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에 촬영한 인천 애관극장의 모습. 1895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전신이다.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인천 시민들 제공
1972년에 촬영한 인천 애관극장의 모습. 1895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전신이다.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인천 시민들 제공

“1939년 6월23일, 경기도 인천부 경정 203번지에 사는 소학교 5학년생 유윤순(15)이 돌연 집을 나선 후 종적을 감췄다. 끝내 딸을 찾지 못한 어머니 한씨가 경찰에 수색원을 냈다. 배우를 동경하던 딸이 기어코 배우가 되려고 가출했다며 하소연이다(〈매일신보〉 1939년 7월12일, ‘꿈 많던 처녀시대, 배우를 동경코 가출’).” 윤순은 어쩌다 배우를 꿈꾸게 됐을까? 기사에는 단서가 없다.

주소를 보다가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본다. 극장 ‘애관’이 인천부 경정 238번지에 있었으니 윤순의 집과 지척이다. 애관이 어떤 곳인가? 1895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1911년에 축항사로, 1921년에 다시 애관으로 이름을 바꿨으니 유서 깊기가 비길 데 없다. 1927년에 관객 800명 규모의 르네상스식 건물을 올렸고, 1937년에는 14만5000명의 관객을 맞았다. 애관이 있는 경정 일대는 인천의 시네마 천국이었다. 애관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을 열다섯 살 윤순을 떠올려본다. 그녀는 배우가 됐을까?

인천은 신문물이 제일 먼저 상륙하는 개항장이었다. 산간벽지는 어땠을까? 압록강 상류, 평균 고도 1000m가 넘는 첩첩산중 평북 후창군(지금의 양강도 김형직군)의 또 다른 열다섯 살 소녀도 가슴앓이를 했다. 1934년 8월께, 후창군 동흥면 고읍동에 삼화극단이 머물며 흥행을 했다. 남자 주연배우 나한원(19)이 고읍동에 사는 이수선(23)과 사귀고서 그녀와 공모했다. “이수선으로 하여금 극단 여배우의 호화로운 생활과 시골 처녀의 아이보기 생활을 비교하여가며 감언으로 꾀이게 하여” 이춘희(15)에게 결혼하자고 접근했다. 8월23일, 나한원은 이춘희를 데리고 도망쳤지만 곧 경찰에 체포됐다(〈동아일보〉 1934년 10월17일, ‘배우 생활 동경하는 시골 처녀를 유인’). 나한원은 죗값을 치렀을 것이다. 열다섯 산골 소녀 이춘희의 상처받은 꿈은 어찌됐을까?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도 바야흐로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연극과 영화, 대중가요가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유행도 생겨나고 있었다. 1919년 단성사에서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됐고, 1923년에는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흥행했다. 1926년에는 그 유명한 〈아리랑〉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나그네〉(1937) 등이 크게 성공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는 드높았다. 영화는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웬만한 지방 소도시까지 극장이 들어섰고, 벽지에서는 공회당과 학교 운동장에서 순회 상영회가 열렸다.

대중가요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26년에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히트했고, 1928년에는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인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이 나왔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라디오 시대가 열렸고, 1928년부터는 전기 녹음이 시작됐다. 대중가요는 날개를 달았다. 1930년대를 지나며 6대 레코드 회사가 주도하는 음반시장이 형성됐고, 민요·속요·신민요·신속요·유행가, 재즈와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들이 경합하며 명멸을 거듭했다.

문화산업의 약진, 스타시스템의 탄생

떠오르는 대중문화의 중심에 스타가 있었다. 배우와 가수 등 스타라는 존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전에도 인기를 누리는 예술인은 있었지만, 대중의 욕망과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아니었다. 스타는 달랐다. 대중은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삶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다. 그렇게 위안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팬이 됐다. 스타와 팬은 동시에 탄생한 새로운 인간형이다. 팬은 스타를 통해 비루한 삶 너머를 꿈꿨다. 그중 어떤 이들은 저 열다섯 소녀들처럼 집을 뛰쳐나와 스스로 꿈이 되고자 했다.

