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모니터링을 하다 머리에서 김이 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세운 가설이 틀린 걸 알게 될 때가 그중 하나다. 언론을 비평하는 우리도 인간에 불과하고 언론 문제는 반복되다 보니 고정관념을 갖고 접근할 때가 있다. ‘요즘 A 주제의 선정적 기사가 많은 것 같은데 주류 언론도 썼겠지?’ 살펴보면 막상 아닌 경우가 있다. ‘정권 비판하는 B 주제의 기사는 이런 언론사에선 안 쓰지 않았을까?’ 웬걸, 쓰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블랙스완’을 발견하면 나는 하려던 비평 주제를 엎어버린다. 수집해놓은 데이터들도 삭제해버린다. 김이 나지만 어쩌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식의 ‘답정너 비평’으로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고 어느 언론도 변화시킬 수 없다.
또 어려운 점은 하나의 기사만으로 어딘 잘못했네, 어딘 잘했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의 경우 어느 면 머리기사로 누군가의 일방적 주장을 실었더라도 바로 아래에 당사자 반론을 싣거나 다음 면, 또는 다른 날 지면에서 다루기도 한다. 이럴 땐 본문의 양이나 쓰인 단어를 가지고 비교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 또한 마찬가지다. 보도 순서나 쓰인 이미지까지 대봐야 정확한 비평이 나올 때가 있다. 뉴미디어, 멀티미디어 시대에 기자들도 고생이지만 언론 비평하는 이들도 고되다. 단순히 지면이나 전파에 오른 기사가 아닌, 포털용 온라인 기사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그것까지 꼼꼼히 봐야 언론을 비평할 수 있다.
지난 11월14일 박민 KBS 사장이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고 “KBS 뉴스의 불공정 편파 보도에 사과드린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고 장자연씨 사건 관련 윤지오 인터뷰’ ‘채널A 검언유착 녹취록 보도’ ‘오세훈 서울시장 내곡동 토지 보상 보도’ ‘〈뉴스타파〉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 인용 보도’를 해당 사례로 꼽았고, 당일 〈뉴스9〉 ‘보도 공정성 훼손 대표적인 사례들은?’이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반복해 소개됐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 이름을 뜻하는 ‘바이라인(By Line)’은 해당 리포트에 없었다. 온라인판 기사 본문에도 아무 내용이 없다.
당시 KBS 보도 살펴보니…
다른 사례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윤지오씨 인터뷰에 대해서는 ‘답정너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범죄와의 연관성이 높은 해당 주제는 내 관심 사안이었는데, 당시 KBS가 윤지오씨 입장만 실어준다거나 장자연 사건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2019년 5월 말, 3월부터 석 달간 지상파 3사와 종합편성채널 4사 저녁 메인뉴스를 모니터링해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KBS는 장자연씨 10주기 당일 윤지오씨를 인터뷰한 것 외엔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진상조사단에 출석한 날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린 날도 KBS는 관련 보도를 하지 않았다. 고 장자연씨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2018년 MBC 〈PD수첩〉에 출연해 ‘수사에 〈조선일보〉 외압이 있었다’고 말해 〈조선일보〉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재판이 열려 조 전 청장 증언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KBS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지난해 대법원은 2012년 MBC 파업을 정당한 쟁의행위라 판단하며, 방송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쟁의행위의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방송의 공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떠한 내용의 방송이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방송의 공정성은 방송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방송의 제작과 편성 과정에서 구성원의 자유로운 의견 제시와 참여하에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밖에 없다.” 나야 보고서를 엎으면 그만이지만, 그걸로 대국민 사과도 하고 바이라인 없는 기사도 내보낸 KBS 사장은 뒷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보도 공정성 훼손 사례 몇 가지를 들었지만 그 행동 자체가 공정성 훼손이다. ‘답정너 비평’의 결말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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