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7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했다.ⓒ연합뉴스
10월27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했다.ⓒ연합뉴스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국민연금이다. 이대로라면 1990년생이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2055년에 국민연금은 고갈된다. 기금 고갈은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낸 보험료의 두 배 이상을 연금으로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어온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돌려줘야 하니, 언젠가 기금이 고갈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한국의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40년 동안 월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면, 은퇴 뒤에는 일할 때 벌던 소득의 40%를 연금으로 지급한다(여기서 연금액이 은퇴 전 소득을 대체하는 비율을 ‘소득대체율’이라고 부른다). 즉 현행 제도는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 체제다. 그런데 만약 기금 고갈 이후 미래세대가 내는 보험료만으로 연금을 지급할 경우, 고령화로 보험료를 내는 사람은 너무 적고 연금을 받을 사람은 너무 많아져서 문제가 생긴다. 기금이 고갈되는 2055년 시점에 일하는 세대(1996~2037년생)는, 지금까지 수준의 연금(소득대체율 40%)을 지급받으려면 월 소득의 9%가 아니라 그 세 배에 가까운 26.1%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2078년 시점의 일하는 세대(2019~2060년생)가 내야 할 보험료는 월 소득의 35%에 이른다.

똑같은 소득대체율 40%를 적용받기 위해 이전 세대는 9%만 내던 보험료를 3~4배 가까이 내라고 한다면, 미래세대는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인구가 비교적 많은 현 세대가 보험료를 다 같이 미리 더 부담하면,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고 연금 재정을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연금 개혁이 논의되는 이유다.

한국 사회 마지막 연금 개혁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이뤄졌다. 2003년 10월 말, 노무현 정부는 1998년부터 9%이던 보험료율을 15.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60%에서 50%로 낮추는 연금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아예 20%로 깎고 보험료율도 7%로 낮추는 대신 기초연금을 도입하자고 했다. 기초연금이란,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은 노인에게도 세금으로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다. 국민연금은 10년을 가입해야 연금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데, 이를 채우지 못한 노인에 대한 소득보장 시스템이 당시에는 없었다. 한나라당 안은 국민연금 불신 여론에 편승한 안이면서도 빈곤 노인의 안전망을 새롭게 제안한 안이었지만, 기초연금 재원 마련이 어려워 힘을 받지 못했다.

2022년 2월3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연금 개혁을 약속했다.ⓒ시사IN 신선영
2022년 2월3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연금 개혁을 약속했다.ⓒ시사IN 신선영

노무현 정부는 임기를 1년 앞둔 2006년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을 임명하면서 새로운 안을 던졌다.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기존보다 적게 올리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더 낮추고, 한나라당이 제안한 기초연금을 낮은 수준으로 도입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정부·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게 다름 아닌 민주노동당이었다. 국회에 10석을 가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20%로 낮추자는 한나라당과 협상해 40%를 관철하는 대신 보험료율은 올리지 않고, 노무현 정부 제안보다 더 많은 노인에게 더 높은 액수를 주는 기초연금 도입을 이끌어냈다. 이것이 2007년 연금 개혁이다.

2007년 이후 국민연금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첫 해인 2008년 2차 재정 계산을 했는데, 직전년도인 2007년 개혁을 안착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넘어갔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3차 재정 계산 때는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 기초연금 지급’이라는 대선 공약에 논의가 집중됐다(박근혜 정부는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을 단행했다). 그사이 인구 조건은 더 악화되었다. 문재인 정부 2년 차인 2018년 4차 재정 계산 결과, 2·3차 재정 계산에서 2060년으로 전망되던 기금 소진이 2057년으로 더 빨라졌다.

2006년 7월1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료산업 선진화 전략 보고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2006년 7월1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료산업 선진화 전략 보고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이 마지막 연금 개혁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노후소득보장 강화’, 즉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노무현 정부 개혁 이전인 50%로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18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복지부 장관에게서 연금 개혁안에 관한 중간보고를 받고는 ‘보험료율 인상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다. 그 직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주장하는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가 청와대 사회수석으로 임명됐다. 2018년 12월 복지부는 4개 안이 담긴 ‘제4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낸다. ①현행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 유지 ②현행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유지하고 기초연금을 월 40만원으로 인상 ③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5% ④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다.

