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사
정병준 지음, 돌베개 펴냄

“기억된 일보다 기억되지 않은 일들이 더 중요하고 결정적이었다.”

미 해군 소령 의무관인 조지 월리엄스란 무명인이, 해방 직후 남한을 통치했던 미군정의 실세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는가. 귀축영미(鬼畜英米)를 외치던 친일파들이 하루아침에 친미파로 변신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그 변신을 가능케 했던 ‘비결’에 대해 아는 사실이 있는가. 또한 미군정은 미국 정부의 신탁통치 지침을 따르지 않고 자기 영향력 밑의 과도정부를 비밀리에 출범시키려 했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인 ‘해방 직후’는, 지금도 정치적 입장에 따른 왜곡과 자료 부족으로 미스터리 영역이 많은 시대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오랫동안 축적한 연구 성과와 새로운 자료, 역사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해방 직후사를 규명한다. 조선총독부, 좌익과 우익, 미군정 등 다양한 주체들이 얽히고 투쟁하며 현대 한국의 시작을 직조한, 흥미롭지만 비통한 드라마를 관람할 기회다.

몰락의 시간
문상철 지음, 메디치 펴냄

“‘안희정의 몰락’을 ‘개인 안희정의 몰락’으로만 여겨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약 7년 동안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비서 문상철씨는 안 전 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김지은씨 편에 서서 증언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미투 사건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어 “안희정 몰락의 진실을 통해 본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속성”에 대해 쓴 책이다. 그는 정치의 시작, 본질, 현실, 변질, 몰락, 끝까지 총 6장에 걸쳐 당시 기억을 복기하며 “정치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서사가 도움이 되기 바란다”라고 적었다. 이 책의 인세 수익 전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4321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열린책들 펴냄

“그리하여 책의 제목이 정해졌다. 4321.”

미리 말해야겠다. 책이 총 두 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합쳐서 1500쪽이 넘는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두꺼운 이유가 있다. 주인공 아치 퍼거슨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인생이 달라지는데, 그렇게 가능한 삶의 시나리오 네 가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평행우주’ 네 개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500쪽도 좀 짧게 느껴지는데, 주인공이 태어나서 20대를 보내는 시기까지만 다룬 게 이 정도 분량이다. 출판사에서 친절하게도 ‘폴 오스터 가이드북’이라는 얇은 책자를 하나 끼워 넣었다. 챕터마다 각각의 ‘평행우주’를 정리해가면서 읽을 수 있다. 여전히, 책으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동경일일
마츠모토 타이요 그림, 이주향 옮김, 문학동네 펴냄

“나는 네 만화를 정말 좋아해.”

‘만화가들의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마쓰모토 다이요)의 만화다. 오랫동안 일한 잡지사를 그만두는 날, 통근 열차에서 자신이 지난 30년 동안 몇 시간이나 이 열차를 탔는지 셈하는 만화가 시오자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얼핏 처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오자와는 포기하지 않는다. 동료 만화가, 편집자들을 만나 다시 한번 열정을 불태우려 한다. 2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풍선이 찡하다. “죽을 힘을 다해 그리고 모든 걸 쏟아붓는다면… 설령 졸작으로 끝난다 해도 그걸로 충분하잖아.”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우직하다면 우직한 위로가 마음을 채운다. ‘3권으로 계속’이라고 적힌 마지막 칸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감춰진 언론의 진실
양상우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경제학이 언론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셈이다.”

언론을 경제학으로 이해한다? 썩 와닿지 않는 말 같지만 경제학이 의사결정, 즉 선택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좀 달리 보인다. ‘뉴스의 생산과 공급, 소비의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선택과 그 영향을 이해한다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 출신으로 〈한겨레〉 대표이사를 지낸 저자가 경제학이라는 렌즈를 이용해 한국 언론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한국 언론의 위기가 취재 관행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 뉴스 시장이라는 물질적 토대와 경제적 환경의 변화가 원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언론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와 학문적 성과를 모아 소개하는 최초의 단행본으로 사전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친절한 설명이 강점이다.

기호와 탐닉의 음식으로 본 지리
조철기 지음, 따비 펴냄

“커피 한 잔의 가격 중 커피 재배 농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1%도 되지 않는다.”

이 책의 의의는 뚜렷하다. 한국인 학자가 글로벌 식품 생산과 소비의 사슬 구조를 들여다보고 정리했다. 이런 유의 정보를 주로 서구권 저자의 번역서에 의존해왔던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다. 지리학자인 저자는 사탕수수와 설탕, 기름야자와 팜유, 차나무와 홍차, 포도와 와인, 카카오와 초콜릿, 바나나, 새우 등 7가지 식품을 사례로 든다. 이 식품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에서 소비된다. 이들 식품의 생산과 소비의 경로를 좇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권, 환경, 동물권, 공정무역 같은 키워드를 만나게 된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무역구조에서 대규모 농장만이 가격경쟁에서 살아남고, 소규모 농가는 몰락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적어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먹거리를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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