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 걸 그룹 멤버들이 비밀리에 악마를 사냥하는 이야기.’ 7년 전 애니메이션 연출 데뷔를 앞두고 있던 매기 강 감독이 떠올린 아이디어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에 영화화를 제안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워낙 한국 문화의 요소가 강한 데다 아시아계 인물로만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대한 위험부담이 커 보였다. 한국계 캐나다인이자 이민 1.5세대인 매기 강 감독은 최근 할리우드 뉴스레터 ‘더 앵클러(The Ankler)’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케이팝의 전성기였지만 성장세가 둔화될 수도 있었다. 불확실성이 컸다.”
불확실성을 껴안은 곳은 넷플릭스였다. 시나리오 초안과 데모 곡, 스토리 보드 등을 준비해간 자리에서 설명을 들은 넷플릭스 측이 반색했다. 결국 작품의 제작은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이 맡고 넷플릭스가 배급과 투자를 담당하는 식으로 협업이 이루어졌다. 각본을 쓴 매기 강 감독이 크리스 애플한스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을 맡았다. 이들은 작품을 만들면서도 회사가 프로젝트를 중단시키지 않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한복을 입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음악의 힘이 사람을 연결한다’는 보편적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렇게 여러 관계자를 설득해가며 만든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7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6월20일 〈케데헌〉이 공개된 후 두 사람은 ‘틱톡’에서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접한 뒤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 사람들 우리랑 같이 집필실에 있었던 건가?” 작품을 만들며 나눴던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주인공 세 명을 가상 인물로 대하지 않고 진짜 아이돌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애플한스 감독은 7월25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공감을 얻기를 바랐던 것들이, 분명히 공감을 얻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반향은 공감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케데헌〉은 공개 6주 만에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었다. 첫날 17개 국가에서 1위에 올랐고, 5주 차에 누적 조회수 1억 회를 넘어섰다. 8월6일 넷플릭스 공식 순위 집계에 따르면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글로벌 영화 부문 역대 흥행 4위를 기록했다. 영화뿐 아니라 OST 8곡 전곡이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 진입했다. 특히 ‘골든(Golden)’은 지난달 초 81위로 진입한 이래 차트 역주행을 하다 7주 차에 결국 1위에 올랐다. 케이팝으로서는 ‘강남스타일’ 이후 처음으로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 1위를 차지했다. ‘유어 아이돌(Your Idol)’은 세계적 음원 서비스인 스포티파이 미국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케데헌〉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SNS를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영화 제목을 검색하면 극 중 걸 그룹 헌트릭스의 세 주인공 루미, 미라, 조이의 화보와 코스프레를 비롯해 보이 그룹 사자보이즈의 안무를 따라 하는 동영상, ‘김밥 먹방 챌린지’, 한국 가수들의 OST 커버 영상이 이어진다. 주인공들이 극 중에서 먹는 라면 때문에 불닭볶음면과 신라면의 영문 검색량이 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오프라인의 열기도 그에 못지않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더피’의 모티브가 된 호랑이 민화를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7월 한 달,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인파(70만명)가 몰렸다. 극 중 더피와 써씨가 연상되는 ‘까치호랑이 배지’가 품절되기도 했다.
케이팝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
외신과 국내 언론 모두 앞다투어 〈케데헌〉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케이팝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에 빗댈 정도로 케이팝 일선의 실력 있는 아티스트와 협업한 비하인드가 공개되기도 했다. 빅뱅과 블랙핑크를 만든 더블랙레이블의 테디 프로듀서를 비롯해 트와이스·레드벨벳·에스파 등의 곡 작업에 참여해온 이재 등이 대표적이다. 연습생 출신인 이재는 이번에 ‘골든’을 작곡하고 노래하기도 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고증에 ‘진심’이었던 점도 흥행 비결로 꼽혔다. 아이돌 문화와 팬덤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한국인 위원회’를 꾸려 제작 파트 전 부서에 한국인 스태프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이전에도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국 문화를 다룬 적이 있지만 이번엔 사정이 좀 달랐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한국 문화를 말도 안 되게 왜곡해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한국의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케이팝이라는 현재의 장치뿐 아니라 저승사자나 한복 같은 과거의 문화적 상징까지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케데헌〉은 이렇게 온통 ‘한국적인’ 것투성이다. 비로소 김치가 아니라 국밥과 김밥, 컵라면이 등장했다. 한의원, 목욕탕, 낙산공원 성곽 등 한국의 다양한 장소가 나오고 매듭 팔찌와 민화 같은 한국의 전통문화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오늘자 국내 음원 차트 순위권에 있을 법한 케이팝 OST도 있다. 온통 한국인에게 익숙한 요소로 채워진 이 애니메이션이 대체 왜 글로벌한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한국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루지만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데 힌트가 있다. 제작진 다수가 아시아계 북미인이고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노래를 부른 뮤지션 역시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케데헌〉을 두고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성공에서 시작된 흐름의 연장선이라 보는 시각이 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2018년 미국에서 개봉해 3주 만에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선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아시아계 창작자들이 만들고 아시아계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는 유례 없는 흥행이었다. 당시 존 추 감독은 이를 두고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그 움직임에 힘입어 이후 많은 작품이 나왔다. 그중 영화 〈미나리〉, 드라마 〈파친코〉도 있다. 영화와 드라마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 문화 전 영역에서 한국 디아스포라의 시선을 통해 한국이 묘사되고 있는 추세다.
