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국가 범죄의 최종 완성처”
  • 정희상 기자
  • 호수 564
  • 승인 2018.07.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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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진도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은 안기부와 검찰이 고문으로 억지 간첩을 만들고 그것을 대법원이 용인해준
국가 범죄였다. 피해 가족은 2009년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다시 이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판결이 내려졌다.
전남 진도에서 양봉업을 하는 박동운씨(73)는 김명수 대법원장 앞으로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법원이 죄 없는 우리 가족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워 일차적으로 죽이고,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오자 양승태 대법원이 2차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일부러 질질 끌어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기각해 또 죽이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진도 자택으로 찾아간 취재진에게 박씨는 대법원장 외에도 지난해 여름부터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 국민권익위원장 앞으로 보낸 각기 다른 수많은 탄원서 더미를 방바닥에 펼쳐 보였다. “저와 우리 가족은 1981년 3월 그날부터 지금까지 평생 탄원서와 호소문을 써왔습니다. 이런 것을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눈시울을 훔친 박씨는 3시간에 걸쳐 파란만장한 통한의 가족사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시사IN 조남진어머니 이야기를 하던 진도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박동운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동운씨 일가에게 닥친 비극은 1981년 3월7일 새벽 5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도농협 직원이었던 박씨와 그의 어머니 이수례씨는 안기부 요원들에게 붙들려 서울 남산 안기부 지하 취조실로 끌려간다. “다섯 살짜리 큰애와 세 살배기 딸이 있고,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어요. 동이 트기 전인데 건장한 사내 3명이 찾아와 권총과 수갑을 빼들고 안기부 광주지부에서 왔으니까 잠시 광주까지 가자고 그래요. 그들을 따라 시외버스터미널로 끌려 나갔더니 좀 있다가 어머니까지 끌고 왔더라고.”

박씨와 어머니는 이날부터 63일 동안 햇볕이 들지 않는 남산 안기부 지하 취조실에서 고문을 받으며 ‘가족간첩단’으로 만들어진다. 모자가 끌려간 다음 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박씨 친인척들도 남산 안기부로 붙잡혀 왔다. 작은아버지와 고모부와 동생이 들어오고, 외숙이 들어오고 며칠 더 있다가는 작은어머니, 고모 순서로 잡혀 들어왔다.

안기부가 박씨 일가를 가족간첩단으로 몰아간 고리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박씨의 아버지 박영준씨였다. 안기부는 박영준씨가 월북했는데, 아들 동운씨가 아버지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안기부는 박씨에게 아버지 박영준씨가 남파돼 붙잡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고 조사를 다 마쳤으니 접선 과정을 사실대로 불라고 했다. 박씨는 사실이면 아버지를 대면시켜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돌아오는 것은 매타작이었다.

ⓒ한겨레간첩 조작 사건으로 17년5개월간 복역한 박동운씨(오른쪽)는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안기부가 하는 수법이 처음 들어가면 막 두들겨 팬 뒤 자술서를 쓰라는 거여. 그 자술서가 내 죄를 엮는 첫째 고리였어요. 세 살이고 다섯 살이고 그때부터 생각나는 걸 지금까지 다 적으라는 거예요. 나중에 빼먹은 거 있으면 또 때리고. 그러다 군대 제대하고 집에서 놀 때 내가 평양에 다녀온 것처럼 조작했어요.”

고문 흉터 보여주자 탁자 내리친 판사


다른 방에서 고문당하는 어머니와 다른 일가족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잘 들리도록 일부러 취조실 문을 열어놓기도 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박씨의 고모는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온몸이 피고름으로 범벅이 된 박씨와 고모부, 동생 등 일가족의 고문 상처는 37년이 흐른 지금도 몸 구석구석에 선명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63일간 남산 지하 취조실에서 만들어진 것은 만신창이가 된 박씨의 육신과 간첩 혐의를 담은 날조된 조서였다. 서울구치소로 넘어가서는 얼마 안 있어 서울지방검찰청 안강민 검사가 나타났다. 박씨는 안기부에서 받은 고문과 조작 과정을 안 검사에게 말하고 전부 조작 날조된 거라고 하소연했다. “안 검사가 안 되겠다고 소리 지르더니 안기부에서 고문 조사했던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거예요. 다짜고짜 ‘안기부로 또 갈래? 안기부 가서 한번 또 맛을 볼래?’ 하니까 내가 그만 정신 줄을 놔버린 거예요. 검찰 조서에 지문을 찍으라고 해서 힘없이 찍었죠. 그게 공소장이 된 거지요.”