사실상 소득대체율 인상에 방점이 찍혔지만 정부의 단일안은 없는 상태에서 2018년 10월 사회적 대화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연금특위가 꾸려졌다. 한국노총 등은 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5%를 지지했다(소위 ‘다수안’). 경총 등은 현행 유지를, 소상공인연합회는 보험료율 10%-소득대체율 40%를 지지했다. 2019년 8월 경사노위 연금특위는 종료됐다. 하지만 ‘다수안’이 나온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고 이듬해 코로나19가 닥쳤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자가 사회수석으로 있었음에도 소득대체율도, 보험료율도 올리는 안을 관철하지 못한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로 야당과 보수 언론 공세를 받아내야 했던 대통령실 정책라인은 연금 개혁의 추진에 대해 입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김영순, ‘정책옹호자연합 모형을 통해 살펴본 연금 개혁의 성공과 실패:영국 블레어 정부와 한국 문재인 정부의 사례’, 2023).”

국민연금법은 정부가 5년마다 연기금 재정을 계산해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점검하고, 그해 10월 말까지 연금 운영 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정해두었다. 올해는 마침 제5차 재정 계산이 이뤄진 해이고, 연금 고갈 연도는 기존 2057년에서 2055년으로 더 당겨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수차례 연금 개혁을 공언해왔다. 윤석열 정부가 보험료율을 얼마나 올릴지는 최근까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10월30일 윤석열 정부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는 보험료율을 몇 퍼센트 올릴지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합의 없이 결론적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금 개혁은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므로 정부가 먼저 구체적 숫자를 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일리 있는 얘기일까? “연금 개혁은 수치를 조정하는 일이다. 결국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정부가 자신의 안을 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부터 의견이 다른 주체들에게 합의하라고 하면 논의가 힘을 못 받고 공전하기 쉽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정확히 그렇다. 사실상 연금 개혁 의지가 없다고 본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의 말이다.

지난해 7월 국회에 여야 의원 13명이 연금개혁 특별위원회(연금특위)를 꾸렸다. 연금특위 활동 기한은 올해 4월까지였는데 11월까지로 한 차례 연장된 데 이어, 내년 5월 말까지로 한 차례 더 연장되었다. 특위 임기 종료 바로 직전인 내년 4월에 총선이 있는 만큼, 연금 개혁이 총선 뒤로 미뤄지리라는 관측이 많다. 총선 3년 뒤는 대선이다. 앞으로 국회 특위가 시민 500명이 참여하는 ‘공론화’ 작업을 하면 정부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공론화의 시기도, 방법도, 위상도 불분명하다.

연금을 둘러싼 합의가 안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국회 연금특위 산하에 민간자문위원회가 꾸려져 논의를 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보험료율을 올려야 한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쟁점은 소득대체율이다. 민간자문위원 중 일부는, 올해 42.5%이고 매년 0.5%포인트씩 낮춰 2028년에 40%로 맞춰질 소득대체율을 다시 50%로 올리자고 주장한다. 기존 소득대체율 40%를 그대로 적용받으려 해도 미래세대가 보험료율을 지금의 3~4배 더 내야 한다는데, 오히려 소득대체율을 더 올리자는 이유는 뭘까?

‘소득대체율 인상론’에 따르면, 2055년 기금 고갈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기금 고갈 뒤 보험료율이라고 이야기되는 26.1~35%는 어디까지나 보험료로만 연금을 충당할 때 이야기다. 독일 등 외국 정부처럼 국가 재정을 투입하면 된다. 독일은 2021년 기준 연금 재정의 22.7%를 국고로 충당하고 있다. 물론 이들도 보험료율을 올리지 말자는 건 아니다.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는 조건으로, 보험료율도 현행 9%에서 2033년까지 13%로 인상하자는 게 이들의 제안이다.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이 경우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인 2053년의 국민연금 총지출액은 GDP 대비 7.8%가 된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미래 노인을 위해 이 정도 재정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3년 현재 GDP 대비 연금지출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2053년의 7.8%까지 갈 길이 멀다. 다른 나라에서는 연금지출 비중이 이렇게 급격히 늘어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OECD 평균은 현재도 2060년대에도 9~10% 수준이다). 또한 연금지출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건 2053년보다 수십 년 뒤의 일이다.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일 경우 GDP 대비 최대 연금지출 비중은, 소득대체율을 그대로 둘 때인 9.5%(2081년)보다 더 높아진 11.8%(2083년)가 된다. 보험료율을 13%로 올렸기에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에서 2061년으로 늦춰지긴 하지만, 고갈 뒤 연금액을 모두 보험료로 부담한다고 가정할 때의 최대 보험료율은 소득대체율을 유지할 때인 35%(2078년)보다 더 높아진 43.2%(2079년)가 된다(〈그림〉 참조).