매기 강 감독도 스스로 인생의 대부분을 북아메리카에서 살았지만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한 그는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들어와 사촌들과 어울리고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 동네에서 10대 시절을 보내며 백인 친구들 앞에서는 좋아하는 케이팝 앨범을 숨기기도 했다. 〈장화 신은 고양이(2011)〉 〈가디언즈(2012)〉의 미술팀을 거쳐, 〈레고 닌자고 무비(2017)〉 스토리 총괄을 맡은 뒤 연출 데뷔를 앞두고 “스스로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 신화와 악귀가 먼저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갓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이콘처럼 꼭 넣고 싶었다. 자연스레 악귀 사냥꾼을 연상했고 ‘리얼’한 여성 슈퍼히어로를 그리기로 했다. 먹는 걸 좋아하고 웃기고 이상한 표정도 짓는, 본인 같은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악귀 사냥은 숨어서 하는 일이다 보니 정체를 숨기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케이팝이 적격이었다. 음악을 이용해 악을 물리친다는 아이디어는 한국 무속신앙과 잘 맞아떨어졌다. 매기 강 감독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케데헌〉이 “완전히 한국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서구적이지 않으며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양쪽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어서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심슨 가족〉과 〈루니 툰〉 같은 미국 애니메이션의 수혜를 받았다. 태평양 양끝에 위치한 두 나라가 교차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골든 스크린: 아시아계 미국인을 만든 영화들〉의 저자인 제프 양은 처음 〈케데헌〉을 볼 때 본인이 이 영화의 타깃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90분 뒤 주제곡 ‘골든’을 열창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확히 타깃층이었던 셈이다. 그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어떻게 글로벌 현상이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청자 수백만 명도 자신과 마찬가지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과거에는 아시아나 할리우드 모두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디아스포라를 독특한 자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그는 〈케데헌〉에서 엉터리 한의사 목소리를 맡았다. 제프 양은 〈케데헌〉 자체는 할리우드에서 드문 사례지만 곧 흔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민자 커뮤니티가 입양된 고향과 조상의 고향 모두에 문화적·상업적으로 이로움을 주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는 흥미로운 사례다.”
디아스포라의 시선에서 묘사된 한국
온전히 한국적인 영화가 미국의 대형 자본을 통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메시지도 있다.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BTS 길 위에서〉의 저자이기도 한 홍석경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외국에서 한국 문화가 인기를 끌면 뒤늦게 놀라는 패턴을 몇 년째 반복하고 있다. 세계 속 한국 문화의 현실에 대해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케이팝이란 단어에 붙는 K도 우리가 아는 협소한 의미의 K를 넘어선 지 오래다”라고 말했다. 그가 한국 디아스포라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국 문화의 확장성을 한국 디아스포라가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 세계 108여 개 나라에 약 750만명의 재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케데헌〉의 주인공은 등장인물인 헌트릭스뿐만 아니라 케이팝 그 자체이기도 하다. 평소 케이팝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영화를 본 뒤 OST를 반복해 듣는다. 영화보다 음악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한국의 아이돌이 해외에 진출해 호응을 얻고 있지만 아이돌의 세계관은 팬이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케데헌〉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 세계관을 쉽게 인식시켰다”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이 미친 영향은 또 있다. 홍석경 교수는 “서구 백인 남성의 시선에서 케이팝을 좋아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돌 문화 자체가 태생적으로 여성 중심인 데다 아시아에서 기원해 중첩된 장벽이 있다. 〈케데헌〉은 애니메이션이라 아이돌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오히려 확장성을 가진다. 영화 속 케이팝은 우리 귀에 익숙하게 들리지만 외국에서 자란 프로듀서들의 감각으로 필터링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케데헌〉의 성공은 잠도 자지 않고 아프지 않으며 나이 먹지 않은 ‘버추얼 아이돌’의 가능성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넷플릭스는 〈케데헌〉 후속작과 함께 실사영화, 뮤지컬 등의 제작을 논의 중이다. IP(지식재산권)의 확장보다 눈에 띄는 건 ‘골든’을 흥얼거리는 어린 시청자들이다. 어린이와 10대들이 디즈니의 〈겨울왕국〉에 열광했던 것처럼 〈케데헌〉에 흥분하고 있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게 문화의 속성이다. 〈케데헌〉도 향후 몇 년간은 계속해서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부인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우리가 좋아하는 문화를 더 꼼꼼히 살피고 진심으로 대한 결과 케이팝이나 한국을 굳이 의식하지 않던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케데헌〉은 이미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기록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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