박씨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면서도 재판 과정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만들어낸 안기부와 검찰 공소장에 대해 진실을 말하면 재판부는 시비를 가려주리라 믿었다. 1심은 서울중앙지법 김헌무 판사가 맡았다. “내가 순진했어요. 재판 과정에서 고문으로 날조된 거짓 혐의라고 호소하며 온몸에 남은 고문 흉터와 딱지를 보여줬지요. 김헌무 판사는 확인해보려 하지도 않고 손바닥으로 재판정 탁자를 꽝 내리치면서 ‘안기부와 검찰 조사 때 다 인정해놓고 여기 와서 뭔 헛소리야’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고문한 안기부보다 재판부가 더 밉고 절망스러운 순간이었죠.”

김헌무 판사는 1981년 11월3일 안기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증거들을 대부분 그대로 인용해 “피고인 박동운을 사형에 처한다”라고 선고했다. 사형선고 받던 날 가족 여섯 명이 법정에 나란히 섰다. 뒤이어 작은아버지(징역 10년)와 동생(징역 7년), 어머니(징역 7년), 고모부(징역 3년) 모두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고문으로 날조된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은 이후 고등법원에서 박씨는 무기징역으로, 작은아버지는 징역 7년, 어머니는 4년, 동생은 3년6개월, 고모부는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각각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어머니는 불고지죄였죠. 아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신고하지 않았다, 북에 있는 남편이 가끔씩 야밤에 진도까지 내려와 동침하고 돌아갔는데 신고하지 않았다 같은 황당한 혐의였어요. 57세에 끌려간 어머니도 고문으로 날조된 죄목으로 4년형을 확정받고 옥중에서 환갑까지 지내셨죠.”

ⓒ시사IN 조남진박씨와 그의 가족은 안기부에 끌려가던 1981년 3월부터 30여 년간 국가기관을 상대로 탄원서를 써왔다.

4년 형기를 마친 어머니 이수례씨가 출소해 고향 마을로 돌아가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참화를 면한 다른 친인척마저 혹시 후환이 생길까 염려해 멀리했다. “어머니는 사람들 손가락질을 피해 진도읍 서천리 쌍계사라는 절로 들어가 스님들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공양보살로 계셨죠. 한 20년 그렇게 보내시다 가셨어요.”

박동운씨 일가족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진실’뿐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도 무기수 박동운씨는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역대 법무부 장관, 교도소장, 대통령 앞으로 육필 탄원서를 보냈다. 때로는 감옥 안에서 단식하며 싸웠다. 누구도 박씨의 호소에 답해주지 않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박동운씨는 끌려간 뒤 17년5개월이 흐른 1998년 8·15 대통령 특사로 세상 밖으로 풀려났다. 그가 아버지와 헤어질 때 다섯 살이었고, 다시 그가 안기부에 끌려갈 때가 큰아들이 다섯 살 나던 해였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감옥에서 나오니까 자식하고 처가 ‘우리가 그동안 간첩 가족이라고 고생하고 사는데 아버지는 뭐 하다 이제 나타났느냐’고 원망합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제…. 내가 끌려간 뒤 아이들은 학교에서 ‘간첩새끼’라고 놀림을 받았더라고. 구속될 당시 집사람이 보낸 편지를 화장실 가서 혼자 울면서 봤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요. 아들은 광주에 사는데 나한테 연락을 안 해. 내가 전화해도 안 받고. 딸은 전화를 받아. 아쉬운 소리 하면 찾아오고.” 천륜마저 앗아간 잔인한 국가폭력을 회상하며 박씨는 한참을 울먹였다.

