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콰이강의 다리〉 미국 포스터. ⓒ위키미디어
영화 〈콰이강의 다리〉 미국 포스터. ⓒ위키미디어

멀리서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밀림을 행군하는 장병들이 스코틀랜드 군가 ‘보기 대령 행진곡’을 부른다. 들으면 누구나 아, 하게 되는 익숙한 곡이다. 당당히 행진하며 부대가 들어오는 곳은 타이의 정글 속 포로수용소다. 말레이에서 일본군에 항복한 영국군 포로들이 도착한 것이다. 일본군은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한창 철도를 건설 중이다. 험준한 협곡을 흐르는 강에 열차가 지날 다리를 건설하면서 포로들을 동원한다. 포로들은 기어코 다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완공 날, 영국 특공대가 다리를 폭파한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 이야기다.

〈위대한 유산〉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등을 감독한 데이비드 린이 메가폰을 잡았고, 앨릭 기니스가 영국군 대령 니콜슨 역을 맡았다. 수용소장 사이토 대좌 역을 맡은 일본 배우는 하야카와 셋슈다.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 됐고, 작품상 등 7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영화는 니콜슨 대령과 사이토 대좌의 갈등을 축으로 진행된다. 다리 건설은 난공사였다. 기한 내에 완공하지 못하면 할복해야 하는 사이토가 장교에게도 노역을 강요한다. 니콜슨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장교는 노역이 면제된다며 거부한다. 사이토는 완강히 버티는 니콜슨을 때린 후, 좁고 뜨거운 감옥 ‘오븐’에 가둔다. 니콜슨은 굴복하지 않는다. 공사는 계속 지체되고 결국 굴복한 쪽은 사이토다. 러일전쟁 승전일을 명분으로 사면을 실시하면서 장교의 노역 면제를 약속한다.

이제 니콜슨은 공사의 전권을 요구한다. 다급한 사이토가 동의한다. 니콜슨의 지휘 아래 영국군은 다리 건설에 총력을 기울인다. 기적처럼 다리가 완공되고 고위 인사들을 태운 첫 열차가 도착하는 날, 영국군 특공대가 다리를 폭파하러 온다. 우연히 도폭선을 발견한 니콜슨이 소리치며 특공대에 다가가는 바람에 일본군이 출동하고, 특공대원들이 죽어간다. 열차가 다리에 들어서고 파편에 맞은 니콜슨이 말한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쓰러지는 니콜슨의 몸이 격발장치를 누르자 다리가 폭파되고 열차는 추락한다. 이렇게 영화가 끝난다.

주연 니콜슨 대령 역의 앨릭 기니스가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은 후 그려진 기념 목탄화. ⓒ위키미디어
주연 니콜슨 대령 역의 앨릭 기니스가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은 후 그려진 기념 목탄화. ⓒ위키미디어

포로가 된 영국군이 적군의 다리를 주도적으로 건설한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다. 반발도 나온다. 군의관 클립튼이 항의한다. “대령님, 이건 적에 대한 협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역 행위라고 할 수도 있죠.” 니콜슨이 화를 낸다. “자네 제정신인가, 클립튼? 우리는 전쟁포로야.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저도 압니다, 대령님. 하지만 이렇게까지 잘해야 합니까?” “만약 자네가 사이토를 수술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할 건가, 아니면 죽게 내버려둘 건가? ... 언젠가 전쟁은 끝나게 될 거야. 난 몇 년 후에 그때가 오면 이 다리를 쓰는 사람들이 이 다리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리고 누가 세웠는지를 기억하기 바라네. 노예들이 아니라 군인들이 세웠다는 걸 말이야. 영국 군인 말일세. 그것도 포로가 된 군인.”

카메라가 비추지 않은 참상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적군에게 협력한다는 플롯 탓에 영화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원작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이 쓴 소설 〈콰이강의 다리〉(1952)다. 원작에서는 다리가 폭파되지 않지만(실제로도 폭파는 없었다) 그 외에는 원작과 영화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실화 기반 소설이니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영국군 참전자들의 반발이 격렬했다. 프랑스 작가가 영국군을 깎아내리려고 왜곡했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다리 건설을 지휘한 필립 투시 중령은 그렇게 협력적이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오히려 고의로 작업을 지연시켰다는 증언이 많다. 나무로 된 다리 구조물을 갉아먹도록 흰개미들을 잡아 몰래 집어넣기도 하고, 콘크리트 강도를 일부러 낮추기도 했다는 것이다. 잔인하게 묘사된 수용소장 사이토에 대해서는 또 다른 증언이 나왔다. 실제 인물인 사이토 리사부로 소좌는 수용소 부소장이었고, 포로를 공정하게 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타이 서남부 칸짜나부리에 남아 있는 콰이강의 다리. 상부 구조물은 복원된 것이다. ⓒ위키미디어
타이 서남부 칸짜나부리에 남아 있는 콰이강의 다리. 상부 구조물은 복원된 것이다. ⓒ위키미디어

