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모험 과학 소설의 선구자 쥘 베른. ⓒWikipedia
프랑스 모험 과학 소설의 선구자 쥘 베른. ⓒWikipedia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둥근 지구를 걷다 보면 정말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생각해보면 바로 이게 세계일주다. 세계일주는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난 다음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행위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기록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것은 마젤란 탐험대였다. 1519년 9월에 스페인을 출발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3년 만에 귀환했다. 약 270명이 출발해서 18명이 돌아왔다. 마젤란도 필리핀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세계일주는 목숨을 건 탐험이었다. 세계일주가 탐험에서 여행으로 전환하려면 이동의 안전을 보장할 세계적 ‘질서’와,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19세기가 되자 ‘팍스 브리태니카’, 영국의 세계 지배 아래 안전한 이동이 가능해졌다. 1807년에 증기선이 등장하고, 1830년에는 증기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교통 혁명의 시작이다. 1841년에는 영국에서 최초의 여행사 토머스 쿡이 설립됐다. 여행이 귀족을 넘어 부르주아의 새로운 취미로 떠올랐다.

개인이 세계일주를 꿈꾸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토머스 쿡은 1872년, 기선을 이용한 세계일주 여행 상품을 선보여 화제를 일으켰다. 같은 해에 쥘 베른은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프랑스 잡지 〈시대(Le Temps)〉에 연재했다. 이듬해에 출판한 책은 크게 히트했다. 바야흐로 세계일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초판 표지. ⓒWikipedia
〈80일간의 세계 일주〉 초판 표지. ⓒWikipedia

그리고 딱 10년 후인 1883년, 조선이 최초로 서구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인 보빙사가 세계일주를 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후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 중 일부(민영익, 서광범, 변수)가 미국 군함을 타고 유럽 각국과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 등을 둘러보고 귀국했던 것. 사절단 중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했고, 훗날 〈서유견문〉을 쓴다. 보빙사 일행의 안내자로 일한 인물이 훗날 화성 운하설과 로웰 천문대로 유명해진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다.

세계일주가 서구 부자들의 취미가 된 시절이다. 한반도에도 그들이 왔다. 1909년 4월28일자 〈황성신문〉에는 ‘일주단래경(一週團來京)’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토머스 쿡이 주관하는 세계일주단 10명이 4월27일 아침에 부산에 입항해 기차로 당일 밤 경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여행의 체험은 이중적이다. 바깥을 경험하며 안을 돌아보게 된다. 타자와 만나면서 자아가 흔들리기도, 단단해지기도 한다. 세계일주는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가 가장 멀리 확장되는 경험이다. 보편적인 세계라는 시점을 확보할 수도 있다. 유럽 여행이나 서구 체험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세계는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돌아온 여행자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출발 전 보빙사. 현흥택·최경석·유길준·고영철·변수·로웰·서광범·민영익·홍영식(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 ⓒWikipedia
출발 전 보빙사. 현흥택·최경석·유길준·고영철·변수·로웰·서광범·민영익·홍영식(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 ⓒWikipedia

1910년,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국망을 초래한 이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그 첨두에 선 청년 지식인 최남선(1890~1957)이 세계일주를 위해 재미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창가(唱歌)로 ‘세계일주가’(1914)를 지어 상상으로 세계를 일주한 것이다. “취미로써 세계 지리 역사상 요긴한 지식을 득하며, 아울러 조선이 세계 교통상 추요(樞要)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할 주지”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한 연은 4행으로 이루어지고, 연마다 주석도 붙였다. 이렇게 중국, 러시아, 유럽 각국, 미국(하와이), 일본 등 모두 18개국, 수십 개 도시를 여행한다. 세계적인 대도시에는 여러 연을 할애한다. 이를테면 파리의 첫 연과 주석은 이렇다.

‘파리야 얼굴로는 첨이다마는/ 세계 문명 중심에 선봉 겸하여/ 이 세상 낙원이란 꽃다운 이름/ 오래도다 들은지 우뢰 퍼붓듯

〔파리〕(Paris) 프랑스국 수도. 센강을 가로탄 유럽 대륙 중 최대 도부(都府)니 네거리(街衢)의 장려가 세계에 빼어(冠絶)나며, 또 공예미술이 모이는 곳(淵藪)이 되느니라. 신발명·신유행의 발원지.

