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에게 사할린섬 기행은 사상과 문학 세계를 심화시키는 거대한 체험이었다. ⓒWikimedia
안톤 체호프에게 사할린섬 기행은 사상과 문학 세계를 심화시키는 거대한 체험이었다. ⓒWikimedia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문학 세계는 1890년의 사할린섬 기행을 전후로 나뉘곤 한다. 기행 이전에도 명성이 높았지만, 〈갈매기〉(1896),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0), 〈벚꽃동산〉(1903) 등 그의 희곡 대표작이 모두 이 기행 후에 탄생했다. 사할린은 거대한 러시아제국의 동쪽 끝, 변방의 유형 식민지(Penal Colony·형벌 식민지)였다. 길이 끔찍하던 시절, 모스크바에서 1만㎞나 떨어진 변방을 찾는 것은 고난이었다.

체호프는 1890년 4월21일 모스크바를 출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7월11일 사할린섬에 도착했다. 12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사 카드를 인쇄한 후, 교도소와 유형지 마을들을 방문하여 면접조사를 수행했다. 유형수들의 삶은 매우 열악한 것이어서 기록은 강렬한 폭로가 됐다. 석 달간의 체류 후 10월13일 사할린섬을 출발, 12월8일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베리아의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파리코뮌의 전사였던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를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녀가 머물 곳을 주선하기도 했다(〈시사IN〉 제823호 ‘네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사랑과 혁명의 이중주’ 참조). 잡지 연재분을 묶어서 1895년, 〈사할린섬〉을 출간했다.

사할린은 남한 면적의 4분의 3에 달하는 큰 섬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49만80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83%가 러시아인이다. 그다음으로 3만명(5.5%)에 달하는 ‘한인’이 있다. 아이누인, 에벤크인 등 여러 소수민족도 수백, 수천 명씩 거주하고 있다. 어쩌다 이 섬에 한인이 많이 살게 됐을까?

이 섬에는 아이누, 윌타, 니브흐 같은 종족들이 살면서 나름의 역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청나라와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맺기도 했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한 일본은 이듬해에 러시아와 화친조약을 맺는데, 이때 사할린이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이 됐다. 하지만 홋카이도 개척만으로도 힘이 부치던 일본에게 사할린 영유는 벅찬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1875)으로 사할린은 러시아에, 쿠릴열도는 일본에 귀속됐다.

〈사할린섬〉에 따르면 섬의 서남부 마우카 지역에서 다시마 채취 사업을 하던 러시아 상인 세묘노프 아래 중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이 일하고 있었다. 1897년 최초의 주민조사에 따르면, 주민 2만8000명 중 한인 67명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함경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 중 일부가 사할린으로 건너갔을 것이다(〈사할린 한인의 운명:역사, 현황과 특성〉, 박승의 지음).

사할린과 한반도 간 인연이 깊어진 계기는 역시 러일전쟁(1904~1905)이다. 승전국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함과 동시에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도 영유하게 됐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영국의 대리전을 치렀지만, 러시아에 대한 복수전이기도 했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이긴 일본인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오만방자로 흘러, 국민이 있는 곳마다 함성 개가의 무대에서 고주망태가 된 것처럼 장래의 욕망이 하루하루 증장”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외무상이던 무쓰 무네미쓰의 표현이다. 신명나게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았는데, 러시아가 삼국간섭으로 가로채어 갔다. 일본인들은 이를 갈았다. 와신상담이라는 구호가 일본 국민을 휘감았다(〈러일전쟁의 세기〉,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소화 펴냄).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얻은 남사할린을 아이누식 지명인 가라후토(樺太)로 명명하고 식민정책을 실시했다. 1943년에는 본토(내지)로 편입했다. 식민지 출신 ‘조선인’도 점차 늘어나 1945년에는 2만3000명이 넘었다. 남사할린은 거대한 자원 식민지였다.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다가 1939년 이후에는 대규모로 징용됐다.

가라후토 청사. 일본은 아이누식 지명을 따 남사할린을 가라후토(樺太)라 명명했다. ⓒWikimedia
가라후토 청사. 일본은 아이누식 지명을 따 남사할린을 가라후토(樺太)라 명명했다. ⓒWikimedia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1945년에 2만3000여 명 수준이던 조선인(한인)이 어떻게 21세기에 3만명 수준으로 늘어나 있을까? 이들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귀환을 열망했지만 불가능했다. 소련도 미국도 일본도 그리고 한국 정부도 이들을 방치했다. 수십 년 동안.