논란은 이처럼 주로 적군에 대한 협력의 진위 여부나, 인물 묘사의 정확성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게 정말 핵심일까? 실제 역사는 어땠을까? 2011년에 출간된 책 한 권을 주목하자. 영국인 알리스터 어쿼트가 펴낸 〈잊혀진 하이랜더 부대원(Forgotten Highlander)〉이라는 회고록이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애버딘 출신으로 1939년에 지역 부대인 고든 하이랜더스에 징집됐다가 1942년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인물이다. 콰이강의 다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화물선으로 이송되다가 연합군의 어뢰 공격으로 죽을 뻔했으며, 나가사키 인근 탄광에서 노역 중 원폭 투하로 피폭된다. 1919년생이니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그때서야 회고록을 낸 이유가 무엇일까?

“내 이야기는 놀랍지만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일본인들 손에 당한 고통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다. 많은 예전 포로들이 그랬고, 모두 같은 이유에서였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심란한 이야기로 아내와 가족, 그리고 우리 자신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려야 했던 기억이 너무 끔찍했다. 해방이 되자 우리 모두는 영국 정부에 우리가 목격한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나가사키의 원폭 폐허에서 본 것을 밝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제 나는 침묵을 깨고 수만 명의 연합군 포로들에 대한 조직적인 고문과 살인을 증언하고자 한다. ... 이 책을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일본과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가 죄책감을 완전히 인정하고 국민에게 그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을 말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냉전 기간 동안 살아남은 우리들은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는 욕망으로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감아준 영국과 미국 정부에 골칫거리가 되었다.”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자랑삼아 저지른 100인 참수 경쟁을 보도한 〈도쿄일일신문〉 기사. ⓒ위키미디어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자랑삼아 저지른 100인 참수 경쟁을 보도한 〈도쿄일일신문〉 기사. ⓒ위키미디어

어쿼트의 회고록을 읽는 건 고통스럽다. 콰이강에서 포로들은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잔인함, 질병, 굶주림, 죽음이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따라다녔다.” 어느 날 밤 볼일을 보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그를 포로 감시원이 제지한다. “어이, 멋쟁이, 너, 나, 멋쟁이.” 어쿼트는 덮치는 감시원의 아랫도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감시원들에게 맞고 검으로 찔린다. 수용소장에게 성폭행 시도를 고발하지만 소용없다. 죽기 직전까지 고문받는다. 항의하는 영국군 장교는 뺨을 맞는다. 풀려난 그는 그야말로 네 발로 기어간다. 겨우 회복해서 일하다가 이번에는 감시원에게 항의하던 중 개머리판에 맞아 앞니가 부러진다. 콜레라에도 걸린다. 치료 따위는 없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 기적처럼 살아난다. 환자 텐트 안 13명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영화에서 우리가 겪은 고통은 매우 위생적으로 묘사됐다. 영화에서 잘 먹고 지내는 엑스트라들과 달리 우리는 휘파람으로 ‘보기 대령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다. ... 우리는 벌거벗은 맨발의 노예였다. ... 가능한 한 적게 일하다가 가학적인 구타를 당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아껴 써야 했다. 굶주린 배급량으로 배짱을 부리는 건 절대적인 자살행위였다. 우리는 존엄성을 잃은 지 오래였고, 더 빨리 일한다고 해서 존엄성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1943년 타이-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의 철도 공사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 ⓒBBC
1943년 타이-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의 철도 공사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 ⓒBBC

이 철도 건설에 동원된 포로 5만5000명 중 1만3000명이 죽었다.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 타이, 버마(미얀마)에서 징용된 민간인 8만~10만명도 죽었다. 구타와 고문, 처형,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철도를 따라 즐비했다. 영화는 일본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 참상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갈등은 사이토와 니콜슨 사이의 개인적 심리전으로 전개되며, 카메라는 군의 명예와 적에 대한 협력 사이의 우아한 대조에 초점을 맞춘다. 그저 다른 곳을 비추는 방식으로 진실을 바꿔치기한다. 과거의 적을 비판하되 지금의 동맹국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낸다.

가해자이자 피해자, 조선인 포로 감시원

어쿼트를 성폭행하려 했던 자도, 그의 앞니를 부러뜨린 ‘무쏘’라는 별명을 가진 자도 모두 군인이 아니라 포로 감시원이었다. 포로에게 직접 폭력을 휘두른 자들은 대개 이등병보다 아래, 최말단의 이들이었다. 어쿼트는 이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을 잊지 못한다. 잠깐, 조선인이라고? 그렇다. 영화가 감춘 사실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실이 조금 더 남아 있다. 어쿼트의 회고록만이 아니다. 원작소설에서도 포로 감시원은 모두 조선인이다. 사이토의 개인 경비병은 ‘고릴라를 닮은 조선인’이었다. 이 철도공사 현장에서 최대 1000명의 조선인 포로 감시원이 일했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생략했다. 동맹국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여기서도 지켰다.

