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연합뉴스

얼마 전 올해 첫 붕어빵을 사먹었다. 붕어빵 노점의 불빛에서 달라진 계절을 실감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줄 서서 사가는 붕어빵 노점이 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예외는 없다. 붕어빵은 진열될 새 없이 팔려나가고 있었다. 내 앞에 선 남자 중학생 세 명이 제 차례가 가까워오자 제법 심각해졌다. 팥이 든 붕어빵을 먹을지, 슈크림이 든 붕어빵을 먹을지 토론하는 말투가 무척 신중했다. 볼에 잔뜩 여드름을 단 녀석들은 고심 끝에 고른 붕어빵을 하나씩 손에 쥐고 떠났다. ‘저 친구들 삶에서 이게 가장 큰 고민이면 좋겠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요즘엔 자주 운다. 새로 생긴 노점에서 산 삶은 옥수수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여름내 매출이 저조해 폐업을 고민하던 만두가게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면서, 출근 전 길거리 간식을 사먹기 위해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을 지갑에 챙겨 넣으면서도. 내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일상’에 골똘해진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왜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걸까.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고통을 상상한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같은 것들. 언제나 ‘긴급’을 달고 타전되는 소식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경주에서 ‘평화’를 입에 올리는 순간에도 이스라엘은 휴전 합의에 아랑곳없이 공습을 이어갔다. 나는 언젠가부터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더는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생각하지 않으면 고통은 내 것이 아니다. 괴로운 소식에 눈 질끈 감으면 없는 일처럼 살 수 있다.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모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외면하는 것으로 ‘나’를 지키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학살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7일 이후부터 지난 2년간 팔레스타인 소식에 괴로울 때마다 팔레스타인 관련 책을 사 모았다. 차마 읽지 못하고 꽂아만 두었다. 책꽂이 한 칸을 다 채울 정도로 책이 모였는데도 학살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알아야 했다.

머뭇거리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도와준 것은 ‘해초’의 존재였다. 해초는 팔레스타인 구호선 ‘천 개의 매들린호’에 탑승한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가 10월8일 공해상에서 이스라엘에 나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등 떠밀린 사람처럼 팔레스타인 관련 책들이 꽂혀 있는 책꽂이 앞에 섰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건만, 나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을 감수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게 없는 것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8월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가자 점령 반대, 가자를 굶겨 죽이지 말라’ 집회에 이집트에서 온 한 어린이가 참가했다. ⓒ시사IN 이명익
8월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가자 점령 반대, 가자를 굶겨 죽이지 말라’ 집회에 이집트에서 온 한 어린이가 참가했다. ⓒ시사IN 이명익

“낳으면 죽이고, 죽이면 낳는다”

“우리 대다수는 곧 다시 나아갈 것이다. 저런 ‘숫자들’을 등 뒤에 남겨둔 채로.” 포병 장교 출신 최우현은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돌베개) 첫 장을 팔레스타인 학살 문제로 시작한다. ‘숫자들’은 책을 쓸 당시 집계한 최신 데이터(8월29일 기준 6만3025명)에서 불과 한 달여 사이 또 늘었다. 10월5일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년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내 사망자는 총 6만6100명이다. 이는 신원이 확인된 경우에 한하며, 잔해 속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집계에 포함되지 못했다. 학살이 멈추지 않아서 이 숫자는 계속 ‘잠정’의 운명을 걸머진다.

사망자에는 어린이 1만8430명이 포함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 인구의 47.3%가 18세 미만 어린이다. 왜 이렇게 어린이가 많을까? “1948년 이스라엘 군대가 일으킨 ‘대재앙(나크바)’ 이후 77년 동안 이어져온 추방, 58년 동안의 군사점령, 18년간 지속된 봉쇄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늙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혈통이 단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낳으면 죽이고, 죽으면 낳는다. 이 무한의 굴레에서 가자 어린이 인구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학살이나 인종청소라는 ‘불편한 용어’로 부르지 않는다. 이스라엘 군대에는 ‘잔디 깎기’라는 용어가 있다. 잔디가 깎여 나가듯 가자지구 사람들이 몇 년마다 깎여 나간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제는 “‘뿌리’도 뽑아버릴 기세”다.

이 숫자를 알게 된 우리는 “미쳐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종용받는다. ‘잔디를 깎는’ 당사자 역시 그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부상 치료를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는 참전군인의 27%가 PTSD 등 치료가 필요한 정신과적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런 추세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며, 2024년 말이면 부상 군인의 40%(5600여 명)가 정신 건강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걸 그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보고 넘길 수 없다. 불과 1년 전, 전쟁이 “내게 도달하지 않았을 뿐 부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생으로 전쟁을 경험해본 적 없는 최우현은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살았고, 군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전쟁을 경험해보기를 기대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포병 장교가 되어 그 꿈을 이뤘다. 그 결과 청력의 70%를 상실해 보청기 없이는 잘 듣지 못하고, 이명과 공황장애를 얻었다. 최우현은 자신의 ‘아픈 몸’을 이해하고 해석해야만 했다. 그는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를 통해 전쟁과 국가 폭력의 어제와 오늘을 살핀다. 그 과정이 어떻게 ‘평화’에 닿았는지를 고백하는 일은, 자신과 타인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을 번역”하는 일이기도 했다. “전쟁은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데’ 온 역량을 집중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반대로 온 역량을 다해 고통을 표현한다고 해도 늘,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명백하게도 세계는 전쟁이 제공하는 엄청난 규모의 감각적 고통을 천 분의 일, 아니 만 분의 일도 언어화하지 못하고 있다.”

8월30일 팔레스타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서울 종로 일대에서 ‘가자를 굶겨 죽이지 말라’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8월30일 팔레스타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서울 종로 일대에서 ‘가자를 굶겨 죽이지 말라’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극우 파시스트 군인’이었던 최우현의 이런 변화는 독자로 하여금 어떤 가능성을 꿈꾸게 만든다. 그는 “전쟁사의 이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동화’”가 있다고, 그래서 “우리의 전쟁사가 이런 ‘동화’들을 기록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분량의 페이지를 비워두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024년 12월3일 위법하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던 한국의 군인들을 떠올린다. 팔레스타인에 총을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 군인의 마음에도 그러한 거부의 가능성이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죽지 않고, 죽이지 않는 동화 같은 세상을 미련하게 꿈꾼다.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이 총의 힘을 믿을 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한 사람을 믿는다. 세계사에서 전쟁이 멈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연대가 멈춘 적도 한 번도 없다. ‘울부짖음’과 ‘침묵’으로 점철된, 등 뒤에 선 사람들의 고통을 번역해보려 애쓰는 것. 우리의 연대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