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미국 보스턴 아레나에서 연습 중인 트라프 가족합창단. ⓒWikipedia
1941년 미국 보스턴 아레나에서 연습 중인 트라프 가족합창단. ⓒWikipedia

1947년 여름,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트라프(1905~1987)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게오르크의 소식을 전합니다. 연주 여행 중 게오르크의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졌고, 진단 결과 폐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게오르크는 행복해했지만 점차 악화됐지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을 부르고 신부님도, 의사도 불렀습니다. 우리는 침대 주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습니다. 한밤중에 의사가 말했습니다. “마지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게오르크, 이제 임종이에요. 사랑하는 나의 게오르크, 당신은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죽음을 기꺼이 받으시겠지요?” 우리는 이 순간이 오면 죽음을 알려주고 이렇게 묻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윽고 최후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영웅적인 죽음이! 고통스럽던 게오르크의 얼굴은 평온을 되찾았고, 경이의 표정으로 다른 세계를 응시했습니다. 그는 머리를 조금 끄덕였고, 두 눈은 영원히 감겼습니다(마리아 트라프 지음, 이경애 엮음,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재구성).

1947년 5월30일 오전 4시30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남작이자 해군 소령이었고, 트라프 가족합창단의 아버지였던 게오르크 루트비히 리터 폰 트라프(1880~1947)가 미국 버몬트주 스토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67세.

폰 트라프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는 2년 후 가족의 이야기를 각색해 〈트라프 가족합창단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1956년 독일에서 〈트라프 가족〉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브로드웨이의 전설적 콤비인 극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작곡가 리처드 해리스에 의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1959)으로 무대에 올랐다. ‘에델바이스’나 ‘도레미송’ 같은 노래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1965년에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의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을 맡아 영화로 재탄생했다. 마리아 역은 〈메리 포핀스〉(1964)로 톱스타가 된 줄리 앤드루스가, 폰 트라프 역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맡았다. 영화사에 남는 히트작이 됐다.

영화의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다. 엄마를 잃은 트라프 가족 일곱 아이에게 젊은 가정교사 마리아가 온다. 어둡던 아이들의 세상에 마리아가 음악으로 빛을 비춘다. 엄격한 아빠도 마음을 연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킨 나치가 폰 트라프에게 해군 복귀를 요구하며 마수를 뻗쳐온다. 가족은 합창대회 참가를 기회로 삼아 스위스로 탈출한다. 음악의 힘으로 압제를 이겨내고 사랑을 이룬다는 명쾌한 서사다.

영화는 사실에 기초했지만 차이도 있다. 예컨대 트라프 가족은 그렇게 극적으로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지 않았다. 그냥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좀 더 미묘한 차이들도 있다. 영화 속 폰 트라프는 아이들을 호루라기로 호출하고, 제복 입은 아이들은 황급히 집합한다. 군대식 규율을 강요하는 캐릭터다. 첫째 부인 아가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아가테는 회고록 〈사운드 오브 뮤직 전후의 기억들〉(2003)에서 아빠가 호루라기를 분 건 그저 집이 너무 넓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엄하기는커녕 다정한 아빠였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한 장면. ⓒAP Photo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한 장면. ⓒAP Photo

무엇보다 아가테는 음악을 가르친 것이 새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고 말한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과 기타와 아코디언을 가르쳤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정반대다. 연극과 영화에서는 전적으로 둘째 어머니가 우리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가르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는 둘째 어머니를 만나기도 전에 잘츠부르크의 집에서 아빠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1차 대전 중 에를호프에서 엄마, 외할머니, 이모들과 함께 노래하고 피아노를 치면서 아주 일찍부터 노래를 불렀다.”

아가테는 뮤지컬을 보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도 속상해했다. 무대에 오른 냉정한 남자는 아빠가 아니었다. 뮤지컬과 영화는 아름다웠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우리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마리아가 9000달러라는 헐값에 판권을 팔아버린 탓에 가족은 스토리를 통제할 수 없었고, 기억을 빼앗긴 느낌이었다고 89세의 아가테는 한탄한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 따지는 건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다만 음악을 사랑하는 명랑한 예비 수녀 마리아를 중심에 둔 단선적인 서사에 가려진 이야기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바로 게오르크 폰 트라프를 둘러싼 이야기다. 마리아의 남편으로만 기억되기엔 그의 삶은 좀 더 복잡했고, 그들의 세상은 많이 어려웠다.

