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클래식 과학소설계 3대 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7년에 발표한 소설 〈벌거벗은 태양〉은 ‘솔라리아’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행성의 총인구는 2만명으로 엄격하게 통제되며, 개인들은 각자의 거대한 영지에서 홀로 혹은 배우자와 함께 살아간다. 이렇게 적은 인구로도 행성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로봇 덕분이다. 인간은 예술과 학문 같은 고차원적 정신활동에 집중하고, 모든 노동은 로봇이 도맡는다. 인간 한 명이 로봇 약 1000개를 거느리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주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무인 자동차, 홀로그램, 인공지능의 모습을 그려낸 상상력, 인간과 휴머노이드 로봇 탐정 콤비의 모험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 중 일부는 이미 현실이 되었고, 나머지도 SF 영화의 흔한 요소가 되었기에 오늘날 독자들이 특별한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이 소설을 다시 떠올린 것은 코로나19 탓이다. 솔라리아 행성은 독특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인간은 출생 직후부터 다른 사람과의 직접적 접촉을 피하도록 계도된다. 타인과 홀로그램을 통해 의사소통하고(이를 ‘조망하기· viewing’로 표현했다), 직접 만나는 일(‘보기·seeing’)은 극도로 제한된다.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는 이유는 질병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식의 임신은 모두가 꺼리는 더러운 일로 여겨지고, 환자와의 대면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의사는 직업적 단련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소설 속 살인 용의자는 형사가 자신을 체포하러 찾아오자 (사실은 휴머노이드 로봇이었음에도) 타인과의 접촉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대면 접촉(seeing)을 피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만나고(viewing), 직접 만난다고 해도 서로 악수를 하지 않으며 항상 마스크(소설에서는 코 필터)를 착용하는 우리의 새로운 일상은 솔라리아 행성인들과 닮아 있다.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그들처럼 나만의 넓은 영지를 소유하거나 수많은 로봇을 거느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학문과 예술에만 심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로봇들은 아직 소설 속에만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비대면 시대를 열어갈 해결책으로 로봇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를테면 격리병실에 의료진이 직접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니 로봇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병원은 원내 감염을 막기 위해 체온 측정과 간단한 문진을 할 수 있는 안내로봇, 무인 청소로봇을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터치스크린 접촉을 통한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은 일단 덮어두더라도, 과연 이들이 감염 예방에 어떤 효과가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하기는 하다. 물론 지금은 그저 비싼 장난감처럼 보일지라도, 과학기술은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해왔고, 언젠가는 솔라리아 행성처럼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미래가 당장 내일, 다음 달, 내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코로나19 감염증으로 격리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있다. 그는 원래 건강상태가 양호했고, 호흡은 힘들지만 혼자 움직일 수 있으며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의료진은 격리병실 바깥에서 생체 징후를 모니터하고, 전화로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의료진은 정해진 시간에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격리병실에 들어가 수액을 교체하거나 혈액 샘플을 채취하며 환자 상태를 직접 살핀다.

또 다른 환자가 있다. 요양병원에서 이송된, 극도로 허약하고 혼자 거동할 수 없으며 의사소통마저 어려운 노인이다. 이제 코로나19 치료만이 문제가 아니다. 기저귀도 수시로 갈아줘야 하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자세도 자주 바꿔줘야 한다. 약 복용이나 식사할 때도 혼자 내버려둘 수 없다. 환자는 몸에 부착해놓은 생체 모니터나 수액 연결 장치를 떼기도 하고, 혼자 있는 게 싫다며 집에 가겠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제 의료진은 침대 머리에 앉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설득하고, 가끔은 이러시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야단도 쳐야 한다. 얼굴을 씻기고 식사를 도와드리면서, 자식 자랑에 맞장구 쳐주고, 외로운 마음을 토닥이기도 해야 한다. 의료진 처지에서 본다면, 환자와의 접촉 빈도나 강도 모두에서 이전 사례보다 감염 위험이 월등히 높아진다. 그러나 이런 환자야말로 어떤 로봇으로도 돌봄을 대신할 수 없다. 비대면 노동, 언택트(untact)의 시대를 불러온 질병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손길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만들었다.

