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 노펫 존으로 운영 중인 카페. ⓒ시사IN 조남진
노키즈, 노펫 존으로 운영 중인 카페. ⓒ시사IN 조남진

한 달 전 9개월 된 아이와 동네 식당에서 겪은 일이다. 점심시간이라 만석이었다. 주인에게 “기다리겠다”라고 했다. 10분쯤 문 앞에 서 있었더니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려 하는 우리를 갑자기 주인이 막았다. “유모차를 들이면 불편하니 그냥 다른 데 가라”는 것이다. 유모차(유아차)는 문밖에 두겠다고 말하자 그는 “단체 손님이 예약되어 있다”라고 말을 바꿨다. 아이 없을 때는 잘 가던 식당이었다. 나도 모르게 왜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주인은 말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었다. ‘그냥 가자’는 아내의 말에 돌아섰다.

나는 ‘노키즈존’에 대해 좀 어중간한 입장이었다. 노키즈존이 우려스러운 세태를 드러내며 그 존재 자체도 논쟁적이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만 비판에는 ‘노키즈존은 혐오다. 혐오는 잘못이다. 따라서 노키즈존은 잘못이다’보다 더 치밀한 논리가 필요하다. 이번 일 이후에도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주인’의 모호한 대처다. 식당 문 앞에 노키즈존이라고 적어놨다면 우리는 가지 않았으리라. 적어도 처음 식당에 도착했을 때 ‘어린아이는 입장이 안 된다’고 말했다면, 당황은 했겠지만 찡찡대는 아이와 찬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의 가지는 다른 쪽으로 뻗었다. 이 경험이 유독 낯선 까닭은 아이가 얽힌 문제여서가 아니다. 돌이켜보니 거부당한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돈을 쓰고 무언가 구매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거나 눈총받은 적이 언제였던가. 수능 후 캔맥주를 사려다 미수에 그쳤던 때 정도를 제외하면 ‘고객’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물건을 건네며, 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극존칭을 쓰는 상대만 만나왔다. 평생 웃는 낯만 보며 돈을 건넬 수 있다고 생각진 않았다. 다만 축복이라던 출산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뀔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일찍, 상상하지 못한 이유로 약자가 된 느낌이었다.

온라인 댓글 작성자 다수가 잊고 사는 사실이 있다. 누구에게나 처지와 상황이 바뀔 때는 반드시 온다. 아이가 생기거나 나이가 들면 출입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휠체어는 도로의 방지턱에 걸리고 좁은 유리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등 뒤에서 ‘통행에 방해된다’는 투덜거림이 들려올지도 모른다. 빈곤한 자녀에게 부담이 될까 봐 병석에서 괴로워할 것이다. 몇몇 운 나쁜 사례가 아니다. 먼저 살다 간 수없이 많은 이들이 확증하는 진실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그들을 위해 공적 비용을 들이자고 주장하는 대신 ‘골칫거리’ ‘벌레’ 취급할 나날이, 생각만큼 길지는 않다는 의미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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