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동상이 11월14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떠났다. 1968년 4월27일 광화문에 들어와 선 지 42년 만이다. 약 40일 동안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균열·부식·함몰 부위를 대대적으로 수술받고 12월22일 제자리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순신 동상이 자리를 비우자 이 기회에 동상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1월15일 문화재제자리찾기행동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은 서울시에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한 고증을 요구하는 공청회를 제안했다. 아울러 이를 위한 행정심판도 청구했다(문화재제자리찾기와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은 일제가 강탈해간 조선왕조의궤 반환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 패장으로 비춰질 염려가 있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중국 갑옷을 입고 있어 무인의 기상을 보여주지 못하며 △동상 얼굴이 이순신 장군 영정 사진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고 △동상이 놓인 기단 아래 전고(戰鼓:전장에서 쓰이는 북)가 누워 있어 패전을 의미한다는 점 등이다.

ⓒ뉴시스보수를 위해 특수 무진동 차량에 실려 11월14일 광화문광장을 떠나는 이순신 장군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8년 서울시가 김세중 교수(1986년 작고)에게 의뢰해 만든 작품이다. 그는 서울대 미대 학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김세중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많은 기념물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며 또한 가장 빼어난 수작이기도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이순신 동상의 칼은 일본 칼이라는 게 학계 정설이다. 전문가들은 칼의 길이와 칼날의 휨 정도로 판단할 때 이것이 일본 칼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는 이충무공의 장검(보물 제326호)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김세중씨는 이 검을 참고하지 않았다. 또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고 있다는 점도 비판을 받는다.

이순신 동상은 전형적인 중국 갑옷을 입고 있다. 복식 전문가들은 이순신 동상의 갑옷이 어깨 부위를 덮어 쓰는 형태로 만든 중국식 갑옷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식이라고 한다. 김세중씨 측은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충무공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 고증도 얻었다”라고 주장했다. 김은호 화백이 그린 이순신 장군 영정은 중국 갑옷을 입고 있다.

이순신 동상 얼굴, 조각가 닮았다는 주장도

이순신 동상의 얼굴을 놓고도 말이 많다. 동상 얼굴이 이순신 장군 영정 사진과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화폐에도 사용되었지만 동상은 이 모습과도 거리가 있다. 심지어 이순신 동상 얼굴이 김세중씨 본인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김세중씨의 아내 김남조 시인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을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거다”라고 말했다. 역사적 영웅의 얼굴이 화가나 조각가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시사IN 조남진

여러 논란은 이순신 동상이 객관적 고증과 연구가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화재제자리찾기행동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순신 동상이 일본 칼을 차고 중국 갑옷을 입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순신 동상이 잘못 만들어진 점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했다. 전문가들이 이번 기회에 고증에 나서 국가 상징물을 바로잡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순신 동상 논란은 1970년대 말부터 공론화되었다고 한다. 1977년 5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이순신 동상 문제에 대해 문화공보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1979년 5월 문화공보부는 심의를 거쳐 새로운 동상을 만들기로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1980년 1월에는 동상 건립 예산으로 2억3000만원이 책정되었다. 하지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미술계의 조직적인 반발로 ‘국적 불명’의 이순신 동상은 아직까지 광화문광장을 지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남 아산 현충사의 ‘왜색’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현충사 입구에 있는 연못부터 일본식으로 조성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연못이 일본 교토 니조조 니노마루 연못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순신 장군이 벽에 걸어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는 장검(보물 326호).
ⓒKBS 제공드라마에서 고증한 이순신 장군의 갑옷과 칼.
ⓒ시사IN 조남진이순신 동상 앞에 놓인 거북선이 작고, 전고(戰鼓·북)가 누워 있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다.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노닐고 있다. 비단잉어는 17세기 일본 니가타 현의 양식장에서 돌연변이로 발생한 어종이다. 이에 대해 현충사의 한 관계자는 “니노마루 돌 쌓는 양식이 일본식이라고 하는데, 고려시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들여온 방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단잉어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해서 키우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풍으로 꾸며진 아산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길에 심어진 향나무는 일본풍으로 가지치기를 했다. 바위와 나무를 나란히 배치한 조경 방식도 전통적인 일본풍이라고 현충사 관계자는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 본전 앞에는 ‘금송’이 있다. 금송은 일본 특산종으로 일왕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현충사 안내 책자에는 “금송은 일본의 대표적 나무로 일본 무사를 상징한다고 하여 많은 식물학자의 비판을 받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 금송은 1970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것이다. 현충사 관리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일반인이 심었다면 진작에 톱으로 베었을 텐데, 국가 원수가 한 일이라 함부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백승기현충사 연못은 일본 교토 니조조 니노마루 연못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사IN 백승기현충사 본전 앞에 있는 ‘금송’. 금송은 일본 특산종으로 일왕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충남 아산 현충사의 이 충무공 표준 영정.
ⓒ시사IN 백승기현충사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현충사 본전에 걸린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 말 군국주의와 황국신민화를 고취하는 작품을 많이 그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장우성 화백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다. 그가 시상식에서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 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라고 1943년 6월16일자 〈매일신문〉은 적고 있다. 장 화백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2007년에는 그가 그린 유관순의 표준 영정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영정에 대해서는 아직껏 별다른 논란이 없다.

정재훈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전통조경학)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집에서 “현충사는 일본 조경 양식으로 조성되고 일본 정원에 서는 석등(오른쪽 사진 참조)까지 배치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지시하여 근 20년간 약 20억원을 들어서 왜식 조경을 고쳤으나 아직도 완전하지는 못하다”라고 밝혔다. 현충사 고위 관계자는 “1997년부터 가이즈카향나무·낙우송·편백나무·독일가문비나무 등 외래 불량목을 제거하고 전통 수목으로 바꾸어 심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금송·연못·영정 사진 등에 논란이 많으니 전문가들이 검증을 통해 결론을 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현충사에서는 일본식보다 한국적인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 자기 집을 일본풍으로 꾸며놓은 것을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현충사에 일왕 상징 나무 심어

전국에 산재한 이순신 동상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 이순신 동상, 부산 용두산공원 이순신 동상, 경남 통영 이순신 동상 등은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씨 작품이다. 1973년 국회에 설치된 이순신 동상은 중국 갑옷을 입고, 일본 칼을 일본 무사처럼 쥔 채 서 있다.

1973년 4월28일 충무공 탄생일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현충사를 찾았다.

현충사 입구에는 ‘현충사 성역화’라는 동판이 놓여 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원수가 된 뒤로 충무공의 구국정신으로 민족 지도 이념을 삼고자 특별한 분부를 내려 …사당을 새로 세워 나라와 국민들의 갈 길을 밝히니….”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현충사를 성역화하고, 전국 곳곳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한국학)는 저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박정희가 가장 철저하게 배운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군국주의를 이식·재현하는 과정에서 1890년대부터 ‘장군 동상 문화’까지 소화했다. 박정희가 야스쿠니 신사에 세워진 현대적 병부의 창립자이자 서양 병법의 도입자인 오무라 동상을 보고 받은 인상을 기억해서 비슷한 이순신 동상 건립을 지시한 것은 아닐까”라고 적었다.

박정희의 통치 이념과 일본 문화에 여전히 포박당한 이순신 장군. 그를 풀어주는 일이 오늘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