사할린 한인이 ‘모국’과 다시 연결된 것은 해방 뒤 45년이 흐른 1990년, 한·소 수교 후였다. 사할린 ‘동포’의 모국 방문이 시작됐고, 1992년부터 1세대를 대상으로 영주귀국 사업이 추진됐다. 2000년부터 수십 명씩 귀국이 이루어지다가 2008년에 조건을 완화하면서 영주귀국자가 대폭 늘었다. 사업이 종료된 2015년 말 현재 모두 4368명이 귀국했고, 사망과 역귀국자를 제외하면 2020년께의 국내 체류 인원은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이산과 귀환’이라는 민족적 수난사의 전형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인, 조선인, 북조선인, 고려인, 일본인, 러시아인 심지어 어느 나라에도 정체성이 귀속되지 않는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이 섬에서 펼쳐진다.

민족의 수난사부터 시작하자. 가미시스카 학살과 미즈호 학살을 주목해야 한다. 모두 1945년 8월15일 항복 선언 직후에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다. 8월17일 가미시스카(현재의 레오니도보)에서 일제 경찰이 조선인 18명을 학살하고, 은폐하기 위해 경찰서는 물론 가미시스카 마을 전체를 방화했다. 8월20일에서 8월25일 사이에는 미즈호(현재의 포자르스코예)에서 일본인 재향군인회와 청년단 회원들이 어린이 6명과 여자 3명을 포함해 조선인 27명을 학살했다. 조선인들이 소련 첩자 노릇을 한다는 의심에 학살을 저질렀다. 미즈호 사건은 소련군 당국의 조사 후 7명이 사형, 11명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가미시스카 사건의 경우 경찰들은 일본으로 탈출하고,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다 방화에 동참한 조선인 한 명이 이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정부는 두 사건에 대해 아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사할린 가미시스카 한인학살사건 I〉, 이원용 지음, 북코리아 펴냄).

소련군이 남사할린으로 들어온 것은 1945년 8월11일이었다. 탈출하려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8월25일, 소련군이 중심 도시 도요하라(현재의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하면서 전투가 끝났다. 항구에 모여든 일본인 피난민들은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6년 12월 미국과 소련은 소련 점령지구 송환에 관한 미·소 협정을 맺었다. 조선인들은 ‘해방 민족’으로서 전범 국민인 일본인보다 먼저 송환되리라고 기대했다. 기대는 배신당했다. 협정은 ‘일본인’만 송환 대상자로 정의했다. 1949년 7월까지 실행된 이 전기집단귀환으로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일본인 31만명이 귀환했다. 해방 당시까지 법적으로 일본인이던 조선인은 버려졌다. 1957년에서 1959년 사이에 후기집단귀환이 이뤄졌다. 조선인 남편과 결혼한 탓에 귀환하지 못했던 일본인 여성 766명과 그 남편 및 아이들 1541명이 이때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인의 귀환은 역시 논외였다. 한국 정부도 이들을 방치했다.

1946~1949년에 대륙에서 사할린으로 45만명이 이주해왔다. 그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 2만606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돌아가지 않고 사할린에 정착해 사할린 한인이 됐다. 대부분 남부 출신이던 한인 사회가 복잡해졌다. 대륙에서 온 이들 중에는 1930년대 말, 일본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며 18만명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던 ‘고려인’도 있었다. 이들은 사할린 한인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고려인과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할린 한인 사이에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고려인 교사들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제 치하에 살았다며 ‘내지치’라고 낮춰 불렀다. 사할린 한인들은 고려인들을 큰땅배기, 얼마우제라고 불렀다. 마우제는 서양인을 낮춰 부르던 중국어 마오즈(毛子)에서 기원한 단어로 러시아인을 얕잡아 부르던 동북 방언이다. 여기에 얼렁뚱땅의 얼을 붙였으니 ‘얼치기 러시아놈’쯤 된다. 역사의 피해자들이 먼 땅에서 서로 불화했다. 고려인들은 1970년대에 대부분 중앙아시아로 돌아갔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남아 있는 한 고려인의 무덤. 이곳은 1937년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해 토굴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시사IN 신선영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남아 있는 한 고려인의 무덤. 이곳은 1937년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해 토굴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시사IN 신선영