소득대체율 인상론자들은 2030년대 중반에 가서 보험료율을 추가 인상하고 국고를 투입하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2070년 노인 인구가 한국 인구의 절반이다. 연금에 재정을 투입하면 그만큼 노인들이 소비를 해서 내수가 돌아갈 텐데 뭐가 문제인가?(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그러나 재정 역시 세금에서 나온다. 아무리 노인이 소비를 한다고 해도, 해당 시점의 일하는 세대가 연금 지급액을 채우기 위한 국고 투입이나 증세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노동자 대신 자본가나 법인에게 더 거두면 된다고 하지만, 그 역시 미래세대 부담인 건 마찬가지라는 반론도 있다. 게다가 한국은 노인 인구 급증에 따라 의료비 지출도 커질 예정이다.

사실, 지금 한국의 국민연금 보험료율(9%)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2020년 기준 독일의 보험료율은 18.6%, 스웨덴 22.3%, 일본 18.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8.2%다. 지금 나와 있는 연금 재정추계는 합계출산율이 2046년 이후 1.21명으로 반등한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지난해 잠정 합계출산율은 0.78명을 찍었다. “경제와 인구가 고도로 성장하던 20세기 중반에는, 연금액을 높여 국민연금의 보장성을 키우는 게 정의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은 다르다. 기후위기로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하는 것처럼, 연금에서도 현 세대가 고통을 일부 나누어 후세대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연금이라는 미래 의제를 과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오건호 위원장).” 소득대체율 인상보다 연기금의 재정 안정을 중시하는 ‘재정안정화론’의 시각이다.

두 입장이 대립하고 있지만, 한 가지 공유하는 사실이 있다. 현재 한국의 노후소득 보장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 1월 기준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은 61만7603원에 불과하다. 최고 수급액은 월 266만4660원이지만, 평균으로 보면 여전히 ‘용돈 연금’이라는 비난이 나온다. 한국 노인빈곤율은 2021년 37.6%로 OECD 1위다(OECD 평균은 13.1%, 2018년 기준). 국민연금의 존재 이유는 기금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후소득 보장이다. 소득대체율을 올려서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노인빈곤율을 낮춰야 한다는 게 소득대체율 인상론의 논리다.

한국 노인빈곤율, OECD 1위

그런데 노인빈곤율이란 65세 이상 노인 중에서 소득이 중위소득(전체 인구를 소득 순서대로 줄 세웠을 때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의 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노인의 비율을 말한다. 국민연금은 60세 미만까지만 가입할 수 있으므로, 현재 빈곤한 상태에 있는 노인은 이미 연금 수급액이 정해져 있다. 소득대체율을 올린다고 해서 이들의 연금이 소급해 오르지는 않는다. 더욱이 노인 중 국민연금을 받는 비율은 10명 중 4명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최소 가입 기간 10년을 채워야 받을 수 있다. 노인 세대 중에서 남성의 연금 수급 비율이 여성의 두 배에 이른다. 즉 소득대체율 인상은 지금 빈곤한 상태에 있는 노인의 삶을 개선하기 어렵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시사IN 신선영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시사IN 신선영

물론 미래의 노인들이 빈곤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정책 목표다. 한데 그 방법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일까? 소득대체율 40%는 40년 가입 기준 ‘명목’ 소득대체율에 불과하다. 대다수 시민들은 40년 동안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한다. 한국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 가입 기간은 20년 안팎에 그치며, 이것을 반영한 실질 소득대체율은 20% 초반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 연금 가입자들의 평균 가입 기간이 30년 안팎인 것과 대조된다.

