는 일자리로 이 사람들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래서 평생학습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 성장하는 분야로 이동한다. 이러면 개인도 계속 성장할 수밖에 없다. 국가 전체가 더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바뀐다. 일자리도 오히려 늘어난다. 그래서 전 국민 고용보험은 복지정책인 동시에 성장전략이다.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줄인다는 건, 산업사회가 만든 익숙한 일자리를 줄인다는 뜻이다. 이것만 보면 안 된다. 다른 쪽에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역동성을 봐야 한다. 기본소득은 일자리 감소가 분명하고 돌이킬 수 없다고 확인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그건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본다.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고용안전망이 강화되면, 대기업 정규직 같은 좋은 일자리는 좀 더 해고가 쉽게 노동 유연성을 높이나?

그건 좀 신중해야 한다. 노동 유연성 때문에 너무 큰 고통을 겪은 세월이 있다. 시대 흐름상 일자리나 직무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창의적인 일자리나 프리랜서가 늘어날 것이며, 평생직장에 매이고 싶은 사람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시대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는데 정책으로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나.

서울시장으로서 구현 가능한 일이라기보다는 국가 차원의 어젠다로 보인다.

서울시에서도 부분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다. 그렇지만 국가 차원의 이슈인 건 틀림없다. 내가 ‘노동 존중 특별시’를 내건 사람인데, 대한민국 유력 정치인 중 하나이고 수도 서울 3선 시장이며 집권 민주당의 당원이다. 이런 주제에 대해 책임 있게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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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박원순 이재명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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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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