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하루는 피자를 주문했다. 많아야 스무 살로 보이는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다가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쏠려 피자도 몰렸는데 확인해보라고 했다. 상태가 안 좋으면 다시 사오겠다고. 말하는 이의 위축된 표정과 태도를 보며 대체 어떤 일을 겪으며 배달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찌그러지면 피자 맛이 아닌가?” 황정은 작가가 얼마 전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많이 생각하는 게 소설이 된다는 그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건 청소년 노동이다.

마음이 가는 일에 대해 말할 때, 황정은 작가는 화난 것처럼 보였다. 여수에서 현장실습 중 사망한 고등학생의 이름을 발음한 뒤엔 ‘너무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자신이 목격한 무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혼잣말로 비속어를 쓰기도 했는데 더없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며칠 전엔 팟캐스트 공개방송에서 육두문자를 날리고 ‘인생 망했구나’ 생각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디디의 우산〉 속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욕이 조금 늘었는데 여전히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합니다.’ 욕보다는 사랑과 사람에 기운 말이다. 지난 2년, 작가의 동선은 선보다 점에 가까웠다. 외출을 삼가고 주소지에 점으로 머물던 팬데믹 시기에도 사람들에게 ‘남이 고통을 겪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그가 최근 ‘점’의 동선에서 벗어났다. 팟캐스트 ‘책읽아웃-황정은의 야심한 책’ 진행자로 나섰고 첫 에세이집 〈일기 日記〉를 출간했다. 방송과 에세이라니, 황정은 소설의 독자들에겐 ‘사건’이다. 17년 차 작가 황정은은 2005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소설집 세 권과 장편소설 세 권, 연작소설 두 권을 냈다. 등단 당시 심사위원으로부터 ‘이미 작가’라는 말을 들었고,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에게 ‘세 살 적부터 글쓰기에 눈떴다는 신진 작가’로 통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그의 첫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고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출판사에 직접 연락한 뒤 해설을 썼다.

신동엽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5·18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비롯해 10여 개 문학상을 받았고 제59회 현대문학상은 반납했다. 한때는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모자로 변한 아버지, 오뚝이가 되어가는 은행원이 등장하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를 낸 후 자주 들었던 ‘환상성’이 대표적이다. “침묵에 가까운 조용한 문장으로 독자를 압도(이효석 문학상 심사평)”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아홉 권의 책이 나온 지금,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책날개의 작가 소개도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작가가 최근 주력하는 건 근력운동이다. (바벨 따위를) 65㎏ 이상 드는 게 목표라고 한다. 원고 앞에서 버티기 위해 네 가지 근육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근황이 이번 에세이집에도 나온다. 파주로 이사한 뒤의 일상, 매년 4월의 목포행, 추천사를 거절하는 이유, 엄격한 책갈피 선택 기준 등 읽고 쓰는 삶의 단면이 담겼다. 10월19일 〈시사IN〉 편집국에서 그를 만났다. 머리 색깔이 밝은 작가가 회색 SUV에서 점프하듯 내렸다. 어쩐지 아이돌의 출근길 풍경 같다고 하니 소리 내 웃었다.

서울 여의도 YES24에서 〈책읽아웃〉이라는 팟캐스트를 녹음 중인 황정은 작가. ⓒ시사IN 조남진

복직근·복횡근·기립근·둔근 같은 근육에 기대 원고 앞에서 버틴다고 했는데.

최근엔 50㎏ 넘는 고중량 중심으로 운동한다. 광배근 만드는 재미가 있다.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큰 근육인데 자극하는 운동을 하고 나면 시원하다.

소설 쓸 때 중요한 건 근력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데, 예전엔 세계관이라고 했다.

어떤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세계관은 완성되거나 고정되는 게 아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이 세계관일 텐데, 내가 무엇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방치한다고 갖춰지는 게 아니라 근력처럼 훈련되고 단련되는 것 같다. 산문은 장시간 읽고 쓰는 일이다. 어떤 태도를 갖추려면 오래 앉아 읽고 써야 한다. 그러려면 근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근력을 갖출 수 없는 신체도 있으니까 최고로 치는 건 아니지만 둘 다 중요하다.