가입자들의 짧은 평균 가입 기간을 만회하는 방법으로 명목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면 어떻게 될까. 가입 기간이 짧고 소득이 낮은 사람도 연금액이 오르긴 한다. 그런데 가입 기간이 길고 소득이 높은 사람은 훨씬 많이 오른다. 연금이란 기본적으로 보험료를 더 많이, 오래 납부한 사람이 많이 받는 제도다. 국민연금에 10년 가입한 월 100만원 소득자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할 경우 연금액이 4만8000원 오르지만, 35년 가입한 월 590만원 소득자는 37만5000원이 오른다. 사회보험이 원래 그런 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목 소득대체율을 올린 결과 더 부족해진 연금액을 국고를 투입해서 지급해야 한다면, 국고 투입의 최대 수혜자가 누가 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재정안정화론은 국고를 다른 데 투입하자고 한다. 예컨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크게 직장가입자(1인 이상 사업장의 사업주와 노동자), 그리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지역가입자로 나뉜다. 직장가입자인 노동자는 보험료 절반(소득의 4.5%)을 사업주가 내준다. 같은 지역가입자 중에서도 농어민은 국가가 보험료를 50%까지 지원해준다. 그러나 지역가입자에 해당하는 영세 자영업자,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 등은 소득의 9%를 고스란히 보험료로 내야 한다. 지역가입자 685만 명 중 306만명(44.7%)이 사업 중단이나 실직 등의 이유로 보험료를 내고 있지 않은 ‘납부예외자’다. 88만명(12.8%)은 장기 체납 상태다. 이들에게도 보험료 절반을 국고로 지원해서 최소 가입 기간인 10년을 채울 수 있도록, 혹은 가입 기간을 더 늘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연금보험료를 내기 어려운 출산과 군복무, 실업 기간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는 각종 ‘크레딧’ 제도에 국가 재정을 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사각지대 지원에 국고를 써 가입 기간을 늘림으로써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자는 전략이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이런 제안에 반대하지 않는다. 소득대체율도 올리고, 사각지대 지원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점은 명목 소득대체율 인상에 찍혀 있다. 이는 소득대체율 인상을 주장하는 이들의 조직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소득대체율 인상을 강하게 주장하는 그룹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참여연대 등 300여 개 시민단체가 소속된 연대체인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이다. 한 노동조합 관계자의 말이다. “사실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이나 실업 크레딧은,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이 주축인 양대 노총 조합원 대다수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또한 노조가 연금에 대해 전문성이 없다 보니 국민연금공단의 노동조합인 민주노총 국민연금지부의 입장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들은 아무래도 국민연금 제도가 강화되고 확대되는 것이 공공성에 부합하고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는 국민연금 말고도 퇴직연금과 기초연금이라는 제도가 있다. 재정안정화론자 중 일부는, 국민연금 명목 소득대체율을 높이지 않아도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다층 연금 체계’다. 먼저 저소득층 노인에게는 보험료를 내지 않았어도 세금으로 지원하는 ‘기초연금’이 있다. 올해 소득 하위 70%의 노인에게 월 32만3180원을 지급하고 있다. 액수는 낮으면서 대상은 많아서, 빈곤 완화 효과는 적은 데 비해 해마다 재정 부담이 커지고 있다. 지급 대상을 지금보다 좁히고 액수를 빈곤층에게 더 늘리면, 저소득층 노인의 유의미한 사회안전망이 되리라는 제안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도 상당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

