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자행된 야만적 고문 트라우마가 대를 잇고 있다. 중앙정보부(중정)의 대표적 간첩조작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씨(89)와 그의 아들 이송우씨(51)다. 1975년 중정에 끌려갈 무렵 칸트철학을 전공한 이창복씨는 일본 도쿄 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앞둔 서울대 강사였다. 당시 유신 반대 학생시위에 몇 번 참여한 이씨의 행위는 남산 중정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과 허위자백을 거치며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간첩’으로 창조됐다. 이씨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세월, 아들 송우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 간 것으로 알았다. 이씨는 1982년 특사로 풀려난 뒤 12년 동안 보안관찰 대상으로 정보경찰이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는 감시를 받았다. 인혁당 사건이 간첩조작으로 결론이 나 명예가 회복된 것은 34년이 지나서였다. 2008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이어진 민사소송에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유신의 망령은 전혀 예기치 않은 데서 이 가족을 다시 덮쳤다. 고통은 유신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무렵 벌어진 사법농단과 궤를 같이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며 절반 이상을 연 20% 이자를 붙여 다시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빚은 애초 받은 배상금보다 많아졌다. 거액 채무자로 전락한 인혁당 피해 가족들은 사는 집에서 쫓겨나 부동산 가압류와 강제경매 등 ‘빚 고문’에 내몰렸다.
간첩 누명을 쓰고 무기수로 살던 아버지 이창복의 나이가 된 이송우는 시인이 됐다. 대를 잇는 유신의 망령에 몸부림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나는 노란꽃을 모릅니다〉라는 시집을 낸 그는 이 시집에 열여섯 편의 ‘유신의 기억’이라는 시를 담았다. “1982년 3월1일/ 특사로 풀려난 나의 아버지 이창복/ 안방 한가운데/ 연탄불을 피워놓고 이부자리에 눕자던/ 그해 겨울밤/ 추운 몸 새우등처럼 말았지만/ 불 앞에서 잠들고 싶지 않아서/ 메마른 등짝을 소리 없이 들썩였다/ 그날의 울음 잊지 않으려고/ 그날의 아버지보다 더 늙은 소년은/ 일기를 쓴다/ 늦은 밤 소리 없이.”
이송우씨는 배상금 반환을 강제하는 실체를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피고 대한민국’이 국정원이라는 걸 알아챈 때는 지난해 11월 재판에서였다. 국정원이 재판 무기 연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인혁당 피해자 등의 국가배상금 환수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의원들의 질의에 당시 박지원 후보자는 “정의롭게 해결해나가겠다”라고 답했다. 그 결과 국정원이 취한 조처는 경매에 넘긴 피해자들 재산에 대해 잠시 경매를 보류하고 재판을 무기 연기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이창복씨는 “국정원은 잔인하다는 여론을 의식해 아마도 내가 죽으면 강제집행하려고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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