책을 출간할 때 ‘작가의 말’을 안 쓰기도 했는데 에세이집이라니 의외다.

나 역시 에세이를 쓰게 될 거라고 상상을 못했다. 제안은 전부터 있었는데 엄두가 안 났다. 모든 종류의 에세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에세이는 문장을 썼을 때 그것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게 내게는 많이 두려운 일이었고 그동안 삼갔다. 이번엔 적절한 순간에 청탁이 왔다. 쓰는 게 너무 두려워서 ‘내가 문장을 쓰지 못하겠구나’ 생각한 순간이 왔고, 지금 이 상태에서 (글쓰기가) 중단되면 두려움 때문에 중단한 셈이라 그러기 싫어 일단 뭐라도 쓰자고 생각했다.

경의선 철길이 보이는 창밖을 보며 지내던 팬데믹 시기에 대한 단상이 에세이집 초반에 나온다. 각종 혐오와 불신의 풍경을 목격하는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와 희망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바로 세계관인가?

그런 것 같다. 정말 믿어 의심치 않는 믿음이 있는 건 아니다. 꾸준히 묻고, 애쓰고 있다. 다행인 건 나만 애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자가 좋은 것들에서 눈 돌리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선의, 희망 이런 건 사는 동안 길게 지속되지 않고 너무 짧다. 어쩌다 그런 게 찾아와도 구별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거라는 사실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겪는 혐오와 불신은 개인의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서 혼자 애쓴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조를 잘 보고 내 언어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오랜만에 책 팟캐스트 진행을 맡았다.

‘라디오 책다방’(창비 팟캐스트)을 끝낸 지 6년 지났는데 예전의 어려움과 지난함을 망각한 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웃음). 당시엔 후련하기도 했는데 아쉬움이 많았나 보다. 방송에 나왔던 게스트의 책을 다시 읽는데 새로 궁금한 게 생기기도 했다. 질문할 기회를 놓쳐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쓴 문장을 많이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작업할 때 ‘자르다’라는 제목의 파일을 하나 더 펼쳐놓는다. 잘라낸 걸 거기에 옮긴다. 80~90%를 버린다. 정말 무식한 작업 방법인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쓰는 게 좋다. 문장 쓰는 방식이 그렇다 보니 17년간 소설을 쓰며 ‘아 소설은 이렇게 쓰면 되는구나’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렇게 쓰면 안 되는구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자른 문장을 다시 쓰진 않는다. 나의 파멸과 함께 소멸될 거다(웃음).

6년 전 문학계 표절 사건 당시 관련 출판사의 대응에 문제 제기한 일이 인상적이었다. 현대문학상을 반납하고(상을 주관하는 출판사가 정치적 언급을 이유로 다른 작가의 소설 게재를 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이상문학상 사태에도 입을 열었다. 발언에 부지런한데.

작가의 이름은 가급적 안 나가면 좋겠다. 당시엔 할 수 있는 이야기라 했지만 가뜩이나 공격받고 있는데 얹은 꼴이라 후회했다. 부지런한 건 아니고 현대문학상의 경우 뒤늦게 상황을 접해서 직접 연락해 알아보고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반납했다. 받아서 기뻐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이상문학상 때는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에 대한 부채감이 컸다.

소설을 쓸 때 사회적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작품 활동 시기와 용산 참사, 세월호 사건이 겹친다.

용산 참사 전까지는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백지를 채우고, 그걸 누군가가 읽고, 가끔은 누군가 피드백하는 그 자체가 너무 경이로웠다. 소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발표 기회가 주어졌고 재미있게 했다. 그러면서도 내 기본 태도는 세상에 대한 낙담이었다. 단념의 태도랄까. 세상이 빤하고 도처에 폭력이 있는 것 같고 굳이 그 폭력을 내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떠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그걸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용산 참사 때 남일당에서 유가족 인터뷰를 하고 재판정에 가서 취재도 하고 작가들이 모여 시위도 했다. 시민의 무관심을 많이 목격했다. 현장에서 유가족이 남은 유품이 이것밖에 없다며 장갑과 라이터를 보여주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들 앞에서 ‘세상 빤하다’는 태도가 가능하지 않았다. 갖고 있던 세계가 조각조각 나 부서져 내리는 걸 경험했다. 세월호 가족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들고 있던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었다.

