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제곱킬로미터.’ 강경 면적을 듣고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명색이 읍인데 17㎢도 아니고 7㎢라니…. 실제로 강경은 작다. 쉬지 않고 걸으면 남북 또는 동서로 읍내를 가로지르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작은 동네가 한때 원산과 더불어 ‘조선 2대 포구’로 꼽혔고, 평양·대구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다른 곳과 비교하면 강경의 변모는 더 극적이다. 시장 기능은 축소됐으되, 평양과 대구는 대도시로 살아남았다. 원산도 마찬가지다. 반면 강경은 국내 읍 단위 행정구역 중에서도 거의 최소 규모로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한때 3만명이었던 인구가 지금은 1만명을 간신히 웃돈다. 아직까지는 법원·검찰·경찰 등이 강경읍에 있다지만 이를 인근 논산시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때만 되면 등장한다. 그때마다 논산시청에 몰려가 결사반대를 외쳐야 하는 것이 ‘한때 논산을 먹여 살렸던’ 강경 사람들의 현 주소다.
 

ⓒ시사IN 김은남 강경삼거리


강경이 번창하던 시절, 이곳 황산포구를 드나드는 배는 하루 평균 100척이 넘었다고 한다. 장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0만 인파가 북적이곤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집만 60여 곳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도 그럴것이 강경은 호남·충청 등 서해 일대에서 나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집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중국 배도 드나들었다. 이곳 일대 강폭이 400m에 달해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로가 발달하면서 강경의 영화는 서서히 빛이 바랬다. 다른 포구가 그랬듯 강경 또한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포구로서의 정체성마저 사라졌다. 군산~장항을 잇는 금강하구둑이 완공되면서 바다로 통하는 물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경이 매력적인 것은 이런 극적인 부침의 역사가 읍내 곳곳에 고스란히 간직돼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문화유적을 알리는 거리 표지판 하나 찾아보기 어렵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강경은 두세 시간 걷다 보면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볼 수 있는 소읍이다. 그런데 그 작은 동네에 촘촘히 문화유산이 박혀 있다(덕분에 실제로는 강경을 돌아보는 데 한나절 이상이 걸린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530여 개운데 논산에 있는 것이 8개인데 그중 7개가 강경에 몰려 있다. 현재는 6개를 새로 신청한 상태다. 그런 만큼 읍내를 걷다 이들 문화재를 발견하는 기쁨이 쏠쏠하다. 

 

 

ⓒ시사IN 김은남 연수당한약방


건물도 거리도 옛 모습 그대로

그뿐 아니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지역 경제가 급속히 허물어진 때문일까. 강경에는 손대지 않은 채 방치한 옛 건물이 수두룩하다. 연구자들이 근대 건축물의 보고라며 열광하는 이유다. 비록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을지라도 그 자체로 볼거리다. 거리도, 골목도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읍 전체가 근대기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인 양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그래도 계통을 밟아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젓갈타운 인근에 있는 강경역사관에서 출발할 것을 권한다. 강경역사관이 들어선 건물은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있던 곳인데, 건물 자체가 등록문화재(제324호)이기도 하다. 1905년 설립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쓰였다. 강경역사관은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난해 9월 개관했다. 강경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유물이 다량 전시돼 있어 강경의 어제와 오늘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정현수 관장은 소개했다. 지역 주민들이 전시하라고 기증했다는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도 정겹다. 2층 사무실에서 강경 지도와 간단한 안내책자도 챙길 수 있다(월요일은 휴관).

강경역사관에서 나와 동남쪽 중앙리·서창리 방면으로 향하면 오래된 건물과 문화재를 무더기로 만날 수 있다. 단, 그 전에 역사관 지척에 있는 강경협동조합 건물부터 들러보자(등록문화재 제323호). 1920년대에는 포구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로 이뤄진 노동조합의 규모와 세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5년 지어진 노조 건물은 그런 의미에서 강경 상권의 흥망성쇠를 엿보게 하는 상징적 건물이다. 

 

 

 

 

 

ⓒ시사IN 김은남 강경역사관

 


근대문화유적이 밀집돼 있는 동남부에서는 옛 연수당한약방(등록문화재 제10호)이 그중 랜드마크 구실을 한다. 강경역사관을 들른 이라면 1920년대 북적거리던 강경시장을 촬영한 사진을 기억하게 될 텐데, 사진에 찍힌 건물 중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한약방 건물이다(당시는 남일당한약방이라 불렸다). 한약방 인근이 일제 때 본정통이라 불렸던 중심가다.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일식 가옥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중앙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꺾으면 대동전기상회, 신광양화점 따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근대식 상가 건물들을 지나게 된다. 현재는 개인이 살거나 그냥 방치된 상태다. 그 사이사이 1960~1970년대풍 상가도 끼어 있다. 알루미늄 새시, 다방, 편물점 따위를 알리는 빛바랜 간판이 그 시절 향수를 자극한다. 