박동운씨는 고향 마을에서 10㎞ 이상 떨어진 곳에서 양봉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1998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후에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국가가 진실을 인정하고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명제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바쁜 양봉 철이 지나면 서울에 있는 인권단체를 찾았고 증거와 증인을 찾아다니고 설득했다. 좌절과 낙담을 딛고 그는 2007년 4월5일 재심을 청구했다. 송소연씨 등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가들 도움으로 조용환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 법원은 2년이 지나서야 재심을 개시했고,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11월13일 마침내 박동운씨와 일가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씨 일가족이 남산 안기부에 끌려간 지 29년 만에 이뤄낸 진실의 승리였다. 고문으로 4년형을 살고 나와 절로 들어간 박씨의 어머니는 재심에서 온 가족이 무죄판결이 난 걸 보고 이듬해인 2010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재판장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과하고 위로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이제야 진실이 드러나고 제대로 된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죠. 하지만 그때뿐이었죠. 뒤이어 양승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우리 사건은 물론 과거사 사건 피해자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간첩 조작 사건으로 큰 피해를 본 박씨 일가족 27명은 무죄가 확정된 뒤 2011년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고문과 조작을 통해 간첩 사건을 만들어낸 안기부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가 박씨에게 17억원을 포함해 일가족 27명에게 손해배상금 총 56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제동을 걸고 나섰다. 2013년 12월12일 대법원은 재심 무죄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 제기 소멸시효를 3년에서 6개월로 대폭 줄이는 판결을 내놓았다. 사실상 국가의 책임을 덜어준 것이다. 이 판결 뒤, 2014년 12월24일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박씨와 가족들이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2010년 9월10일)로부터 6개월 지나 소송을 제기(2011년 5월6일)했다’며 손해배상금을 ‘0원’이라고 판결했다. 정부는 박씨 가족에게 지급한 일부 손해배상금을 이자까지 더해 반환하라며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도 냈다. 이 소송에서 1심은 정부 손을 들어줘 박씨 가족은 또 한번 원통함과 울화병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이 사건에 대해 박씨는 헌법소원을 냈다.

박동운씨는 지금도 양승태 대법원장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만나는 사진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린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한 대법원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는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자기 입으로 뒤집었어요. 나 같은 군사정권 시절 과거사 사건 피해자의 손해배상 권리를 박탈하는 판결로 이어져 국가가 우리를 두 번 죽인 겁니다.”

“양승태 대법원이 우리를 두 번 죽였다”


박씨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잇따라 나온 이런 판결은 우연이 아니라 박근혜 정권과의 ‘재판 거래’ 결과라고 확신했다.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만든 문건에는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2015년 11월19일 생성)’가 있다. 문건에 따르면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음’이라고 밝힌 뒤, ‘과거사정리위원회 사건’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을 예시했다.

ⓒ시사IN 조남진고모(오른쪽)·고모부(왼쪽)와 함께 어머니 산소를 찾은 박씨. 4년형을 살고 나와 절에 들어간 박씨의 어머니는 재심 판결을 받은 다음 해 생을 마감했다.

박씨에게 간첩단 조작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자 “고문으로 억지 간첩을 만든 안기부보다도 법원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본다”라고 강조했다. “재심에서 무죄로 바뀌었으면 스스로 판결 잘못이 확인이 된 거 아닙니까. 조봉암 선생이나 조용수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이나,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들에서 잘못된 판결로 사형 집행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한번 돌아간 사람들을 법관들이 살려낼 수 있습니까? 잘못된 판결로 당사자는 죽기도 하고 고생도 하고 가정도 파괴되는데 이걸 누가 책임집니까?  그러고 보면 대법원은 국가 범죄의 최종 완성처입니다. 잘못된 판결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가 반드시 생겨야 해요.”

요즘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이 검찰 수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박씨는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기자가 진도 자택으로 박씨를 찾아간 6월8일, 박씨는 진도 벌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머니 산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 때 함께 고문을 당한 고모와 고모부가 동행했다. 어머니 산소는 아버지 (박영준)와 합장묘였다. 하얀 저고리, 푸른 바지, 하얀 고무신을 입은 종이로 만든 아버지 형상 옆에 어머니를 모셨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박동운씨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쓴 탄원서와 함께 몇 가지 글귀가 적힌 종이를 기자에게 넘겨주었다. 거기에는 지난해 7월 발표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가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국가 배·보상, 과거사 청산 및 사회통합 지원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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