작품으로는 〈百의 그림자〉가 기점이었나?

그때부터인 것 같다. 1인 시위를 다니면서 썼으니까. 낮에 원고 쓰고 저녁에 남일당에 갔다.

광화문 ‘세월호’ 기억공간(아래)이 철거될 때, 황정은 작가는 피케팅을 하러 나갔다. ⓒ시사IN 조남진

2010년 허리 디스크를 겪은 뒤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용산 참사 재판이 열리는 재판정의 딱딱한 의자도 한몫했다고 했다. 왜 계속 갔나?

산문 청탁을 받았다. 쓰려면 재판에서 나오는 얘기를 다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위든 재판이든 있다고 하면 그냥 부스스 일어나서 갔다. 왜 그랬냐면… 이번 세월호 7주기 추모집회도 코로나 상황에서 어렵게 진행됐다. 날씨가 좀 추웠나. 한파 속에서도 유가족들이 희망을 걸었을 텐데…. 광화문 기억공간이 철거될 때도 피케팅을 하러 나갔다. 반갑게 인사하는 분도 있지만 쌍욕을 하며 지나가는 인간들도 있다. 이 자리에 관심을 가지고 동의하는 마음이 있다고, 머릿수 늘리려, 마음 하나 보태려고 가는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의 명(命)은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구조되는 것이라고 하며 구의역 김 군, 김용균씨 등을 호명한다.

죽음이 자연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들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조건 자체가 자연화되었고 그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는 계층이 있다. 창작자라면 장르 불문하고 죽음의 영향을 받는다. 구조적 죽음은 매번 너무 마음이 상하고, 충격이다. 여수에서 사망한 현장실습생 홍정운 학생의 경우 너무너무 화가 나서…. 이런 죽음을 볼 때마다 예전에 봤던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 영상이 생각난다. 새들이 외벽에 부딪쳐 많이 죽는데 세상에 회자가 안 된다. 조류학자 말로는 그 이유가 유리창이 깨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지 않아 새들만 고요히 죽는다고. 그 얘기가 요즘 자꾸 생각난다. 한국 사회가 저출생을 걱정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황정은 작가의 작품에 세운상가(왼쪽)가 몇 차례 등장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거기서 오래 일했고, 작가 본인이 일한 적도 있다. ⓒ시사IN 자료

작품에 세운상가가 몇 차례 등장한다. 아버지가 (오디오 수리공으로) 거기서 오래 일했고 본인이 일한 적도 있다. 작가에겐 어떤 공간인가?

애증한다. 〈百의 그림자〉에도 등장하는데 어린 시절 경험한 장소이고 용산 참사와 비슷한 조건을 겪은 사회적 공간이라서다. 어릴 때는 싫었다. 아버지가 일을 다니는데 열악하고 공기도 안 좋아 걱정이 많았다. 동거인도 20여 년 거기서 일을 했는데 오래 일한 분들의 노동, 인권에 대한 관점 때문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었다. 희한한 게 자신의 노동에 대해 평가절하 당해온 분들이기도 한데 비슷한 직종의 사람을 비하한다.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비천하고 하찮아지는 경험을 계속 하고 그걸 목격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다치기도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생활했지만 거기서 돈 버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두 소설집은 연작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디디의 우산〉은 세월호 참사와 촛불집회를 배경으로 한다. 혁명과, 혁명 뒤에 놓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 중 현실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고 가급적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황정은 작가는 행사 요청이 오면 대부분 받아들였다. 지난해 출간된 〈연년세세〉는 순자와 그의 딸 한영진, 한세진 그리고 하미영으로 이어지는 얘기다. 수록된 ‘무명’은 실존인물인 1946년생 순자씨의 피란 이야기를 듣고 썼다. 소설가들이 꼽은 ‘올해의 소설’에 2년 연속 두 책이 순서대로 꼽혔다. 이번 산문집에서 황정은 작가는 〈연년세세〉가 마지막 책이 될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말한다.