중상위 계층에게는 ‘퇴직연금’이 있다. 근로기준법상 사업주들은 노동자 월 소득의 8.33%만큼을 퇴직금으로 적립하게 되어 있다. 퇴직연금은,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대신 지금의 국민연금처럼 매달 지급받아 부족한 노후소득을 보완하게 하려는 제도다. 2005년 도입되었으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한 계좌 중 92.9%가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했다. 퇴직금 일시금 수령은, 주된 일자리에서 조기에 퇴직해 자영업에 뛰어들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이기도 하다. 실업급여를 강화하는 한편 퇴직금 일시금 수령 조건을 엄격히 하고, 현재 국민연금보다 낮은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면, 굳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리지 않더라도 중간층 이상의 노후소득 보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재정안정화론은 본다. 특히 1년 미만 계약직은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데, 이들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 과도기에 재정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자들은 다층 연금체계에 회의적이다. 근속연수가 짧은 한국 노동시장을 고려하면 퇴직금을 ‘연금화’하기가 쉽지 않고, 민간 연금의 역할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이에 대해서는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옵션을 선택하게 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또한 소득대체율 인상론자들은 기초연금 확대야말로 미래세대 부담이라고 본다.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세금으로 지원하는 기초연금보다는 국민연금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믿는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실리아 호이저만은 대륙 유럽의 복지국가가 줄어드는 재정 여력과 탈산업화, 가족 해체에 대응해 어떻게 연금 제도를 개혁해갔는지 추적했다(〈복지국가 개혁의 정치학〉). 그에 따르면, 각 나라의 노동시장 내부자들은 불안정·비전형 노동자들에게 기초연금이나 보험료 지원 등으로 연금 적용을 확대하는 ‘표적화(targeting)’나, 출산 크레딧 등 연속적이지 못한 고용 경력을 가진 사람들(주로 여성)의 연금 수급권을 확대하는 ‘재조준화(recalibration)’에 찬성할 유인이 별로 없다. 이들은 보험료로 기여한 만큼 받아가는 원리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서비스업 종사자 등 노동시장 외부자 비중이 높거나 그들의 지지를 받는 노동조합 또는 정당은, 표적화나 재조준화에 더 적극적이다. 때로는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이나 소득대체율 인하와의 ‘교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개혁을 ‘정책 패키지’로 꾸려 광범위한 지지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개혁을 관철해내는 건 집권세력의 몫이다. ‘연금 정치’다.

윤석열 대통령은 10월30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과거 정부는 연금개혁에 대한 의지 없이 4개 대안을 제출해 갈등만 초래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나마 소득대체율 인상에 방점을 두고 구체적 숫자를 낸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의 계획은 최대 쟁점인 소득대체율 인상마저도 “계속 검토”한다고 열어놓았다. 정당들도 연금에 관한 당론이 없거나 불분명하다. 연금특위 여당 간사인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우리도 소득대체율을 올릴 수 있는데 보험료율이 얼마인지에 따라 다르다. 보험료율·소득대체율 수치 확정은 전 정부 때 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연금특위 야당 간사인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험료율을 올리되 소득대체율도 올리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지만, 정부가 안을 안 내놓는데 야당이 무슨 안을 내놓겠나”라고 되물었다.

연금 정치는 언제 작동하는가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는 2033년부터 65세로 늦춰지는데 법정 정년은 60세다. 노동조합들은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된 일자리 퇴직 연령이 50세가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정년 연장이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집권 1년 반이 되도록 윤석열 정부는 이런 핵심 과제는 물론, 오랜 쟁점이었던 소득대체율 인상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사회적 논의를 주도하지 않았다. 현 세대 여론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을 선호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추진 가능한 대안인지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10월26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연금 개혁 관련 대안 보고서를 발표했다.ⓒ시사IN 조남진
10월26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연금 개혁 관련 대안 보고서를 발표했다.ⓒ시사IN 조남진

변화의 징후는 있다. ‘소득대체율 인상을 전제로 보험료율 인상’에 동의하던 기존 진보 진영 입장에서 이탈한 이들이 등장했다. 지난 5월 출범한 ‘미래세대·일하는 시민의 연금유니온(연금유니온)’이다. 연금유니온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보험료 인상에 대한 중산층의 동의를 어떻게 얻을 것이냐라는 소득대체율 인상론자들의 문제 제기는 타당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연금 논의는 지나치게 진영화되어버렸다. 당장 국민연금 가입 기간 10년을 채울 수 있을지 걱정하는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들이 있다. 과연 이들에게도 모든 소득구간의 명목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것이 노후소득 보장의 핵심인지 이제는 질문할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연금 개혁은 흔히 ‘코끼리 옮기기’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비유되지만, 이를 실행한 나라들이 있다. 방식도 맥락도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개혁의 주체가 지속 가능한 미래 노후 안전망을 어떻게 만들지 제시하면서 그를 위한 고통 분담을 설득했다는 점이다. 각 나라 정부들은 노동시장의 내부자·외부자, 노동자·사용자 간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조합해가며 끊임없이 협상하고 타협하고 조율해 개혁의 지지 연합을 만들어냈다. 그 대상은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 그리고 정당이었다. 결국 한국 사회에 가장 고갈된 자원인 정치 그 자체를 복원할 수 있을지에 연금 개혁의 미래가 달렸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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