중앙초등학교에 이르면 잠시 들러 학교 강당을 둘러볼 일이다(등록문화재 제60호). 근대기의 가장 전형적인 강당 설계를 볼 수 있다. 운동장 한편에는 1970년대 세워졌다는 독서하는 소녀상과 어린이헌장이 서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현장이다. 인근에 있는 강경상고(현 강상고등학교)는 교장 관사가 볼 만하다(등록문화재 제322호). 지붕 끝을 높이 들어올려 날렵한 각을 살린 일본식 지붕 양식과 소박하게 떨어지는 한국식 맞배지붕 양식이 독특하게 맞물려 있다.

 

 

 

 

ⓒ시사IN 김은남 북옥감리교회

 


읍내 답사에 이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옥녀봉 산책이다. 기왕이면 북옥리 방향으로 올라갈 것을 권한다. 1923년 건축된, 현존하는 유일한 한옥교회라는 북옥감리교회(등록문화재 제42호)를 만날 수 있다. 3·1 만세운동 당시 존 토머스라는 영국인 선교사가 일본 헌병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보상금을 받아 지었다는 교회다. 교회로 향하는 골목길 담장에 이런 역사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국내 최초 침례교회라는 강경침례교회도 복원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1896년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침례교 예배가 거행됐다고 한다.

이들 교회를 지나 오른 옥녀봉의 높이는 불과 44m. 그러나 사방이 평지인 동네인지라 그 야트막한 봉우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강경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조금 시선을 돌리면 드넓은 호남평야, 그리고 이를 휘감고 흐르는 금강이 차례로 펼쳐진다. 기자가 옥녀봉에 오른 것은 마침 석양 무렵. 이름처럼 비단결 같은 강(錦江) 위로 붉은 해가 점점이 번져가는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왜 ‘논산 8경(景)’ 중 으뜸으로 꼽히는지 절로 깨닫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금강의 장관이 딱 여기까지라는 사실. 옥녀봉에서의 풍광에 홀려 강가로 가까이 내려가 본즉 강은 탁류와 녹조로 덮여 있었다. 금강하구둑이 생긴 이래 강의 흐름이 더뎌진 데다 4대강 사업으로 공주보까지 만들어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이곳에서 황산대교에 이르는 1㎞ 남짓한 강변 산책길은, 그런 의미에서 강경의 어제와 오늘을 새삼 곱씹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사계 김장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임이정과 그 뒤를 따라 우암 송시열이 세운 팔괘정, 그리고 죽림서원(황산서원) 등이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풍요한 지역 경제, 수려한 자연 풍광을 벗 삼아 학문에 정진했을 이들의 흔적은,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가 어지러이 오가는 강변도로에 의해 군데군데 단절돼 있다. 황산포구가 있던 곳 또한 뭍으로 변해 자취를 찾기 어렵다. 자연도, 역사도 온전히 보전되지 못한 수난의 현장이다. 

그러고 보면 강경 사람들이 왜 “옛날엔 참말로 굉장했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지도 알 것 같다. 한때의 영화를 빛바랜 기억으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의 박탈감과 허기. 강경은 그래서 더 애틋한 기억을 남긴다.

강경을 먹여 살리는 ‘음식 유산’

오늘날 강경은 젓갈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열리는 강경젓갈축제 때면 50만~60만명이 전국에서 몰려든다(올해는 10월16~20일 축제가 열린다). 젓갈상회로 정식 등록된 가게만 130여 곳이다. 이들 가게를 둘러보며 흥정하는 것도 강경 여행의 잔재미 중 하나다. 황산전망대 인근 강경젓갈전시관에 들르면 젓갈의 역사와 각종 젓갈 관련 상식도 익힐 수 있다.

 

 

 

 

ⓒ시사IN 김은남 웅어회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라면 성지순례 코스도 둘러볼 만하다. 외국 문물이 일찍 유입된 곳인 만큼 관련 유적지가 많다.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강경침례교회), 신사참배 거부 교회(강경성결교회), 충남 최초의 유치원 설립 교회(강경제일감리교회) 등이  그것이다. 한옥 처마가 인상적인 나바위성당(익산시 망성면)도 인근에 있다.

이미 물길은 막혔으되 강경 식문화는 포구 시절의 기억이 지배한다. ‘9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황산옥은 본래 황산포구에서 시작한 음식점으로 웅어회와 황복요리가 전문이다. 웅어는 봄(3~5월)에만 잡히는 전어 비슷한 생선으로 위어 또는 우어라고도 하는데, 제철이면 뼈째 썰어 초장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다른 계절에는 냉동해둔 웅어를 녹인 뒤 미나리·당근·오이 등 갖은 채소와 버무려 새콤달콤한 무침으로 먹는다. 단, 이들 웅어는 인근 서천 등에서 사온 것이다. 강경에서는 더 이상 웅어가 잡히지 않는다.  

황산옥 외 강경의 이름난 음식점마다 빠뜨리지 않는 메뉴인 황복 또한 마찬가지다. 태평식당 원경숙 사장(65)은 “20~30년 전만 해도 배로 한 시간만 나가면 황복이 그물 가득 잡혔는데 금강하구둑이 생긴 뒤로는 인근 영산강에서 잡은 황복을 사온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옛맛이 그리운 이들은 이들 식당을 찾는다. 복찜은 기본이고 간단하게 먹는 복탕도 인기다. 고춧가루 외에 고추장·된장을 푸는 것이 이곳 복탕의 특징. 칼칼한 듯 구수하면서 뒷맛이 깔끔하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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