〈디디의 우산〉은 성소수자, 비혼 여성, 장애인, 아동 등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온 입장들’을 다루고 있다. 독자의 반응도 가장 뜨거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 책을 내고 독자와 만날 때 보통은 질문을 받으면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데 이 책은 질문하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이런 질문이 가능한가. 이 사람은 왜 그걸 모를까. 이 사람도 그것을 아는구나.’ 이렇게 질문과 별개로 그 사람을 골똘히 보게 되는 거다. 예컨대 반영된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뻔하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뻔하다는 말이 가능한 삶은 어떤 삶일까 부럽기도 하면서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정치적이란 말을 자주 듣나?

〈디디의 우산〉으로 많이 들었다. 세월호와 촛불집회 이야기라니 이거 ‘빨갱이X’이 쓴 소설인가 이런 얘기도 봤다. 정치적이라 불편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었다. 정치가 모든 일의 해결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참사로 궁지에 몰린 개인의 처지에선 정치가 대단히 영향을 미친다.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건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그런 태도가 대단히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걸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다.

더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연년세세〉를 쓴 뒤였다. 쓰는 동안에는 그렇게까지 낙담 상태에 이를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사랑을 다분히 상실한 상태였다. 타인의 이야기가 재료가 된 부분이 있는데 실존하는 사람의 삶을 계속 상상하며 써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오는 트라우마가 있었고 깊이 이입하면서 힘겨움을 겪었다. 타인의 삶을 상상한다는 것의 두려움을 이번에 많이 배웠다.

소설에 대한 리뷰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응원을 많이 받아온 작가라고 생각한다. 고마운 리뷰 덕분에 힘든 이야기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고 17년 동안 소설을 써왔다. 내용은 잊었다. 좋은 건 먹고 마셔서 내 몸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웃음). 책이 나오면 예전에 고마운 리뷰를 남긴 분들이 또 남겨주셔서 그건 알아본다. ‘고맙습니다’를 세 번 외친다. 아픈 얘기는 정말 아프고 상처가 된다. 따끔한 충고가 되길 바란다며 남기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창작자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소설이든 뭐든 원고를 완성하면 동거인에게 처음 보여주는데 그 반응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못 보는 걸 잘 본다. 조금 고쳐도 매번 다시 읽어주어서 고맙고 미안하다.

지난 인터뷰를 찾아봐도 대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좀 망가져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아픈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수업은 일주일 정도 나가고 학교는 1년 다녔다. 동아리방에 장구를 치려고 나갔다. 당연히 학사경고가 나왔고 조교가 그걸 알려주려는데 나와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찾으러 다녔다. 사실 1년 이상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학업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에 안 들어갔다.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라는 말이 해로운 말이라고 했다. 등단 당시 수상 소감에서 ‘나의 가난한 부모’라고 지칭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연민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기’라고 하면 피해갈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제목을 그렇게 달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말 걸듯이 썼다. 기왕에 말 거는 거라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한 문장이든 두 문장이든 하고 싶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욕심은 아니었고 이미 세상에 있는 말들이기도 하다. 머릿수 보태듯 늘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의 애정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으니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분명히 누군가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생각했고.

성장기 동생들이 겪은 시간에 책임을 느낀다는 말과 이어진다. 본인도 어렸는데?

