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면 일기장 맨 앞에 다짐 혹은 소망을 한 줄로 적는다. 나만의 새해맞이 의식인데 그것도 언젠가부터 시들해졌다. 해마다 실천하지 못한 전년의 다짐을 되풀이하자니 맥빠질 수밖에. 한데 세밑에 만난 책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 덕분에 새해 새 소망이 생겼다. 가슴이 뛴다.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는 아일랜드 출신의 식물학자이며 의학생화학자인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가 자신의 삶과 자신을 키운 켈트 문화, 그리고 50여 년간 연구해온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 자전적 에세이다. 저자는 열두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사연부터 나무의 비밀스러운 작용과 효능, 이제는 사라진 고대 켈트 문자(오검문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백하고 유려하게 풀어낸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책에 매료된 건 아니다. 오히려 몇 번이나 책을 덮으려 했다. 글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삶이 너무 낯설어서였다. 영국 귀족 가문의 아버지와 아일랜드 왕가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여덟 살에 이미 나무들의 라틴어 학명을 줄줄 외울 정도로 탁월한 지능의 소유자였으니, 여러모로 나 같은 범인은 공감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가 겪은 불행도 상상 이상이다. 일곱 살 무렵 부모가 이혼하고, 몇 년 뒤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그 소식에 “나쁜 새끼가 죽었군!” 하고 웃었던 어머니마저 얼마 안 돼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고아가 돼 악명 높은 막달레나 수용소에 갇힐 뻔하다 간신히 삼촌과 살게 되지만 지독한 무관심으로 밥도 못 얻어먹고 쓰러진다.
소설이 아니고 실제 겪은 일이란 게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뜨악했던 마음이 바뀐 건 저자가 어머니의 고향 리쉰스 계곡에서 만난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면서부터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녀를 보듬고 가르침을 베푼 어른들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순한 마음이 되어 낯선 삶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일단 마음을 열자 눈부신 신세계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신세계는 소박하면서도 심오한 아일랜드 고유의 켈트 문화다. 리쉰스의 늙은 여성들은 “고아는 모두의 자녀”라는 고대 법에 따라, 어린 다이애나를 “자기를 돌보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춘 성인 여성으로 자랄 수 있도록” 모두가 선생님이 되어 가르친다. 저자는 수십 명의 할머니 선생님들에게서 식물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활용법을 배우고, 게일어와 버터 제조법은 물론 “삶의 고통을 견디고 자기 몸과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계곡에서 부엌에서 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진 교육,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 배운 가르침은 평생의 자산이 된다. 어느 날 늘 유쾌하던 친척 아저씨가 트랙터가 없어서 곤란해하는 것을 본 저자는 함께 보리 베기에 나서는데,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던 밭일을 마침내 끝낸 그날의 ‘현장학습’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아이가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절대 끝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길로 자기를 내던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신세계는 그가 평생 연구한 나무의 세계다. 식물학과 의학생화학을 전공한 저자는 켈트족의 지식을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독창적 연구를 통해, 세포조직의 이상을 판별하는 데 활용하는 ‘생물 발광 현상’을 발견하고 ‘유전자 스미어링 기법’과 인공 혈액 ‘무기질 혈색소’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둔다. 식물이 번성하면 바다 생물도 풍부해진다는 그의 가설은 훗날 일본 연구진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는데, 이 모든 것은 나무와 나무, 나무와 사람, 나무와 모든 생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오랜 믿음의 소산이자 증거다.
“배웠으면 나눠야 한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고대의 믿음을 그가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학계의 성차별과 편견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구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실이 아닌 숲에서 직접 나무를 심고 생태를 관찰함으로써, 죽은 나무에 깃든 정교한 균류를 발견하고, 버드나무를 죽인다고 알려진 수액빨이 딱따구리가 사실은 병원체로부터 정원을 지키는 맵시벌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나아가 나무도 인간의 뇌와 똑같은 화합물을 갖고 있다는 걸 밝혀내고, “나무도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신경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확언한다.
과학이 다 밝혀내지 못한 나무의 무궁한 능력을 확신하는 저자는, 무차별한 벌목과 지구 환경 변화로 고통받는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북미 약용식물 탐방로를 만들고, 사라져가는 희귀종 나무를 자신의 농장에서 키우고, 지구 곳곳을 탐색하며 숲을 지키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절박한지, 전 세계에 단 한 그루만 남은 ‘프텔레아’를 수년간 찾아 헤매다 마주한 그가 나무를 감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내가 마주한 세 번째 신세계는 놀라운 희망의 세계다. 어린 시절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음에도 저자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와 후견인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보듬은 어른들의 가르침에 감사하고, “배웠으면 나눠야 한다”라며 지식에 따른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다. 그는 당면한 기후위기 앞에서 자포자기하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맞서 싸우자고 독려한다.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이다. 3억 년 전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환경을 인류가 살 수 있게 바꿔놓은 존재가 나무였으니 한 사람이 해마다 한 그루씩 6년 동안 나무를 심으면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다고, 한 뙈기의 땅도 없다면 화분에라도 나무를 심어 밖에 내놓자고 그는 말한다.
어떤 고난에도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스승 덕에 새해 소망이 생겼다. 나무를 심겠다, 나도 나무처럼 푸르게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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