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미래와 기도
  • 랜디 서 (대중음악 평론가)
  • 호수 633
  • 승인 2019.11.0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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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악성 댓글에 시달려온 설리는 ‘꿋꿋하게’ SNS 활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몸의 자유, 낙태 위헌,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여성주의 의제에 대해 ‘당당히 목소리를 낸 페미니스트’였다.
ⓒSM엔터테인먼트지난 6월 설리(위)는 전곡을 직접 작사한 그의 첫 솔로 싱글 <고블린>을 내놓으며 가수로 복귀했다.

그의 죽음 앞에 말을 잃는다. 누구의 목숨인들 소중하지 않겠냐마는, 앞으로 시간과 기회가 많았을 젊은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특히 상실감이 크다. 그가 우리와 함께한 시간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본다.

설리, 본명 최진리. 1994년에 태어난 그는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처음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2009년 중학교 3학년 때에는 SM엔터테인먼트(SM)가 소녀시대의 뒤를 이어 야심차게 내놓은 걸그룹 에프엑스(f(x))로 데뷔했다. 하드코어한 사운드에 알록달록 기괴한 스타일링을 매칭한 에프엑스는 SM의 자랑스러운 포트폴리오였다. 설리는 특유의 매력적인 톤으로 ‘Attention boys 나는 좀 다를걸/ 다른 애들을 다 밀어내고 자리를 잡지’(‘첫 사랑니’ 중) 등 에프엑스의 귀엽고도 괴팍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포인트 가사를 불렀다.

2012년 에프엑스의 이름으로 발매된 미니앨범 2집 <일렉트릭 쇼크(Electric Shock)>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회사의 프로듀싱이 아이돌 기획을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루는 동안, 아쉽게도 설리는 마치 이 공로에서 유리된 듯 끊임없이 외모 위주로 평가받았다. 그는 그 어떤 별난 음악과 스타일링을 해도 예뻐 보이는 여자 아이돌로서 존재했다. 외모 매력은 에프엑스의 복잡한 음악을 대중음악계에 안착하게 한 무기였지만, 동시에 설리 개인에게는 철갑 같은 프레임으로 작용했다.

그를 향한 악성 댓글(악플)이 폭발하기 시작한 시점은 2014년 공개 연애를 전후해서였다. 설리는 2013년께부터 잦은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며 무대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SNS를 통해 은연중에 연애 사실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때의 그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 팬들은 그의 성실성에 의문을 던지며 하나둘 떠나갔다.

보통 인터넷상에서 악플 정화운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이들은 아이돌 팬덤이다. 악성인 연관 검색어를 좋은 말로 대체하거나 선플을 달아 악플을 양으로 압도하는 전략을 쓴다. 모두가 책임을 미루는 동안 악플이 일반이 되어버린 인터넷 생태계에서 팬들의 이런 헌신은 악플 받는 연예인의 거의 유일한 방패다. 설리는 2014년을 거치며 이런 도움을 줄 팬 베이스를 대부분 잃었다 (그렇다고 설리가 감당한 고통이 팬덤의 책임인 것은 결코 아니다. 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이런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소속사인 SM은 악플에 대한 법적 조치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그는 ‘어리고 예쁜 여성 아이돌’이라는 기대에 도전하기라도 하듯 꿋꿋하게 SNS 활동을 했다.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연애 사실을 공개한 뒤로 악플이 넘쳐났다. 더 이상 예쁘고 순결한 걸그룹 막내로 남아 있지 않기로 한 그를 단죄라도 하듯이. 순순히 욕망의 대상이 되어주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드러낸 여성에게 어떤 고통이 가해지는지 보라는 듯이 말이다.

악플 유형에는 단발적 욕설도 있지만, 집단적인 흐름도 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욕먹을 만한 사람인가’를 대중의 입맛대로 정의해가는 과정은 흡사 재해 같다. 흐름을 거슬러 편을 들면 함께 휘말려버리기에 쉽사리 도울 수도 없다. 설리는 ‘논란’이라는 이름으로 몇 번이나 이 과정을 거쳤다.

ⓒ연합뉴스에프엑스는 SM이 소녀시대의 뒤를 이어 야심차게 내놓은 걸그룹이다. 오른쪽 두 번째가 설리.

설리는 ‘욕먹을 만한 사람’이었나

그가 SNS에 편한 복장으로 사진을 올리면, 언론은 앞다투어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기사를 쓰고 논란을 만들었다. 이렇게 쓰인 기사는 포털의 대문을 장식하고, 숱한 유저들이 억지로 만들어진 논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사가 의도한 대로 악플을 썼다. 그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지만 여타 아이돌 팬들처럼 시간을 내서 선플을 달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의 기사 아래는 언제나 악플로 가득했다. 내용이 어떻든 버즈량이 많으면 돈이 되는 산업은 ‘욕먹을 만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이트 트래픽을 견인해 광고 수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욕먹을 만한 사람’으로 굳어져 한 번도 견디기 힘든 조리돌림을 연거푸 겪었다.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으로도 말이다.

그가 겪은 논란에는 꾸밈이나 여성혐오적 사진작가와의 작업 등 여성주의 의제도 있었다. 정당한 비판조차 이미 너무 많은 욕설에 시달린 그에게는 가중된 고통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간이 지나며 ‘노브라’ 같은 몸의 자유부터 낙태 금지 위헌,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지금의 한국사를 관통하는 여성주의 의제를 깊이 이해하고 지지했다. 외신이 그의 부고를 전하며 ‘당당히 목소리를 낸 페미니스트(Outspoken Feminist)’라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2019년 6월, 설리는 오랜만에 가수로 복귀했다. 그의 첫 솔로 싱글 <고블린>은 전곡을 설리가 작사한 작품으로, 그가 보컬 퍼포먼스뿐 아니라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한 유일한 음반이다. 소개 글에는 “‘나’라는 존재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적었다.

설리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가장 깊이 고민한 이는 바로 설리 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고, 그 감정을 정제해 노랫말을 썼다. 차라리 안하무인으로 모두 무시했더라면. 차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부디 이제는 편히 쉬기를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작은 네 노래들/ 회색 잿빛 하늘/ 낙원은 더 이상/ 존재 않더라도/ 깊은 물속에서/ 미래를 위한 기도/ 미래를 위한 기도(<고블린> 수록곡 ‘도로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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