〔낙원〕 파리는 물색도 번화하려니와 환락의 기관이 구비하므로, 유락을 탐하는 인(人)이 사방으로서 진집(溱集)하느니, 고로 세계 낙원의 칭이 있느니라(〈육당 최남선 전집〉 제5권).‘

상상 속 세계일주, 실제의 세계일주

“흰 비단을 넌 듯한 세느강”을 거닐고, “천하에 제일가는 대영박물관”에서 감탄하며, “여신상 우뚝 선(屹立) 곳 뉴욕”을 탐방한 최남선이다. 물론 그래봐야 머릿속 여행이었다. 저릿한 귀환의 감상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끝을 맺는다.

‘양양(洋洋)한 한강물이 눈에 보이네/ 그립다 남대문아 너 잘 있더냐/ 아무래도 볼수록 기쁜 제 고장/ 곤여(坤輿, 세계)를 두루 돌 제 많은 느낌은/ 말씀할 날 있기로 아직은 이만.’

나혜석의 삶은 근대 초기 여성이 겪은 굴곡을 상징한다. ⓒWikipedia
나혜석의 삶은 근대 초기 여성이 겪은 굴곡을 상징한다. ⓒWikipedia

일제 시기에 실제 세계일주를 하고 여행기를 남긴 인물은 누가 있을까? 허헌, 나혜석, 이순탁, 박인덕, 최린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유학파 엘리트였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민족 변호사 허헌(1885~1951)은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1926년 5월부터 1927년 5월까지 세계를 일주했다. 후일 북한 지도부 일원이 되는 딸 허정숙이 동반하다가 미국에서 유학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은 일본의 만주국 부영사를 지낸 남편 김우영과 함께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세계일주에 나섰다.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이순탁(1897~1950)은 학교의 지원으로 1933년 4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여행하며 〈조선일보〉에 여행기를 연재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여성운동가 박인덕(1897~1980)은 유학 시절이던 1928년부터 1931년까지 1차로 세계일주를, 조선여자기독교회(YWCA) 총무로 일하던 1935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차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기독교여성단체들의 후원이 있었다.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천도교 지도자 최린(1878~1958)은 교단의 후원으로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미국과 유럽 각국, 러시아, 중국을 여행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중외일보〉 기자 이정섭(1895~1950)은 미국, 영국, 아일랜드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최린과 동행하다 귀국했다. 그가 〈중외일보〉에 연재하던 여행기 역시 일제가 민감하게 여기던 아일랜드 문제를 다루는 바람에 중단됐다.

이순탁과 박인덕은 여행기를 당대에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순탁은 〈최근 세계일주기〉(1934)를, 박인덕은 〈세계일주기〉(1941)를 펴냈다. 주로 월간지 〈삼천리〉에 실렸던 나혜석의 여행기는 근년에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기〉(2018)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세계를 일주하고 돌아온 이들의 글이라 반향이 컸다.

남편이 일본 외교관이라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은 나혜석의 여행은 호화로웠다. 보통의 봉급생활자가 30년 모아야 할 돈을 경비로 썼다. 늘 1등칸을 탔고, 고급 호텔에 묵었다. 어디서나 최상류층과 어울렸다. 열강들의 군축회의가 열리던 제네바에서는 일본 대표단 부부들과 식사를 하고, 마침 유럽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했다. 일본 대표인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영친왕을 주빈으로 모시고 연 각국 대표단 만찬에 참석하기도 했다.

1933년 시카고 엑스포의 제너럴모터스관. 이순탁은 여기서 쉐보레 자동차가 라인에서 조립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놀란다. ⓒWikipedia
1933년 시카고 엑스포의 제너럴모터스관. 이순탁은 여기서 쉐보레 자동차가 라인에서 조립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놀란다. ⓒWikipedia

나혜석은 행복했다. 다만 한 점 그늘마저 어쩌지는 못했다. 제네바 호수에서 배를 탔을 때 갑판 위에 관현악이 울렸다. “태양빛이 흐르는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 음악소리에 몸이 싸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삶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하였다(나혜석, ‘伯林과 巴里’,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

나혜석은 8개월 동안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예술의 도시에서 그녀의 감각은 불타올랐다. 더불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구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이었다. “구미 여성은 창조적이요 예술적이다. 구미 여성은 인격으로나 두뇌로나 기술로나 학술상 조금도 남자의 그것보다 결핍하지 아니하여 당당한 사람 지위에 있는 것이다(‘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 〈삼천리〉 제7권 제5호, 1935).“

귀국 후 남편이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동안 나혜석은 경남 동래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여행에 너무 많은 돈을 쓴 탓에 살림도 궁핍했다.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 돌보며, 치마저고리 입고 바느질을 했다. 끝없이 일했다. 구미에서 훨훨 날아다니던 지난날이 꿈같았다. 아득한 격차를 메울 수 없었다. 최린과의 ‘불륜’과 이혼, 정조유린죄 소송, 사회적 매장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이 아찔한 격차 사이에서 나혜석이 감당해야 했던 목숨값이었다.