사할린 한인의 국적은 어떻게 됐을까? 제대로 살아가려면 소련 국적이 필요했다. 1969년까지 6414명이 소련 국적을 얻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얻은 이도 일부 있었다. 소련 국적을 얻고 나면 귀환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수는 무국적으로 남았다. 1960년대가 되자 러시아화 정책이 강요되면서, 한인학교와 민족문화센터 등이 폐쇄됐다. 그 바람에 2~4세대 한인 대부분은 모국어를 상실했다. 1989년 시점에 사할린 한인의 63%가 모국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1세대 한인들이 사망하고 후세대들이 성장하면서 점차 소련 국적자가 늘고 무국적자는 줄어들었다. 소련인, 러시아인으로 자란 이들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들

1945년 8월16일, 소학교 4학년이던 스다 유리코는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남쪽으로 가서 홋카이도행 밀항선을 타야 했다. 소련 비행기의 기총소사에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며칠을 걸어 도착한 나이로역에서 아버지와 떨어졌다. 모녀는 탈출에 실패했다. 아버지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녀가 오지 않자 사할린으로 돌아와 가족이 재결합했다. 유리코의 부모는 조선인이었다. 가난하고 자식 많은 부모가 갓난아이를 조선인 집에 양녀로 보냈다. 양부모는 엄격했지만, ‘외동딸’을 소중하게 길렀다. 소학교 3학년 때, 동네 언니가 자신이 친언니라고 밝혔다. “네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친엄마고, 네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주머니란다.” 큰언니의 당부대로 친엄마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일본인이 떠난 사할린에서 유리코는 한인 김순애로 살아갔다. 한인학교를 다녔고 일기도 한글로 썼다. 전후 사할린에는 총각, 독신이 된 한인 남성이 가득했다. 전후 혼란기에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이 유행처럼 번졌다. 유리코, 아니 순애의 남편이 한인인 것은 당연했다. 나중에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은 폭력을 휘둘렀다. 1남 2녀를 낳아 기르는 아내에게.

1957년부터 시작된 후기집단귀환 때 탄원서를 보내 가족 전원의 귀국 허가를 받았다. 장남이 중병에 걸려 데려갈 수 없게 되자 귀국을 포기했다. 196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에 아홉 살 장남도 죽었다. 양부모마저 병석에 누웠다. 그때 순애는, 유리코는 정말 죽고 싶었다. 아홉 달 된 막내를 다섯 살 딸에게 맡기고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30년간 쉬지 않고 일했다. 소련 정부의 ‘근속공로기장’을 받은 그녀다.

사할린 한인 김순애, 아니 일본인 유리코는 기적적으로 고국의 큰언니와 연락이 닿아 우여곡절 끝에 1996년 영주귀국했다. 이후 사할린 일본인 여성의 영주귀국 사업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사할린 잔류자들〉, 현무암·파이차제 스베틀라나 지음, 책과함께 펴냄).

1994년 4월, 사할린 동포 46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영주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4년 4월, 사할린 동포 46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영주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1957~1959년의 후기집단귀환 때에도 귀환하지 못한 일본인이 적잖았다. 대부분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들로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귀환을 포기했다. 러시아인과 재혼하거나 직장을 다니며 일본, 한국, 러시아 세 가지 이름을 갖게 된 경우도 적잖다. 이들의 자녀, 손주 세대는 세 가지 정체성 속에서 살아간다. 홋카이도에서 열리는 일본인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의 가족 모임에서는 곧잘 ‘아리랑’이 불려진다. 이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대학에 재직하던 시절, 학술대회에서 한 마지막 발표 제목이 ‘귀환 사할린 동포를 통해 보는 국민국가 한국’이었다. 2019년 6월25일, 사할린주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가가린 호텔에서 열린 제7회 시베리아 연구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논문 준비 중에 사할린 사범대 한국어교육과 창립자이자 영주귀국자인 박승의 선생을 찾아뵈었다. 고향을 어디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처럼 해방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은 한국을 조상의 땅이 아니라 ‘조국’으로 여긴다고 대답했다. 반면 3, 4세대에게는 사할린이 고향이고 러시아가 조국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소련-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차별받으며 살았지만 소련의 발전에 기여한 데 자부심을 느끼고, 그 혜택을 받은 것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조국에서 펴낸 책의 제목은 이렇다.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

사할린 ‘한인’들의 삶을 그저 극소수 예외 사례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국민국가에서 태어나 단일민족으로 자라는 삶이 당연한 정상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이 만들어지기 위해 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폭력이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쾌한 결론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이 아닐까?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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