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그날, 망루에는 사람이 있었다 [포토IN] 이명익 기자 “사실 예전에는 용산 참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사들은 되풀이되고,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어요. 15년 전 일이지만 그냥 계속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잊으면 안 되겠다 싶었고, 그때 몰랐던 걸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아들과 같이 왔어요.”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1월20일 오후, 아들 김재윤 군(12)의 손을 꼭 잡은 신민정씨(45)는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들어선 43층 건물을 일행들이 한 번씩 올려다본 뒤 첫 에세이집 〈일기〉 들고 온 소설가 황정은 임지영 기자 하루는 피자를 주문했다. 많아야 스무 살로 보이는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다가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쏠려 피자도 몰렸는데 확인해보라고 했다. 상태가 안 좋으면 다시 사오겠다고. 말하는 이의 위축된 표정과 태도를 보며 대체 어떤 일을 겪으며 배달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찌그러지면 피자 맛이 아닌가?” 황정은 작가가 얼마 전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많이 생각하는 게 소설이 된다는 그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건 청소년 노동이다.마음이 가는 일에 대해 말할 때, 황정은 작가는 화난 것처럼 보였다. 여수에서 현장실습 중 사망한 고등학생 한 죽음이 묻는다 ‘용산참사는 끝났는가’ 장일호 기자 1년은 11개월이었다. 달력 속 1월을 애써 외면했다. 잊으려고 애쓸수록 또렷했다. 꾸역꾸역 눌러둔 기억은 매년 1월이 돌아오면 기어코 비집고 나와 삶을 흩어놓곤 했다. 몸살처럼 새해를 앓고 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쌓였다. 배달로 생계를 잇는 동안 높은 건물에 들어설 때면 겁이 덜컥 났다.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몸을 휘감았다. 병원 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좀체 말을 듣지 않는 몸으로는 일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생계와 일상 사이 시간은 자주 토막 났다. 그런 그늘을 내색하지 않는 이였다. 드물게 모... 약자 옆에 섰던 노회찬 시사IN 편집국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 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2012년 7월21일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연설 중에서 9년을 기다린 용산참사 진상조사 정희상 기자 2009년 1월20일 전재숙씨가 다급히 찾아간 용산 남일당 건물은 지옥이었다. 남편 이상림씨는 다른 철거민 5명과 함께 시신으로 돌아왔다(당시 경찰 특공대원 1명도 사망했다). 망루에서 뛰어내리다 크게 다친 아들 이충연씨는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법원은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 25명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당시 과잉 진압 의혹이 불거졌던 경찰은 전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최근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팀’ 구성을 마친 경찰청은 용산 참사를 비롯해 백남기 농민 사망, 평택 쌍용차 파업을 우선 조사하기로 했다. 지난... 영리한 뮤지션과 불안정한 록 마니아 은유 (작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였다. 내게 용산역은 ‘용산참사역’이고 불에 탄 남일당 건물에 유가족이 사는 그 일대는 망자들이 떠도는 슬픈 무덤이다.그와 밴드 멤버들이 날렵한 검은 정장을 맞춰 입고 무대에 올랐다. 속으로 기뻤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5개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지 한 달 됐으니 저건 애도의 복장일지도 모른다고 내 뜻대로 해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틀스’ 코스프레였다. 몸은 공연장에 있고 마음은 남일당으로 기우는데,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 오색찬란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펑! 펑! 저항과 굴복 사이 발톱 숨긴 민중미술 고재열 기자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민중미술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1980년대 민중미술 작품부터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의 사회참여 작품들이 걸렸다. 이번 전시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단색화(모노크롬)와 민중미술의 ‘리턴매치’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흔히 예술은 순수예술과 참여예술로 구분된다. 외부와의 단절을 통해 순수성을 추구 그 참사 후 6년, 여기 ‘레아’가 있다 전혜원 기자 ‘대지의 여신’이 돌아왔다. 용산참사 6주기를 한 달여 앞둔 12월10일, 수년 전 ‘재개발’ 명목으로 헐렸던 ‘레아’(Rhea·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문을 열었다. 2009년 그날 아버지 이상림씨(당시 71세)를 잃은 이충연(41·오른쪽) 용산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장이 주방을, 아내 정영신(42)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나와 당신의 ‘운수 좋은 날’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2009년 1월1일 새벽.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 프루트베일 역(Fruitvale Station)이 소란스러워졌다. 백인 경찰들이 한 무리의 흑인 청년들을 지하철에서 끌어내려다 그리되었다. 다른 승객들과 시비가 붙어 경찰이 출동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흑인들만 끌려나왔다. 수많은 시민이 휴대전화로 촬영하는데도 경찰은 거칠게 청년들을 몰아세웠다.