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KBS 사장이 11월14일 기자회견에서 임원진과 함께 대국민 사과를 했다. ⓒ연합뉴스
박민 KBS 사장이 11월14일 기자회견에서 임원진과 함께 대국민 사과를 했다. ⓒ연합뉴스

박민 KBS 사장 취임 이후 〈뉴스9〉의 기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새 사장이 취임한 11월13일부터 22일까지 박장범 앵커의 첫 리포트를 살펴보면 국방·안보·외교 이슈가 가장 두드러진다. 바로 전주에 ‘노란봉투법’ 관련 소식이 세 차례나 첫 리포트로 오른 것과 대비된다. 행정전산망이 마비돼 전국적으로 민원서류 발급이 중단된 11월17일엔 방송사 메인 뉴스 가운데 KBS만이 유일하게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APEC 정상회의를 첫 리포트로 조명했다. 11월20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당선된 밀레이 대통령에 대해서도 MBC·SBS·JTBC·TV조선 등은 ‘극우 괴짜’ ‘극우’로 표현한 반면 KBS는 ‘우파’로 설명한 점도 달랐다.

KBS의 대대적 인적 개편이 이루어진 가운데 감지되는 변화 중 하나다. 당장 용어부터 달라질 전망이다. KBS에서 10년 이상 일해온 A 기자는 “편집회의에서 ‘노란봉투법’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라고 전했다. 노조법 2·3조 개정안을 친노동적으로 접근한다는 이유다. 또 관례적으로 써온 ‘한·중·일’ ‘북·미’ 등의 표기를 ‘한·일·중’ ‘미·북’ 등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표현은 9월6일 아세안+3국 정상회의 당시 대통령실이 “미국과 일본과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라며 쓰기 시작한 방식이다. 또 다른 10년 차 이상 B 기자는 달라진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5년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을 때도 KBS 내부에서 ‘물대포’ 대신 ‘물줄기’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현 수뇌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새 사장 임명과 더불어 프로그램 결방 및 폐지, 진행자 교체도 숨 가쁘게 이뤄졌다. 개편의 타깃이 된 건 모두 시사 프로그램이다. KBS 사장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편파 방송’이라 지적한 KBS1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가 폐지되고 〈뉴스9〉의 이소정 앵커가 박장범 앵커로 교체되었다. 박 앵커는 문재인 정부에서 해임된 고대영 사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바 있다. 시사 프로그램 〈더 라이브〉는 11월13일 당일 편성표에서 빠졌다. 수년간 프로그램을 맡아온 진행자들은 시청자에게 고별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하차했다. 11월17일 〈열린토론〉에서 하차한 정준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는 “KBS의 행태를 놓고 비평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라며 이유를 밝혔다.

시사교양국 C PD는 〈더 라이브〉 폐지에 대해 “‘하루아침’이라는 표현도 무색할 정도”라고 말했다. “정규 방송의 긴급 결방과 폐지가 기습 작전하듯 결정되었다. 러닝타임을 5분 늘리거나 줄일 때도 사전 협의를 거치는데 단 한 차례 항의 방문한 것 외에 제작진이 어떤 논의 구조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편성본부 측은 ‘KBS2 TV와 맞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더 라이브〉는 KBS 시사 프로그램 중 시청률도 높은 편인 데다 한국갤럽이 11월20일 발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 4위에 올랐다. KBS 프로그램 가운데 1위다.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상황인데, 일방적 통보로 제작진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트라우마로 인해 상담을 받는 이들도 있다(C PD).” 프리랜서 제작진 20여 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박민 사장이 지목한 ‘KBS 불공정 편파 보도’ 사례가 11월14일 〈뉴스9〉에서 4분 동안 보도되었다.ⓒKBS 화면 갈무리
박민 사장이 지목한 ‘KBS 불공정 편파 보도’ 사례가 11월14일 〈뉴스9〉에서 4분 동안 보도되었다.ⓒKBS 화면 갈무리