ⓒ연합뉴스2016년 10월12일 노동건강연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관계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메탄올 실명 노동자 추가 확인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꼭 필요하지만 경시되는 노동

그렇다고 필수적 돌봄 노동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3월 중순,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돌보던 간병 노동자 역시 감염되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신도 당뇨병을 앓고 있던 77세의 간병 노동자는 경산에서 청도까지 와서,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든 여성 돌봄 노동자의 죽음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4월 초, 코로나19를 확진받은 의사가 사망하자 첫 번째 의료인 희생이라며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던 것과 대조적이다. 어느 죽음인들 경중이 있을까마는, 꼭 필요하지만 위험한 노동, 그러면서도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의 모습을 드러낸 씁쓸한 풍경이었다.

언택트의 시대에 꼭 필요하지만 경시되는 노동은 돌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재기 없는 K방역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택배 시스템도 그중 하나다.

5월 마지막 주 쿠팡 부천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확인된 직후 근무자에게 진단검사와 자가격리를 안내하는 중앙안전재난본부의 ‘재난문자’를 받았다. 내부 연락망을 통해 직원에게만 공지하면 될 일이다. 이걸 왜 전 국민에게 쏘아 보내나. 일용직·임시직 노동자들의 연락처를 파악하는 동안 급한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리라. 부천시 발표에 따르면, 이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 총 3673명 중 정규직은 98명에 불과하고 계약직 984명, 일용직이 2591명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초단기로 일하며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잦았고, 이곳 말고 또 다른 일터에서 임시직 일자리를 병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강도가 높아서 마스크를 쓰고 작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작업화와 작업복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사용했다. 노동자는 동화 속 일개미처럼 번호로 불리면서 일을 하고, 어제 나왔던 이가 오늘 안 나와도 별일이 없다. 아프면 3~4일 쉬어도 괜찮다?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어차피 줄 서 있고, 아파서 못 나가면 본인만 손해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병가를 주어야 하는 책임, 고용을 보장해야 하는 책임, 노동자를 ‘관리’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회사는 자유롭다. 이런 위태로운 노동을 발판 삼아 우리는 자랑스러운 K방역을 일궈낸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한국의 노동환경은 시대를 ‘초월’한 곳이었다. 현장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산업자본주의 초기 어느 시대에 툭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근대적 계약, 사업주의 노동자 관리, 노동자의 집합적 권리의식, 노동법 등이 아직 탄생하기 이전 시대 말이다. 그런데 동시에 탈근대적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구조와 안정적 질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흩어진 개인들만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근대와 탈근대의 기묘한 공존은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계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2015~2016년에 일어났던 메탄올 중독 실명사건은 여러모로 상징적이었다. 21세기에 노동자들이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노동자가 결근했는데 회사에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노동자에게 장기적으로 투자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것도 없고, 그저 파견업체를 통해서 다른 노동자를 데려오면 그만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작업장 노동자끼리도 서로 연락처를 모르는 일이 흔했고, 문제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 피해자는 최초 피해 사례 이후 언론에서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자기가 일했던 곳에서 실명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자신의 문제를 제보했다. 당시 피해 노동자들은 공통적으로, 본인들이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재보험을 신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험료도 안 냈는데 산재를 신청하면 범죄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다. 산재보험은 기업주가 가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처음 알게 되었다.

거제 조선소 물량팀 노동자에게서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조선소에서만 15년 동안 용접과 보온 작업을 해온 베테랑이었는데, 한 번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였던 적이 없다고 했다. 일하다 다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당연히(!) 한 번도 산재를 청구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회사와 싸워서 ‘공상’ 처리를 한 적은 있다고 했다. 조선소 경기가 어려웠던 2015 ~2016년에는 임금을 들고 잠적해버리는 물량팀장들 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모두 21세기 상황이다.