탕! 별안간 총 여기 사람이 있던 자리에… 없다 조남진 기자 5년이 지났지만 황량한 벌판은 그대로다. 바벨탑이라도 쌓을 듯 경찰 수백명과 용역 깡패를 동원해 여섯 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지만, ‘남일당’ 건물 터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 되어 4년 동안이나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속에서 지난 5년을 보내야만 했다.용산참사 당시 ‘무전기 고마 살던 대로 살모 안 되것나 시사IN 편집국 우리 시대의 민중 비나리김선우 외 지음, 삶창 펴냄거기 시인이 있었다. 밀양 고압 송전탑의 노인들 옆에,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터 옆에,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빈소에, 용산 남일당의 잿더미 위에 시인이 있었다. 시대를 탄식한 그들의 시가 한 권의 시선집으로 묶였다. “아끼 쓰고 쪼매만 고쳐 쓰면 안 되것나/ 핵발전소고 나발이고 고마 살던 대로 살모 ‘김석기 사장 퇴진’ 농성 나선 용산 참사 유가족들 송지혜 기자 10월17일, 한국공항공사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인천공항공사 앞. 이 자리에는 용산 참사 유가족 유영숙(53) 전재숙(72) 권명숙(51) 김영덕씨(57·사진 왼쪽부터)가 ‘용산학살 김석기, 공항공사 사장 취임 어림없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김석기 사장 퇴진을 위한 11일째 농성이다.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진두지휘한 2009년 1월의 용 ‘석기 시대’에나 있을 법한… 조남진 기자 “감옥에나 있어야 할 사람이 사장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찬바람이 불던 10월11일 오전. 서울 강서구 한국공항공사 입구에서 농성 중이던 ‘용산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탄식하며 외쳤다. 유능한 항공 전문가 2명을 제치고 한국공항공사 제10대 사장에 임명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3명의 후보 가운데 최하위 점수를 받고도 ‘낙점’의 옛 영광은 유산으로 남아 김은남 기자 ‘칠 제곱킬로미터.’ 강경 면적을 듣고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명색이 읍인데 17㎢도 아니고 7㎢라니…. 실제로 강경은 작다. 쉬지 않고 걸으면 남북 또는 동서로 읍내를 가로지르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작은 동네가 한때 원산과 더불어 ‘조선 2대 포구’로 꼽혔고, 평양·대구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다른 곳과 비교하면 강경의 변모는 더 극적이다. 시장 기능은 축소됐으되, 평양과 대구는 대도시로 살아남았다. 원산도 마찬가지다. 반면 강경은 국내 읍 단위 행정구역 중에서도 집행유예 5년을 ‘기념’하며… 이명익 기자 “집행유예 5년 받았다고 기념촬영 하는 건 처음 보네.” 취재기자 한 명 안 온 상황에서 그들만의 소감 발표를 지켜보던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씨가 농반진반 한마디를 던지자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온다.9월1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고등법원.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 당시 남일당 건물의 망루와 옥상에서 추락했던 김영근(54·가운데 목발 짚은 이), “우리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 허은선 기자 5월8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우체국 앞. 20명 남짓한 시민이 길 건너편 캄보디아 대사관을 향해 “우리는 존엄하다. 강제 퇴거 중단하라”라고 외쳤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청으로 캄보디아에서 방한한 보브 소피 씨와 섹 소쿤로드 씨도 어색한 한국어로 구호를 따라 외쳤다. 보브 소피 씨는 “욤 보파(상자 기사 참조)의 석방을 위해 한국 사회도 연대해 “어머니, 돌아왔어요” 이명익 기자 4년 전 서울 용산 남일당 망루에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이충연씨는 단 하루도 그날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켜준 아버지 이상림씨를 놔두고 망루에서 뛰어내렸다는 죄책감은 그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더 강해져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더욱 담금질했다.살아남아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은 감옥 안 충 딸 위해 그린 만화, 지옥을 견디게 하다 차형석 기자 2009년 1월20일. 그 일이 없었다면, 김재호씨(57)는 지금도 용산에서 금은방을 하고 있었을 거다. 1984년부터 터를 잡고 시계를 수리하고, 세공 일을 했다. 남일당 건물 맞은편에 있던 금은방 ‘진보당’에서. 2007년 용산 도시정비 사업으로 가게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망루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그 참사가 벌어졌다. 늦둥이 딸 혜연이를 끔 왜 그리 서둘렀나요, 이렇게 둘 거면서… 이명익 기자 “왜 그리 진압을 서둘렀나요, 이렇게 폐허로 남겨둘 거면서….” 용산 참사 4주기를 맞은 유가족 전재숙씨는 1월17일 저녁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은 남일당 건물 터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2009년 1월20일 강제철거에 반대해 서울 용산 남일당 망루에서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을 경찰이 강제 진압해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지는 일이 벌어지고 “〈두 개의 문〉, 보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송지혜 기자 용산참사 재판이 재개됐다. 7월10일 오전 10시40분, 지 아무개씨(42)와 김 아무개씨(53)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505호 법정에 섰다. 2011년 2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이후 1년5개월 만이다. 이날 재판은 새삼 관심을 끌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이 개봉한 지 19일 만에 관객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