정권이 바뀔 때마다 KBS 내부가 흔들린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KBS 이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KBS 이사회를 여권 우위로 재편한 뒤 사장을 교체하고 방송 책임자들이 잇따라 물갈이되는 식이다. 역대 정권교체기마다 대대적 인사가 단행되었다. 박민 사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첫 KBS 사장이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바이든-날리면’ 보도로 논란이 일 당시 ‘언론의 정파적 편향성과 정언 유착을 개탄하는 KBS 직원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연대 성명의 작성자 92명 가운데 약 3분의 1이 최근 인사에서 보직을 맡았다. 기존 간부들은 비제작부서 혹은 타 부서로 인사 발령이 났다.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한 KBS 구성원들은 “예상보다 더 폭력적이다” “전례없는 일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제작과 편성에 관한 사전 협의와 소통은 단순히 도의적 책임이 아니라 KBS 편성규약과 노사 간 단체협약에 적시된 조항이라서다. 법적 근거가 되는 방송법 제4조는 누구든지 편성에 관해 방송법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규제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는 장치다. 시사교양국의 또 다른 D PD는 “편성규약이라는 절차와 관행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누군가의 인상 비평에 의해서 앞으로 제작될 프로그램의 운명이 정해질까 봐 우려스럽다”라고 비판했다.

당사자 반론도 거치지 않은 사과문

11월14일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겠다던 KBS 신임 경영진의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이후 벌어진 일들이다. 이 자리에서 박민 사장은 “KBS가 지난 몇 년간 불공정 편파 보도 논란을 일으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네 가지 사례를 언급했다. 고 장자연씨 사건 관련 윤지오 인터뷰, 채널A 검언 유착 녹취록 보도, 오세훈 서울시장 내곡동 토지보상 보도, 〈뉴스타파〉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 인용 보도다. 기준이 무엇이냐는 현장 질문에 박 사장은 “KBS 구성원조차 기억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보도 네 건은 같은 날 〈뉴스9〉에서 ‘보도 공정성 훼손 대표적인 사례들은?’이라는 제목의 앵커 리포트에 4분가량 담겼다. 박장범 앵커는 “앞으로 정치적 중립이 의심되거나 사실 확인 원칙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 보도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끝마쳤다.

사내 진상조사는 물론 당사자 반론도 거치지 않은 사과 보도였다는 점에서 기자 직군도 들끓고 있다. ‘오세훈 처가 땅 의혹’을 보도한 기자는 11월16일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통합뉴스룸의 모든 절차를 무시한 채 온에어된 이 리포트를 쓴 기자, 누구입니까. 팩트 확인은 어떤 방법으로 했습니까. 왜 당사자에게 묻지 않았습니까.” 윤지오씨 출연 당시 사회부 법조팀장이라고 밝힌 기자의 글도 보도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는 윤씨가 2019년 당시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재조사 중인 사건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으며, 윤씨에 대한 여러 의혹이 제기된 이후 KBS가 관련 의혹을 충실히 보도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KBS 기자들이 자신의 보도가 사과 또는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논란이 되는 사안을 취재 보도하는 걸 무의식중에라도 피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내부 구성원과 협의 한번 없이 9시 뉴스를 사유화했다는 내용으로 한국기자협회 KBS지회 성명이 나왔다. 해당 보도는 〈뉴스9〉 시작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큐시트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국민 사과를 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판단 기준이 무엇이고, 누구의 데스킹을 거쳤는지 기록이 남아야 하는데 통상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과거 KBS가 사과문을 낼 때와는 다르다. 2014년 5월15일 〈뉴스9〉는 세월호 참사 한 달 특집방송을 꾸리며 ‘대통령 부각·유족 소홀 KBS 보도를 반성합니다’라는 제목의 사과문 두 꼭지를 보도했다. 당시 1~3년 차이던 젊은 기자들 중심으로 내부 비판과 성명이 나왔던 데다, 보도정보 시스템에 기사 작성 및 데스킹 기록이 남았다.