1929년 영화 〈코퀘트〉에 출연한 메리 픽포드(가운데).  ⓒDTM
1929년 영화 〈코퀘트〉에 출연한 메리 픽포드(가운데). ⓒDTM

스타도 팬도 바다를 건너온 박래품이지만, 서구에서도 1910년대를 지나며 갓 등장한 현상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원한 영화산업은 유럽이 전쟁에 휩쓸린 1910년대를 거치며 미국으로 중심을 옮겼다. 1914년, 에드윈 포터가 연출한 영화 〈테스〉에 여배우 메리 픽포드(1892~1979)가 출연했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그녀는 스타의 원조가 됐다. 1916년이 되자 예상 수익의 절반이 넘는 100만 달러를 받는 최초의 배우가 됐다. 젊고 발랄한 소녀상을 구축한 그녀는 팬들을 몰고 다녔고, 수많은 뉴스와 서사가 그녀를 매개로 생산되고 소비됐다. 대중문화사는 바로 이즈음을 스타가 탄생한 시기로 기억한다. 이제 영화는 스타가 중심이 된 산업이 되었다. 스타시스템의 탄생이다.

대중문화의 부상은 문화산업의 약진과 동반한 현상이었다. 스타시스템은 이윤 극대화와 안정화를 동시에 겨냥한 할리우드의 공장식 영화제작 방식, 즉 스튜디오 시스템의 일부였다. 대중은 스타에 열광하며 얇은 지갑을 열었다. 그만큼 현실의 고통을 잊었다. 대중문화 비판이 대두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의 비판적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대량생산·대량소비되는 대중문화가 체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화산업이 대중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스스로 사유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화산업의 “양식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바로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순종이다”. 대중문화는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시멘트’다.

발터 베냐민은 이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대중문화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사진술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 예술의 탄생이 가져올 효과에 주목했다. 무한 복제의 시대에 유일무이한 원본이나 진품의 가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진품만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동일성의 논리인 아우라가 사라지면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도 바뀐다. 진품에만 가치를 부여하던 보수적 태도 대신 이를테면 채플린 영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태도 같은 것이 생겨난다. 게다가 영화 관람은 집단적 체험이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관객 개개인의 반응이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거기서 예술의 정치화가 가능해 보였다.

지구 반대편 철학자들의 논쟁이 그저 현학적인 말다툼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었다. 차이가 있다면 스타마저 너무 슬펐다는 것이다. 대중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는 아직 낮았다. 기막힌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팬들은 스타와 함께 울었다. 슬픔이 연민을 넘어 때로 정치화됐다.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 ‘황성의 적’을 부른 이애리수. ⓒ나무위키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 ‘황성의 적’을 부른 이애리수. ⓒ나무위키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꼽히는 ‘황성의 적’과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를 통해 그 사정을 살펴보자. 개성에서 태어난 이애리수(본명 이음전, 1910~2009)는 유년 시절부터 신파극을 했다. 18세 되던 1928년, 극단 취성좌에 입단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단원 왕평과 전수린이 개성의 고려 궁궐터 만월대에서 옛 황성의 흔적을 찾다가 상념에 빠져 만든 노래 ‘황성의 적’을 불렀다.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어 크게 성공했다.

