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소설가 현진건은 “몹쓸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했는데, 백 년이 지난 지금 사회는 개명해서 술 대신 자꾸 책을 권한다. 정부가 앞장서 역사·이념 논란을 부추기니 시민 노릇을 하려면 책을 찾아볼 수밖에. 지난봄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 제삼자 변제안을 내놓았을 땐 역사적·법적 근거를 확인하려 관련서들을 읽었다. 하지만 변제안이 법원의 결정으로 막힌 뒤에도 정부가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 대신 오히려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위상을 문제 삼고, (오로지 독립군 토벌이 목적인)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의 친일 행적을 부정하며 논란을 만드는 걸 보니, 낱낱의 사실(史實)을 따지기보다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정리하는 게 나을 성싶다.
전쟁사·외교사로 유명한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권민 옮김, 공존 펴냄)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어젠다에 맞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에 분개해서 쓴 책이다. 그는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악용한 여러 사례를 언급하면서, 역사가의 역할은 현재를 잣대로 과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 마이클 하워드가 말했듯 “국가의 신화에 도전해 그것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언명한다. 그는 “역사는 우리에게 명료한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라면서, 역사란 “어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 가능한 최상의 설명을 도출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하나의 가치, 하나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퍽 실망스러운 대답이리라.
최근 출간된 역사학자 최호근의 〈역사 문해력 수업〉은 요즘처럼 “누구나 역사를 말하는 시대에 과거와 마주하는 법”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책은 ‘실용 만능 시대에도 역사를 찾는 이유’로 시작해, 역사란 무엇이며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다른지, 객관적 역사가 가능한지, 이를 위한 역사학적 방법론은 무엇이며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봤을 29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다룬 2장이다. 최호근은 여기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사실 분석과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중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동상의 한 주인공인 한국전쟁 영웅 심일에 관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심일은 전쟁 초기 춘천 전투에서 육탄으로 북한군 탱크를 파괴한 호국 영웅으로 알려져 있는데, 2016년 그의 전공(戰功)을 부인하는 이대용 장군의 증언이 보도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이 장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교였고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기에 그의 증언은 남다른 무게를 갖고 있었다. 국방부는 사실 확인에 들어갔고,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 군사연구소가 이견을 보이며 대립하자 결국 공적확인위원회를 구성해 심일 소령의 공적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저자는 이 모든 과정과 거기서 불거진 의혹들을 꼼꼼히 분석해 국방부의 최종 보고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군 내부의 진실 공방은 문제가 아니라 군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사실 확인이 어려운 상태에서 서둘러 닫힌 결론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비판한다. 다른 의견, 다른 역사를 분열로 보고 배제하는 단선적 시각과 달리, 그는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려면 문자 기록뿐 아니라 유물, 유골, 구전, 증언 등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삶도 오늘 우리네 인생처럼 얽히고설킨 다층적인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자 투쟁의 산물
삶은 정답을 찾기 힘든 질문들의 연속이다. 이 복잡 미묘한 삶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요 역사가의 일이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는 두 세계의 경계에서 최선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념이 진실을 자임할 때는 더욱 그렇다. 교조적 이념은 삶에게 어느 편이냐, 예와 아니요 둘 중 하나로 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헬레나 로젠블랫의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김승진 옮김, 니케북스 펴냄)는 그런 이념조차 하나로 정의되지 않으며 계속 유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사상으로 여겨진다. 하나 고대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자유주의란 말의 변천사를 추적한 로젠블랫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 ‘앵글로-아메리칸 자유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만들어진 개념이며 원래 자유주의는 “공공선”을 위한 기획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철학자 존 듀이가 “미국의 자유주의는 자유방임과는 전혀 다르다”라면서 정부 개입을 인정하는 인도주의적 자유주의를 주장한 데서도 드러난다.
요즘 유행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19세기 노동자 투쟁의 산물이며 그 핵심은 사상과 출판의 자유란 사실도 흥미롭다. 그 자유민주주의가 백 년 사이에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뜻하는 이념으로 변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와 도덕을 옹호”해왔고 그래서 ‘자유사회주의’란 이념이 유행하던 시대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삶이 그렇듯 역사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역사적 사고란 “생성과 변화에 관해 생각하고, 생성의 추이와 변화의 의미를 반추하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오직 한 가지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내 삶이 역사이고 그 역사는 내가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니, 이만하면 일희일비하지 말고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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