돌아온 식민지 ‘고국’, 그리고 나

여성운동가 박인덕. ⓒWikipedia
여성운동가 박인덕. ⓒWikipedia

윤심덕, 김일엽 등과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지도교사이기도 했던 박인덕은 ‘조선의 현대적 노라’로 유명했다. 사업가 김운호가 열렬히 구애했는데 본처가 있었다. 박인덕은 이혼을 요구했고, 김운호는 응했다. 본처를 이혼시킨 결혼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남편의 사업은 곧 몰락했고, 박인덕은 교사 일을 하며 딸 둘을 키웠다. 남편에게 본처 외에 숨겨둔 첩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박인덕은 떠났다. 미국 기독교여성단체의 후원을 받아 1926년 8월,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리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사회학 학위를 받은 후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땄다. 강연을 잘해서 초청을 받으며 세계일주를 했다. 강연비를 남편에게 보내 양육비로 쓰게 했다. 귀국해보니 남편은 그 돈으로 새 첩을 들였다.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하면서 양육권을 쟁취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또다시 세상이 뒤집어졌다. 시절 탓일까, 여론은 그녀를 비난했다. 전쟁기에 들어 친일에 나섰다. 친일 논설을 쓰고 지원병 독려 연설을 했다. 여성해방에 헌신한 공이 친일의 과를 덮지 못한다. 친일의 과가 그의 주체적 결단이 품은 해방적 의의를 가리지 못한다. 세상이 간단치 않다.

이순탁의 여행에는 이런 드라마가 없다. 교토제국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좌파였지만, 사회활동에서는 민족주의 우파에 가까웠다.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등 민족자본주의, 민족협동론 노선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등 문화 활동에 주력했다. 자유의 공기를 마신 대가로 운명을 바꾸어야 할 일이 주류 남성 지식인에게는 없었다. 대신 그의 여행기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인들에 대한 연민, 유럽 문명에 대한 찬탄, 미국 물질문명 앞에서의 현기증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대공황과 파시즘에 대처하는 각국의 대응도 중요 주제였다.

곁가지 같은 이야기들도 있다. 일본 여권을 가진 그는 일본인 대우를 받는다. 런던에서는 일본 대사관의 도움으로 세계경제회의 폐막 총회를 참관한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본인을 좋아한다며 빙수를 사달라는 박물관 수위에게 기분 좋게 빙수를 쏜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미얀마인 승객을 향해 미얀마 사람이라면 신사가 아니라고 흉보는 일본 여고생에게 동조한다. 식민지 신세가 된 나라들을 불쌍히 여길 때는 꼭 열강의 국민 같다.

경제학자 이순탁은 세계 여행기를 연재했다.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경제학자 이순탁은 세계 여행기를 연재했다.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그렇게 일본 지식인 흉내를 낸 이순탁이었다. 그래봐야 어차피 시한부 위장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순탁은 생각한다. “떠날 때에는 용기백배로 온갖 호기심을 가졌지마는 돌아와서 본즉 나에게는 이전 용기는 간 곳 없고 넋 잃은 사람 같으며, 모든 호기심은 다 사라지고 도로 옛날의 자신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혜석과 박인덕이 돌아와 만난 현실이 이순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순탁은 1938년 4월,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같은 학과 교수 백남운·노동규,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다. 실형을 선고받고 1940년 7월까지 복역했다. 복직을 못했다. 학교의 배려로 세브란스병원 경리과장으로 재직하다 해방을 맞는다. 이후 이승만 정부의 기획처장으로 농지개혁안 마련에 힘썼다. 남한의 농지개혁에는 농림부 장관 조봉암과 이순탁 등 중도좌파의 흔적이 뚜렷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다가 후일 1950년 10월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세계에 나가보니 다른 세상이 있었다. 밖에서 배운 대로 살기에는 돌아온 제 나라 사정이 너무 가팔랐다. 이들이 각각 선택한 삶에 대해 후세의 우리가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식민지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혜석도, 박인덕도, 이순탁도. 세계일주가 그것을 더 아프게 깨우쳐줬다.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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