바로 그 무렵 이애리수는 연희전문 학생 배동필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혼인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의 집안은 ‘광대’ 며느리를 들일 생각이 없었다. 1933년 1월, 일이 터졌다. “산골짜기에서 흘러오는 꾀꼬리 소리와 같이 유행 노래 잘하는 이애리수 양이 그의 사랑하는 사람 연전 학생 배동필과 지난 1월9일 밤 세 시 반에 칼모틴을 나누어 먹고 정신을 잃은 후 다시 일분일초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원망하면서 날카로운 칼로 동맥을 끊고 악착스럽게 목숨을 끊었다. 이애리수가 정사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얼싸안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별건곤〉 1933년 2월, ‘이애리수의 정사 소동’).” 다행히 둘은 살았지만 세상이 시끄러웠다. 배동필의 아버지가 이들을 비난했다. 연희전문 학감 유억겸은 크리스천 학교인 점을 감안하면 일반 사회에 미안한 일이지만, “남자가 미혼자인즉… 결혼하여 살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여배우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며 옹호했다. 한데 배동필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이애리수는 정사 시도 직전 〈매일신보〉 주최 직업여성 좌담회에 참석했다. 이전의 극단 동료 남성이 보성전문에 다니게 되자 학생이 여배우나 유행 가수 같은 여자와는 인사할 수 없다며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이애리수의 극단 동무 이경설도 여배우의 애환을 하소연했다. “우리의 생활을 세상에서는 너무나 방종한 생활로만 알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할 줄 알지만, 사실은 세상에 쓰라린 경험이 많아서 진실한 인간미를 알기 때문에 그이가 좋은 이라고만 믿게 되면 어떠한 모험의 일이라도 주저치 않고 실행하고 맙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진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여배우 신일선(본명 신삼순, 1910~1990)은 그 어떤 배역보다 더 굴곡진 삶을 살았다. 오빠의 강압으로 어린 나이에 배우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우연히 나운규의 눈에 띄어 만 열여섯 살에 스타가 됐다. 이듬해까지 영화 일곱 편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열일곱 살에 호남 부호의 아들 양승환에게 시집을 갔다. 오빠가 팔아버렸다. 광대 며느리를 격렬히 반대하던 시어른들의 학대가 이어졌다. 남편은 유부남이었던 데다 미두(쌀 투기)에 빠져 재산을 날렸다.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남편에게 붙잡혀 돌아가야 했다. 결국 7년 만에 갈라지고 영화계로 돌아왔다.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1933)를 비롯해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재기하지 못했다. 한 번 더 결혼에 실패하고 결국 한양권번의 기생이 됐다. 〈삼천리〉 기자가 기방을 찾아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생에까지 나오셨어요?” “다 생활 때문이지요. 부모도 모시고 오빠도 있는 우리 집 살림이 날이 갈수록 기울어지니 연약한 이 몸이라도 생활비 만들 길로 들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삼천리〉 1937년 5월, ‘장한가 부르는 박행의 가인 신일선’).”

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진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던 배우 신일선. ⓒ나무위키
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진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던 배우 신일선. ⓒ나무위키

고달픈 시대의 스타와 팬

“불행에 또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그녀였지만, 다시 배우도 되고 가정부인도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인생에 행복의 문이 단 하나만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둘도 셋도…. 그러기에 앞으로 저도 또다시 한번 행복의 문을 웃음으로 지나는 날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요.” 세 번째 남편을 만났지만 그 후 삶의 사연도 간단치 않다. 1960년대 말 작은 대폿집을 운영하던 그녀를 찾은 미당 서정주의 회고담이 남아 있는데 동정의 묘사가 불편하다. 늘그막에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하고 기독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사적인 상처를 다루는 결례는 이쯤으로 그치자.

무례를 무릅쓰고 이들의 사적인 불행을 거론한 이유는 그 아픔이 시대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례한 시대였다. 그래서 또 한편에는 화려한 스타도 슬프고 위태롭다는 걸 공감하는 팬들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연극계의 스타였던 배우 지경순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비련초〉라는 작품을 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때나 몰리고 학대받고 못나게 천대받다가 죽는 것은 여성인데 그 연극만은 못난이 남자, 심술쟁이 남자, 욕심꾸러기 남자, 체면 모르는 남자를 작은 처녀의 한 몸으로, 이런 덜된 남자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행복하게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 여자분네의 갈채를 많이 받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연극을 하는 중에 관중 속에 소리를 지르는 이가 있었으니까요. 그 소리가 여자의 소리일 적엔 제 마음도 오그라지는 듯이 소름이 쪽 끼치도록 즐거웠습니다(〈삼천리〉 1938년 8월, ‘스타의 고백, 청춘좌의 스타 지경순 양’).”

1933년 1월10일자 〈매일신보〉 기사. 이애리수의 비극적인 사랑을 알리고 있다.
1933년 1월10일자 〈매일신보〉 기사. 이애리수의 비극적인 사랑을 알리고 있다.

우울한 시대였다. 집 없이 떠도는 것이 스타의 삶이었다. ‘타향살이’의 가사를 지은 금능인은 “표박 생활 11년째 되는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황혼의 여관방 창가에서 “까닭 없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다가 노래를 지었다. 멜로디를 붙인 손목인은 “집이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은 우리네 신세! … 몇 날 동안 우는 마음으로 작곡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들은 “어제도 기차를 타고 오늘도 기차를 타고 또 내일도 기차를 타”고 있었다. 청춘좌의 배우 복원규는 “기차 객실에서 늙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이 집 잃은 스타의 삶과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자기 연민에 허우적대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고달픈 시대여서 그랬을 것이다.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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