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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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잡지 〈네이처〉의 최초 여성 편집장이자 유전학자인 막달레나 스키퍼는 얼마 전 한국에서 열린 포럼의 기조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120년간 노벨 과학상 수상자 600여 명 중 여성은 23명뿐이다.”(〈여성신문〉 10월19일자) 헉! 올해는 역대 세 번째 여성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을 비롯해 물리학과 생리의학상, 평화상을 여성이 수상했기에 젠더 편향이 이리 심한 줄 잠시 잊고 있었다. 노벨상이 전부는 아니지만 지식 문화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임은 분명하다. 이 기준이 그토록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현실이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이고 과학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편향이 과학에 왜 문제가 되는가? 스키퍼 왈, “더 다양한 연구자들이 연구에 참여할수록 더 다양한 질문이 나올 수 있고 같은 질문도 방식이 다를 테니까요.”

한마디로 과학계의 여성 차별은 공평함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번 소개한 〈과학의 반쪽사〉에서도 보았듯이 서구의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과학사는 비서구, 유색인,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과학이 근본적으로 협업의 산물이란 사실을 지워버린다. 교류와 협력 대신 경쟁과 독점이 강조될 때 과학의 발전 가능성도 인류의 삶도 축소, 왜곡된다. 실상이 궁금하다면 카트리네 마르살의 〈지구를 구할 여자들〉을 보시길. 젠더 편향이 과학 발전을 얼마나 저해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기술 발전의 역사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수많은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혁신을 방해하는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제목만 봤을 땐 여자가 독수리 5형제도 아니고 어떻게 지구를 구하나 싶었는데 읽어보니 이해가 된다. 여자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지구를 구한다는 게 아니다. 여성을 배제한 역사가 지구의 거의 모든 생명을 죽음 직전으로 이끌었으므로 지구를 구하려면 이 편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책의 원제는 ‘발명의 어머니’다. 저자는 이 어머니를 일찌감치 대접했다면 오늘날 지구가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기차다. 책에는 놀라운 사례가 많은데, 자동차를 최초로 장거리 운행하고 브레이크 패드를 발명해 이 신기술을 상용화시킨 이가 여성이란 사실도 그중 하나다. 더구나 초창기 자동차엔 휘발유, 증기, 전기 등 다양한 연료가 쓰였고 전기자동차가 3분의 1이나 점했다니, 놀랍다. 요즘 신기술로 각광받는 전기차가 실은 100년 전에 유행한 ‘오래된 미래’였던 것.

한데 왜 이 기술은 잊히고 휘발유 차가 대세가 됐을까? 휘발유 차는 시동을 걸기 힘들어 힘센 남성들의 차로 인식된 반면 전기차는 ‘여성스럽다’고 여겨져서다. 그래서 전기차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1900년대 초 도시를 누비던 전기 소방차·택시·버스와 전기차 대여 네트워크도 함께 사라졌다. 전기차와 더불어 카 셰어링이라는 또 다른 미래가 닫힌 것인데, 개인 소유 휘발유 차가 대세가 되면서 나타난 오늘의 위기를 보면 젠더 편향의 후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볼테르는 “여성 학자도 여성 전사도 있었지만 여성 발명가는 없다”라고 했다.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성 발명가를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 기술이란 ‘자연을 정복하는 도구’라고 보는 시선 탓이 크다. 역사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철기로 발전했다는 통설은 채집한 먹을거리를 담아 보관하고 조리하는 토기의 기술력을 삭제한다. 이는 사냥용 무기로부터 기술이 시작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보는 남성중심적 정복 서사의 반영이며, 전쟁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식으로 전쟁을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다른 질문이 새 세상을 발명한다

〈지구를 구할 여자들〉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 김하현 옮김 / 부키 펴냄
〈지구를 구할 여자들〉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 김하현 옮김 / 부키 펴냄

그러나 우주 탐사에 바느질과 종이접기 기술이 필수적이었듯 ‘커다란 기계’를 만들거나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만이 발명이고 기술인 것은 아니다. 일상의 불편을 덜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른바 ‘여성적’ 기술도 많다. 장애 여성인 아이나 비팔크가 만든 보행 보조기가 노인들의 일상에 가져온 역동적 변화를 보라. 하지만 세상은 이런 기술 발전을 지원하지 않는다. 금융은 독점을 추구하는 남성 창업가를 지원하고, 그 결과 “빠르게 움직이고 깨부숴라”라는 모토를 내건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성공한다. 시장은 “돌봄·치료·도움·보존”이 아닌 “짓밟고 지배하기” 위한 경쟁 터로 여겨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이 말한 ‘탐욕스러운 일’에 내몰린다.

골딘은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통해 성별 임금격차의 핵심 원인이 ‘탐욕스러운 일’임을 밝혔다. ‘탐욕스러운 일’을 크게 보상하고 돌봄노동처럼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여성적’이라 폄하하는 경제구조엔 미래가 없다. 기후위기와 낮은 출생률이 그 증거다. 닫힌 미래 앞에서 어떤 이들은 기술적 해결책을 낙관하고 어떤 이들은 기술의 독주를 막을 수 없다며 절망한다. 전혀 달라 보이지만 마르살은 둘 다 기술에 대한 관점은 똑같다고 지적한다. (남성) 천재의 뇌에서 발명된 기술이 인류를 이끌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기술관은 인간과 자연을 대상화하고 수동적으로 만든다. 기술의 지배도, 그에 기초한 불평등한 경제구조도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르살은 “언제나 대안이 있다”라고 말한다. “경제를 어떻게 조직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아는 이 인간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미래에 발생할 경제 문제는 여자아이들이 코딩을 배우라고 격려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들이 타인을 돌보라고 격려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다른 질문은 다른 이야기를 낳고 새로운 세상을 발명한다.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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