〈잊혀진 하이랜더 부대원〉의 저자 알리스터 어쿼트. ⓒPress and Journal
〈잊혀진 하이랜더 부대원〉의 저자 알리스터 어쿼트. ⓒPress and Journal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26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가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포로 감시 인력이 태부족이었다. 1942년 5월부터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포로 감시원 역할을 할 ‘군속’을 ‘모집’했다. 후방에서 지원 시설을 만들거나 경비 업무를 담당하고, 보수도 제대로 지급한다며 광고했다.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해서 독려했다. 관이 지목해서 강권하면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동원된 조선인 청년 3223명이 남방 곳곳에서 포로 감시원이 됐다.

종전 후 포로 감시원 중 일부가 B, C급 전범으로 분류됐다. 전범재판을 받은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사형된 조선인 23명 중 14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포로 학대는 중대범죄였으니 죗값을 치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당한 A급 전범은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고작 7명이다. 기시 노부스케처럼 풀려나 총리까지 오른 A급 전범도 있고,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처럼 미국과의 거래로 잘 먹고 잘산 이들도 많다.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194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장면. ⓒ위키미디어
194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장면. ⓒ위키미디어
1947년 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도조 히데키. ⓒ위키미디어
1947년 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도조 히데키. ⓒ위키미디어

1925년 전남 보성의 가난한 소작농집 아들로 태어난 이학래는 열일곱 살이던 1942년, 면사무소의 강권에 군속이 됐다. 콰이강의 다리로 알려지는 타이-미얀마 철도공사 현장에 투입되어 포로를 감시했다.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감시원에게 재량권은 없었다. 포로를 거칠게 다뤘다. 종전 후 체포되어 오스트레일리아 관할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형으로 감형됐다. 1951년, 일본으로 이감됐다가 풀려났다. 일본에 머물며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2017)을 펴냈다. 평생 일본 정부와 싸우다가 2021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4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난 이영길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감시원 노릇을 했다. 종전 후 네덜란드 관할 전범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에 빠졌다. 1950년 일본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된 다음 기억상실증이 악화됐다. 1951년 석방됐지만 후생성이 정신병원에 가뒀다. 그리고 잊혔다. 1991년 8월21일까지 일본 지바현 국립 시모후사 요양소 격리병동 병실에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범으로 처벌받은 고 이학래 동진회(同進會) 회장.ⓒ연합뉴스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범으로 처벌받은 고 이학래 동진회(同進會) 회장.ⓒ연합뉴스

포로 감시원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잘 감시하는지 늘 감시받았다. 잘 때리라고 늘 맞았다. 피에르 불은 〈콰이강의 다리〉에서 이렇게 적는다. “(니콜슨) 대령은 다시 구타를 당했고, 고릴라 같은 조선인은 처음 며칠 동안의 가혹한 체제를 재개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사이토는 감시원까지 때렸다. ··· 죄수뿐만 아니라 간수에게도 권총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중첩된 운명의 희생자였다.

이 무서운 비극의 현장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탈출해서 독립군에 가담했다. 1944년, 인도네시아 자바 수용소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비밀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했다. 1945년 1월, 이활 등이 무기고를 탈취해 봉기를 일으켰다. 12명을 사살하고 3명이 죽었다. 그 도저한 용기를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1945년 7월7일 버마(미얀마) 칼라콘 마을에서 1000명에 가까운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법정에 선 14명의 일본군. 4명이 사형됐고 책임자인 기무라 헤이타로 장군은 도쿄에서 처형됐다. ⓒ위키미디어
1945년 7월7일 버마(미얀마) 칼라콘 마을에서 1000명에 가까운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법정에 선 14명의 일본군. 4명이 사형됐고 책임자인 기무라 헤이타로 장군은 도쿄에서 처형됐다. ⓒ위키미디어

사소한 이야기들도 있다. 어쿼트는 회고록에서 열차에 짐짝처럼 갇혀 이송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떠올린다. 그렇게 또 이송되던 어느 날, 포로들이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게 제발 문을 닫지 말아달라고, 탈출하지 않겠다고, 도착하면 문을 닫겠다고 애원한다. 놀랍게도 그는 문을 닫지 않았다. “우리가 움직일 때 쾌적한 바람이 불었다. ··· 나는 감시원이 문을 열어두는 걸 허락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고, 감시원 중 한 명에게 받은 첫 번째 친절과 동정심을 잊을 수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호의를 베푼 이들이 있었다. 참담한 비극 앞에 작은 호의가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묻게도 된다. 다만 어쿼트가 기억하고 기록에 남겼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됐다. 희망은 어쩌면 여기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슬프게 물어본다.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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