파편화된 노동은 플랫폼 노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코로나19 간담회에서 만난 퀵서비스 노동자는 일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지금과 달랐다고 말했다. 업체 간에 주문 플랫폼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소속된 사무실이 있었다. ‘사장님’이 “얘는 우리 기사”라고 하면서 가끔 야유회도 같이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소속 업체가 없다. 노동자 한 명이 30군데 중개업체와 연결되어 일을 할 수도 있다. 프로그램 수수료만 낸다면 몇 군데를 뛰든 업체도 상관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수 초 단위로 뜨는 오더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월 1만6500원의 사용료를 내는 프로그램 수십 개를 설치한다. “5초에 콩알만 한 빵 하나씩 떨어지는 건데, 5초를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건데, 10대를 꽂아놓으면 쉬지 않고 계속 주워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배고픈 우리는. 계속 주워 먹을 수 있는 걸 택하겠죠.” 소속 회사가 없으니 ‘해고’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개업체에서 벌점을 매겨 기사의 스마트폰에 주문이 뜨지 않도록 조치하면 노동자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그저 기다릴 뿐이다. 아프면 3~4일 쉬기? 당연히 가능하다. 기업에겐 어떤 보호도, 보장도, 책임도 없으니 말이다.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자신들의 노동을 보면 근로기준법이 왜 제정되었는지, 최저임금제도가 왜 도입되었는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금지’라는 개념이 왜 생겨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오늘날 노동자들이 재방송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술을 활용하여 좀 더 세련되게!

ⓒ연합뉴스퀵서비스 노동자는 수 초 단위로 뜨는 오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월 1만6500원을 내는 프로그램 수십 개를 설치한다.

팬데믹 이후 더욱 심화되는 불평등

대학 시절, 선배들은 비장한 각오로 공장에 위장취업했던 1980년대의 무용담을 들려주고는 했다. 지금처럼 파견노동이 활성화되었다면 위장취업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름이나 학력, 개인의 사연에 아무도 관심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기업에게 필요한 관리와 감시까지 소홀해진 것은 아니다. 기술 덕분이다. 콜센터 근무 자료를 보면 개인 노동자마다 응대한 콜 수와 평균 응대한 시간, 화장실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시간까지 초 단위 통계가 매일 기록된다. 퀵서비스 중개업체들도 GPS를 모니터링하며 기사의 동선을 추적하고, 벌점 제도를 통해 기사에게 공지되는 일감을 통제한다. 하청 노동자에게 건강보험·산재보험을 적용해주지 않는 조선소도 노조운동의 낌새가 보이는 블랙리스트만은 철저히 관리한다.

힘든 일자리라서 노동자들이 떠나면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임금이 오르거나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간호대학 졸업생 수는 크게 늘어나도 병원의 간호인력 부족은 여전히 심각하다. 노동환경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으면서 노동력 유입만큼이나 떠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농어촌을 떠나는 젊은이를 붙잡기 위해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기보다 이주노동자로 빈자리를 채우고, 그러면서 예전보다 노동환경이 더욱 열악해진 곳도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소속 경제학자들은 사스, 조류독감, 메르스, 에볼라, 지카 등 주요 감염병 유행이 지날 때마다 해당 국가들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도 전례 없는 대규모의 사업장 폐쇄와 더불어 일자리가 사라졌다.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일수록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업종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더욱 크다. 연구진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불평등 심화는 이전 어떤 유행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그래도 코로나19 유행이 가져온 긍정적 측면이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폭주를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콜센터에서, 물류센터에서 잇따라 문제가 터졌고,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돌봄 노동, 그림자 노동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모두들 집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화상회의를 하는 동안, 농사는 누가 짓고, 인터넷 회선과 서버, 전기와 수도는 누가 관리하며, 두루마리 휴지와 마스크, 손세정제는 누가 만들고, 그 배달은 누가 할 것인가? 모두가 사람을 멀리한다면, 환자는 누가 돌보고, 어린아이들과 노인은 누가 돌볼 것인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인간은 서로의 노동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는 자연인이다〉의 ‘자연인’도 도시에 사는 아내가 가져다주는 김치, 발전기로 돌리는 냉장고를 이용해 살아간다.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동, 우리 사회를 움직이게 해주는 노동이라면 그러한 노동을 존중하고 보답하는 것은 마땅하다.

초보 연구자 시절, 돌봄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황한 적이 있다.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러 가정을 방문했는데 밭에 고추를 심으라 하고, 치매 노인이 본인의 돈을 훔쳐갔다며 손찌검을 하고…. 말도 안 되게 부당한 사연들을 들으면서, 나는 그 노동자들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의 일면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많은 돌봄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 노인과 환자,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일 당장 그만두라’는 충고가 아니라, 소중한 노동에 걸맞은 존중과 보상이었다.

리처드 세넷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로봇, 인공지능, ICT, 플랫폼 노동.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면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노동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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