부모님이 고통이 많은 분들이고 본인 삶에 너무 집중해 자식을 잘 살피지 않았다. 우리 자매는 서바이벌 하듯이 살았다. 난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하니까. 압도적으로 부모 사랑을 원하는 상태다 보니 동생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랐다. 뭘 먹고, 입고, 보며 자라고 있는지 전혀 신경을 못 썼다. 그게 후회된다. 동생들의 방치된 유년 시절에 책임을 느낀다. 소설을 쓸 때 그 영향을 받는다. 자책감, 부채감 이런 감정이 반영되는 편이다. 지금은 인생의 동반자로 지내고 있다. 싸웠다가도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서로밖에 없다는 걸 알아서. 내가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겨주고 (작가라는 사실을) 나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황정은 작가가 쓴 작품들. 황정은 작가는 그동안 10여 개 문학상을 받았다. ⓒ시사IN 윤무영

창작물이든 현실이든 어린이가 곤란을 겪거나 학대당하는 걸 견디기 어렵다고 했는데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나?

현실에서 매 맞는 어린이가 있고 재연을 안 한다고 폭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소설 작업과는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그렇지만 쓸 때 조심하고 경계할 것 같다. 묘사하는 이유가 뭘까 묻는 방식으로. 조카들을 보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폭넓게 고민하게 된다. 어린이가 자라서 감당하게 되는 사회에 대해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걱정이 많다.

자신이 겪은 친족 성폭력에 대해 썼다.

〈헝거〉에 대한 리뷰 글을 청탁받았다. 거절할 생각이었다. 마침 책이 집에 있었고 또 마침 무척 좋아하는 지질이었다. 무슨 책인지나 보자 하고 후루룩 넘기는 데 딱 그 문장이 나왔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문장을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리뷰를 쓰려면 내 이야기가 안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거절하려고 한 건데, 나만 알고 생각하는 것과 리뷰 형식을 통해 짤막하게나마 그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인지 생각했다. 후자 쪽이더라. 아니 사실은 전자였던 것 같다. 안 쓰고 싶었는데 쓰고 싶었다. 침묵하는 건 내게도,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어딘가 도움이 되고자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는 경험을 안에만 담아둔 채 침묵하는 게 내게도, 혹시 유사한 경험이 있는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의 동의를 구했다고 했는데.

내 경험이지만 책으로 냈을 때 누군가 읽고 편견을 가진 채 이 친구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 걱정했다. 다행히 전혀 상관없다고 얘기해줬다. 그 부분을 책으로 묶을지 말지 많이 망설였다. 생각보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나 보다. 궁금했다. ‘꾸준히 내 책을 읽어온 독자가 첫 에세이라 반갑게 책을 읽다가 그 원고를 읽고, 읽고 싶지 않은 경험이 생기면 어쩌지. 타인의 상처와 접촉하고 싶지 않은 분도 있을 텐데….’ 소설에 대한 리뷰와 달리 에세이에 비판 글이 달리니 마치 내 경험과 기억, 용기에 대한 비난으로 여겨져 한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이게 바로 에세이를 쓴다는 것의 위험이로구나. 한편으로는 오만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한 여성들이 여태 그런 공격을 받은 것 아닌가. 왜 난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문학을 주어가 아니라 목적으로 두고 살아왔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문학이 주어가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계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도 그래서 발생한다. 문학에 가까워지려고 지난 세월 부단히 노력했고 다행스럽게도 늘 좋아했다. 중간 중간 환멸도 느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게 내게는 항상 최선이었다. 지나간 일만은 아니라, 지금 괜찮다가도 오늘밤 생각하면 여전히 고개를 넘는 중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어릴 때 누군가 내게 산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나중에 그게 그림 그린 사람의 인생 굴곡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첩첩산중을 그려놔 비웃음을 샀다(웃음). 고개를 여전히 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은?

내 경우 많이 생각하는 게 소설이 되는데, 그동안은 세고 압도적인 이야기를 받아 적는 데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나의 쾌를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오랫동안 쓰고 싶었는데 미뤄놨던,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건강하시길.’ 오랫동안 인사말로 써온 말이다.

책에 사인을 할 때 항상 적었다. 마음을 담았고 늘 진심이었다. 건강하지 않은 몸의 가능성을 배제한, 만인에게 공평한 인사가 아니라 다른 걸 찾았다. 평안을 바라는 마음이 여기 하나 있다는 의미로. 평안하시기를.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