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와 살은 묻혀 있지만 진실만은 부패할 수 없습니다. 진실을 향한 우리의 열망에 한국 시민사회가 연대해주십시오.” 196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사독재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 피해자 베드조 운퉁 씨(67)가 한국을 찾아 이렇게 호소했다. 서울 남산에 위치한 옛 안기부 청사에서 열린 ‘진실의 힘 인권상’ 시상식 자리에서다.

국내 고문 피해자들이 만든 인권단체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올해 제7회 인권상 수상자로 인도네시아인 베드조 운퉁 씨와 그가 대표로 있는 인권단체 ‘YPKP65’를 선정했다. YPKP65는 1965년부터 2년 동안 당시 수하르토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1999년 피해자들이 만든 인권단체다.

ⓒ진실의 힘 제공

박정희 군사정권이 주도한 한·일 회담과 베트남전 참전 등으로 한창 어수선하던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 정권과 군부가 공산주의 쿠데타 세력 소탕을 명목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그해 9월30일 인도네시아 군 장성 7명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하르토 정권과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했다. 공산당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영장 없이 무차별 체포해 학살했다. 자바 섬의 강물과 저수지는 피로 물들었고, 발리 섬 바닷가 모래사장에서도 수많은 주민들이 군부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렇게 학살된 시신은 암매장되거나 들과 산에 유기되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살해된 사람의 숫자로 치면 이 살육은 20세기 최대의 대량학살 가운데 하나다”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집단학살이 벌어진 지 50여 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하르토와 가해 군부 세력이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면서 사건을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이다. 베드조 운퉁 대표에 따르면 당시 군부에 학살당한 이들이 50만~300만명인 것으로 추산할 뿐이라고 한다.

1965년 당시 고교생이었던 베드조 운퉁 씨는 교원노조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체포되자 숨어 지내다 1970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군인들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이후 9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정규교육 기회를 잃고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면서도 그는 독학으로 영어를 익혔다. 1979년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풀려난 그는 감옥에서 독학한 영어 실력으로 학살의 진상을 외부 세계에 알렸다. YPKP65라는 피해자 단체를 만들어 집단 암매장 장소도 찾아내고, 학살·강간·고문 등에 대한 증언을 수집해 기록해왔다.

시상식에 참석한 베드조 운퉁 대표는 “한국 진실의 힘은 제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었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우정과 연대의 상징으로 이 상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도 진실을 파헤쳐 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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