‘제국의 에이스’ 폰 트라프 소령

폰 트라프  ⓒWikipedia
폰 트라프 ⓒWikipedia

 

폰 트라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해군의 에이스였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어뢰정에서 근무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 4월, 잠수함 U-5의 함장이 된다. 4월27일, U-5는 집요한 추격 끝에 프랑스 제2순양함전대의 기함인 장갑 순양함 레옹 강베타를 어뢰로 격침한다. 제국 해군의 첫 전과였다. 프랑스 해군의 활동 반경이 크게 위축됐다. 8월5일에는 이탈리아 잠수함 네레이데를 격침한다. 전쟁 중 그는 적국 군함 2척과 적국 상선 11척을 침몰시켰다. 제국 해군 최고의 전과였다. 레오폴트 기사십자훈장과 마리아 테레지아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패전만 아니었다면 해군 대장이 됐을 것이라고 동료들은 회고한다. 나치가 그의 해군 복귀를 압박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폰 트라프는 신이 났을까? 아닌 것 같다. 레옹 강베타의 승조원 821명 중 684명이 죽었다. 격침 성공 후 부상한 U-5 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생존자들을 외면했다. 250t급 소형 잠수정에는 자리가 없었다. 폰 트라프가 펴낸 회고록 〈마지막 경례를 위하여〉(1935)가 손녀 엘리자베스 캠밸에 의해 영역(英譯)되어 있다. 거기 이 침몰 장면이 나온다. 구명보트에 매달린 이들을 외면하며 그는 엔진을 켜라고 명령한다. 대원 중 한 명이 말한다. “그들은 젠타호의 우리 대원들도 익사하게 내버려뒀어요.” 맞는 말인데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전쟁은 끔찍하기 마련이다. 폰 트라프에게도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와 잠수함의 인연은 특별했다. 그가 함장을 맡은 U-5는 잠수함 건조 기술을 국산화하려는 계획의 출발점이었다. 미국에서 설계되어 부분 조립된 잠수함은 군항 피우메의 로버트 화이트헤드 공장에서 완성됐다. 공장 설립자인 영국인 로버트 화이트헤드(1823~1905)는 바로 이 공장에서 어뢰라는 신무기를 발명했다. 1909년 U-5 진수식에 폰 트라프가 초대됐을 때 화이트헤드의 손녀 아가테 화이트헤드가 진수식을 주관했다. 축하 파티에서 둘은 사랑에 빠졌다. 2년 후 결혼식 때 화이트헤드가의 친척들이 영국에서 찾아왔고, 어뢰 공장 노동자들이 축복했다. 어뢰와 잠수함은 그의 삶 한가운데 있었다. 폰 트라프는 아내가 명명한 잠수함의 함장이 되어 영국인 처조부가 발명한 어뢰로 배를 격침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침몰한 상선 11척 중 6척이 영국 상선이었다.

전쟁은 부조리하기 마련이다. 그 전쟁은 더 부조리했다. 국제정치학과 역사학에서 1차 대전은 대표적인 외교 실패의 사례로, 집단 안보의 강화가 오히려 세력균형을 무너뜨리고 전쟁을 촉진하는 ‘안보 딜레마’의 대표 사례로 꼽혀왔다. 독일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전쟁 발발의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 쪽에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피셔 테제다. 그 반대편에 관련국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집단책임론이 있다. 영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몽유병자들: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2012)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전개된 7월 위기를, “어쩌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복잡한 사건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집착하고 책임 소재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위기가 전개됐는지,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유럽 1914~1949: 죽다 겨우 살아나다〉(2015)에서 두 입장을 중재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가 결정적인 힘이었고, 독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어느 한 국가의 명백한 충동이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는 해석이다.

