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한성원 그림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고 백남준에 대해 전혀 몰랐구나 싶었다. 알려고 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TV에 알 수 없는 영상을 띄우는 그의 작업을 나는 세상과 동떨어진 예술지상주의로 여겼다. 특히 조지 오웰의 비관적 전망에 딴지를 거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1984년 당시 날마다 (‘땡’ 하는 시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력 각하는’으로 시작하는) ‘땡전 뉴스’를 보던 입장에선 희망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한 쇼일 뿐이었다. 한데 영화를 보고 소통을 향한 그의 열망과 시대를 앞선 예리한 시선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 시대의 어둠을 전망하며 고민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길 위에 김대중〉을 보고도 비슷했다. 김대중에 대해선 나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대화와 타협을 중시한 의회주의자였다는 걸 나는 몰랐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한창일 때,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를 전면 반대하던 야당과 달리 회담에서 더 나은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비타협의 투사인 줄 알았는데 현실적 조건에서 차선을, 때론 차악까지 고려한 실용주의자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의 진면목을 알고 싶어 1950년대부터 죽기 전까지 그가 남긴 말글을 모은 〈김대중의 말〉을 읽었다. 방대한 자료를 500쪽도 안 되는 한 권의 책으로 축약해놓은 것이라 아쉬움은 있지만 짧은 시간에 그의 사상을 일별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말글이 나온 배경이 궁금할 때는 〈김대중 자서전〉 작업을 함께한 김택근이 쓴 평전 〈새벽〉(사계절, 2012)을 뒤적였다.

반세기에 걸친 문장을 보며 놀란 건 그의 정치적 비전이 정치 입문기부터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954년 글에서 그는 경제발전이 곧 민생 안정은 아니며 부의 편중을 막는 경제부흥, 전 국민의 복리 증진을 위한 사회복지 제도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없이는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는 후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왜 민주주의를 안 하면 실패하는가?”에 대해 1991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국민의 변화된 욕구를 알 수 있는, 그래서 “자기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를 예로 들며, 독재가 단기적으론 경제를 성장시킬지 몰라도 결국은 실패한다고 확언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란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닌 신념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이범석의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계열)를 비판한 1955년 글이다. 그는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는 족청계의 ‘민족·국가 지상주의’에 대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반동적 언사라고 비판한다. 식민과 전쟁의 그늘이 깊던 시절에도 민족과 국가를 내세운 배타적 민족주의에 단호히 반대했던 것. 이런 시선은 이후 더욱 확대되어, 민족·국가는 물론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모든 자연 존재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새로운 민주주의’(1982년 옥중서신)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 들어 ‘지구적(global) 민주주의’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앤서니 기든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지금은 지구가 존재하느냐 못 하느냐”가 문제이므로 ‘코스모폴리탄’이란 인간 중심적인 말 대신 “‘지구’라는 말을 강조할 때”라고 주장한다. 기후위기 의제가 본격화되기 전인 1993년의 일이다.

미래의 전자혁명을 말하던 ‘1981년 사형수’

백남준처럼 김대중도 미래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는데, 1981년 사형수였던 그가 감옥에서 정보부 수사관에게 미래의 전자혁명에 대해 얘기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가 수사관에게 열띤 어조로 미래를 이야기한다. “가정마다 텔레비전 세트가 있어서 ‘세종대왕이 몇 해에 돌아가셨지?’ 그러면 거기서 ‘몇 해요’ 하고 대답해주는 이런 시대가 돼요.” 그러면서 인간 노동이 중요했던 시대가 가고 우리도 그 영향을 받게 되니 전자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의 인터넷, AI 시대를 일찌감치 예견한 셈이다.

한데 선견지명보다 내게 더 놀라웠던 건 미국에서 그가 한 말들이다. 신군부에게 떠밀리듯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각계 인사들을 만나고 777일간의 망명 생활 중 150여 차례나 강연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호소했다. 읍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였다. 1983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는 해방 이후 역사를 개관하며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해 한국 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양심수를 후원하는 앰네스티 미국 활동가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한국은 물론 세계 도처에 양심범이 왜 생기는가, 그 원인의 일부분은 미국 정부의 독재 지원”이니 “당신들은 미국의 주권자로서 잘못된 독재 지원을 시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주기” 바란다고 일갈한다.

그 말들을 보며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단지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이끈 지도자여서가 아니라 전 세계, 전 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했기에 세계가 경의를 표했음을 알았다.

영화를 보고 그에 관한 여러 책들을 섭렵하면서, 그가 남긴 자료의 방대함에 비해 그에 관한 연구가 부족함을 실감했다.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그와 당대 역사에 관한 정확한 앎에서 가능할 것이다. 정치 혐오를 자랑으로 여기고 부추기는 이 시대에, 자신의 비전을 갖고 그처럼 더러워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한 정치인이 갖는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그 시작이다.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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