교섭대표 노조인 언론노조 KBS본부(이하 KBS본부)는 11월16일 긴급 공정방송위원회(공방위)를 회사 측에 요구했다. 단체협약상 노사가 참여하는 정기 회의체로, 긴급 공방위의 경우 노조가 개최를 요구하면 24시간 내에 열려야 한다. 하지만 사용자 측이 부사장의 부재 등을 이유로 거부하면서 단체협약도 무력화될 위기에 처했다. 구성원 과반 동의를 요건으로 하는 국장 임명동의제도 마찬가지다. 다른 보직과 달리 통합뉴스룸·시사제작국·라디오제작국 국장의 임명이 2주째 지연되고 있는 이유다. 강성원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11월20일 기자회견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만들어놓은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 단순히 순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완전히 해체하고 폭파시키려는 잔인함이 기저에 깔려 있다”라고 비판했다.

KBS본부는 11월21일 박민 사장과 본부장 등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데 이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고발과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했다. 편성규약 및 단체협약 미준수가 방송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저해하는 위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2012년 문화방송(MBC) 파업이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방송 공정성은 방송의 결과가 아닌 제작·편성 과정에서의 민주적 의사결정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 즉, 사용자가 경영권을 남용해서 방송의 제작, 편집, 송출 과정을 통제하려 한다면 공정방송 의무를 위반한 위법행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시 편향성 논란에 갇힌 KBS

11월20일 언론노조 KBS본부가 박민 KBS 사장을 방송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IN 조남진
11월20일 언론노조 KBS본부가 박민 KBS 사장을 방송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IN 조남진

정파성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새 수뇌부의 다짐이 무색하게 KBS 보도는 또다시 편향성 논란에 갇히고 말았다. 11월20일 박장범 앵커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총선 출마설을 보도하며 “가는 곳마다 함께 사진 찍자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특이한 장관”이라고 운을 뗐다. KBS본부는 “기존 원고에는 없던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 채로 방송된 것이 확인되었다”라며 특정 유력 인사를 띄워주기 위한 보도의 전형이 아닌지 되물었다. 11월21일 〈뉴스9〉에서도 윤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을 집중 보도하며 박 앵커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의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에는 〈더 라이브〉 폐지 철회를 포함해 새 수뇌부의 대답을 요구하는 게시글 수백 개가 올라와 있다. KBS 브랜드마케팅부 관계자는 〈더 라이브〉 폐지 이유를 묻는 〈시사IN〉 질의에 “2TV 채널의 획기적 변화와 경쟁력 극대화를 위해 〈더 라이브〉를 폐지하기로 했다. 〈더 라이브〉 건은 회사 편성규약과 단협에 따라 11월30일 예정된 공방위 안건으로 올려 다룰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KBS본부에 따르면, 이날 논의되는 안건은 〈주진우 라이브〉 〈최강시사〉 진행자 교체 및 특집 프로그램 편성, 〈더 라이브〉 편성 삭제 및 폐지, 〈뉴스9〉 보도 공정성 훼손 대표적 사례 보도 건, 11월20일 한동훈 출마설 보도 앵커 멘트 등이다. 〈뉴스9〉 앵커 사과 리포트 경위에 대해서도 KBS 보도본부장에게 물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에 이어 대규모 구조조정까지 예고된 상황인 만큼 KBS 구성원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A 기자는 KBS가 처한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짚는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러 번 파업을 거치면서 조직의 동력도 떨어졌다. 결국엔 어떤 무기력함이 남은 것 같다. 그렇게 싸워도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뀔 것인가 하는.” 여당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KBS 이사회 구조에 대한 논의 없이는 공영방송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바뀌는 사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11월9일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송 3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은 11월20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마디로 좌편향 방송을 영속시키겠다는 법안이다. 거부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건의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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