1차 대전은 발발도, 경과도, 결과도 부조리했다. 전쟁의 주범으로 몰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조차 끝까지 개전을 피하려 애썼다. 그런데 참극이 벌어졌다. 여름에 개전하면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나리라고 믿었다. 4년이 넘는 동안 장병 3200만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민간인 1900만명이 죽는 대재앙이 펼쳐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종전 후 국제연맹이 만들어지고,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발칸반도와 중부 유럽의 여러 민족이 나라를 세웠다.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작가 H. G. 웰스가 이 전쟁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부른 이유다. 실제로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경고한 것처럼 더 큰 파국이 찾아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군. ⓒWikipedia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군. ⓒWikipedia

폰 트라프의 삶에는 잠수함과 어뢰 말고도 이 전쟁의 비극적 계기들이 꽤 스며들어 있다. 전쟁 발발의 원인은 복합적이었지만 빌헬름 황제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특사에게 무조건 지지를 약속한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곤 한다. 빈은 이 지지를 믿고 세르비아-러시아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특사 호요스는 강경파였다. 그가 특사로 오는 것 자체가 빈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아가테 화이트헤드의 사촌오빠였다. 폰 트라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충성을 바쳤지만, 실은 전쟁의 화약고가 된 발칸반도의 달마티아 왕국, 지금의 크로아티아 출신이었다. 그의 삶은 11개 민족으로 이뤄진 이 다민족 제국의 영광과 실패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민족 간 증오가 끝나지 않았고, 인종청소의 피 내음이 가시지 않았다. 민족들의 공존을 꿈꾸던 제국 질서에 대한 향수가 지금도 남아 있는 이유다.

폰 트라프의 침묵에 질문하기

그의 삶은 이토록 복잡하고 흥미롭지만, 서구의 문헌들이 침묵하거나 간과하는 경력 하나에 나는 눈길이 간다. 1898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폰 트라프는 훈련 항해에 나섰다.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1900년 중국에 도착했을 때 ‘의화단운동’ 또는 ‘의화단의 난’을 만난다. 그는 톈진 인근 베이탕 요새 공격 때 세운 공으로 은성무공훈장을 받는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의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반환한 일은 유명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대가로 독일은 산둥반도를 조차(租借)했고, 러시아는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무렵부터 중국 인민의 반제국주의 의식이 고양됐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우던 의화단이 청을 떠받치고 서양을 멸한다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노선을 바꿨다. 제국의 힘을 믿고 인민을 탄압하던 기독교, 특히 가톨릭이 타깃이 됐다. 빈농과 유민이 중심이 되어 1899년 말부터 봉기가 시작됐다. 선교사 500여 명과 중국인 신도 수천 명이 살해됐다. 조정의 실권자 서태후는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에너지를 이용할 마음을 품었다. 1900년 6월, 의화단이 베이징의 외국 공관들을 포위하자 서태후는 의화단을 지지하고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 8개 열강의 군대가 의화단을 진압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독일 원정군에게 빌헬름 2세는 말했다. “1000년 전 아틸라의 지도하에 훈족이 명성을 얻어 그 덕분에 아직까지 역사 속에 살아 있는 것처럼, 바라건대 독일의 이름도 중국에서 그런 식으로 알려져 어떤 중국인도 감히 다시 독일인에게 곁눈질하지 못하게 하라.” 독일이 가장 잔인했다. 오스트리아도 유독 잔인한 축에 속했다고 전한다.

1900년 중국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베이징에 입성하는 연합군. ⓒWikipedia
1900년 중국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베이징에 입성하는 연합군. ⓒWikipedia

폰 트라프의 회고록은 이 일에 대해 침묵한다. 장녀 아가테가 잠깐 이 일을 언급한다. 그 기억이 너무 끔찍해서인지 아버지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양심이 개재된 외면일까, 아니면 무시일까?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의 군공을 다룬 문헌들도 이 경력을 그저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들에겐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일까?

나는 차라리 이 침묵 속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부조리한 상호 공격과 자기 파멸 앞에서 유럽은 몸서리를 쳤다. 백 년 넘게 기억하고 또 묻는다. 서구 바깥에서 일어난 일은 그 윤리적 고뇌의 장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의화단이 진압된 이듬해 제주도에서는 제국의 힘을 업은 가톨릭과 지방관의 횡포에 맞서 이재수의 난(신축교난)이 일어났다. 300명 이상이 죽었다. 의화단운동과 같은 궤적의 항쟁이었다. 저들이 침묵해도 우리는 물어야 할 이유다.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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