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군의 공습 이후 가자지구 북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수천 명이 숨졌다. ⓒAFP PHOTO
10월23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군의 공습 이후 가자지구 북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수천 명이 숨졌다. ⓒAFP PHOTO

이스라엘과 아랍,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말이 있다. 본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민족, 종교, 영토가 서로 얽혀 있다. 게다가 그 배경에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가 깔려 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남북의 대결보다도 더 복잡하고 더 오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국가를 수립한 1948년부터 시작했다. 이후 1973년 4차 중동전쟁까지 네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특히 4차 중동전쟁은 이른바 오일쇼크를 일으켜서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아랍,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도 평화를 위한 합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극단주의 세력들이 평화 합의를 깨뜨려 버렸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남북이 맺은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려고 틈만 노리는 세력이 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를 구실로 9·19 군사합의를 깨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극단주의 세력이 평화에 대한 합의를 파기한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9·19 군사합의를 깨자는 주장도 결국 이와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교의 속죄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리는 4차 중동전쟁 이후부터 아랍과 이스라엘의 두 세력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은 채 시나이반도에서 101km 떨어진 곳에서 협상이 시작했다고 해서 ‘킬로미터 101(Kilometer 101)’ 협상으로 불린다.

‘킬로미터 101’ 협상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분리하여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거기에 유엔 비상군을 설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협상은 성공하여 ‘1차 시나이 협정(1974)’과 ‘2차 시나이 협정(1975)’을 체결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유엔 비상군이 관리하는 비무장 완충지대를 만들고, 완충지대 밖에는 군사력 배치 제한구역을 설치했다. 2차 시나이 협정으로 완충지대의 폭을 확대했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라는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이후 9·19 군사합의에서 군사력 배치 제한구역을 만든 것과 유사하다. 국제사회에서 시나이 협정은 신뢰 구축과 군비 통제에 대한 성공적 합의로 평가하고 있다.

시나이 협정의 성공 이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베긴 총리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1978년에 캠프 데이비드에서 중동 평화구상에 합의하고, 1979년 중동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시나이 협정으로 완충지대를 설치했지만, 각각 상충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로부터 안보 위협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했다.

중동 평화협정에서는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되, 그것을 4등분하고 비무장 완충지대와 군사력 배치 제한구역을 정밀하게 구분했다. 다국적 군사 기구가 이를 감독하여 실천력을 높였다. 영토 반환과 안전보장이라는 두 나라의 상충된 목적을 모두 달성하게 된 것이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1978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시나이 협정의 모태, ‘한반도 정전협정’

중동 평화협정은 1차 시나이 협정 이후 점차 군비 통제와 신뢰 구축을 강화 발전해온 결과물이다. 중동 평화협정에서 약속한 사항은 비교적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하지만 중동 평화협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이어달리기는 극단주의 세력들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중동 평화협정의 주역인 사다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6일 승전기념일 열병식에서 이집트 강경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10월6일은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다트는 자신이 지휘한 4차 중동전쟁의 승전기념일에 암살당한 것이다. 중동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2년 후인 2023년 10월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1993년 9월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아라파트 PLO 의장(오른쪽)은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REUTERS
1993년 9월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아라파트 PLO 의장(오른쪽)은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REUTERS

좌절된 중동 평화협정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의해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1994년 10월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스라엘과 PLO가 서로 인정하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협정으로 PLO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구성했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자치정부 영토로 결정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국 지도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이다. 1년 후인 1995년 9월에는 팔레스타인의 자치 지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한다는 2차 오슬로 협약을 체결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길이 열리고, 중동 평화에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극단주의 세력들은 다시 중동 평화를 깨뜨려버렸다. 이번엔 유대인 근본주의자였다. 2차 오슬로 협약을 체결한 지 두 달도 안 돼 라빈 총리가 암살당했다.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테러를 자행했다. 오슬로 협정은 종이 속에 갇혀버렸다.

아랍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증오와 복수가 악순환하는 역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나이 협정, 캠프데이비드 협정, 오슬로 협정은 하느님도 풀기 어렵다는 복잡한 중동 상황에서도 얽힌 실타래를 풀어낸 성공적인 경험이었다. 이 협정을 깨뜨린 극단주의 세력들에 의해서 오늘날 중동은 전쟁과 복수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2018년 남북이 합의한 9·19 군사합의에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담겨 있다.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관리하기 위해 역대 정부가 추구해온 정책이다. 그동안 북한은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평화를 위한 조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나 군축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근본 문제로 삼았을 뿐이다.

국제사회에서도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은 진영 대결을 완화하고 군비 통제와 군축으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실제로 냉전 시기에 유럽에서는 다양한 신뢰 구축 장치를 만들고 이행했다. 중동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시나이 협정처럼 군사력 운용을 관리하고 통제해서 위협을 감소하고 신뢰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전시킨 신뢰 구축 장치는 1975년 헬싱키 최종합의서, 1986년 스톡홀름 협약, 1992년 비엔나 협약으로 구체화되고 발전했다. 그 결과로써 냉전 해소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이 아니기 때문에, 종전선언을 통해서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길이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긴장을 완화하는 안전핀 구실을 하고 있다. 정전협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반도의 정전협정에서는 비무장지대라는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여기서 군사적 운용을 제한하고 있다. 중동에서 최초의 신뢰 구축 장치였던 시나이 협정의 모태가 바로 한반도 정전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9월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19 군사합의문’ 교환을 지켜보고 있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19 군사합의문’ 교환을 지켜보고 있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

9·19 군사합의는 정전협정에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적대행위의 금지를 구체화했다. 지상, 해상, 공중에서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해 군사분계선 일대에 구역을 설정했다. 또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와 서해에서 어로활동 보장 조치도 포함했다. 9·19 군사합의에서 보장하고 있는 이러한 조치는 국제 사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정교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군사분계선 일대 상공에서 군사활동을 금지한 것을 두고 북한이 하마스식 공격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대(對) 북한 감시정찰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9·19 군사합의를 파기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도 있다. 9·19 군사합의 때문에 북한이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하마스식 공격을 할 수 없다. 우리의 감시정찰 능력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이 다종다양하고 성능도 뛰어나다. 군사분계선 일대 상공에 군사활동 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이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예방하는 안전장치인 것이다.

‘9·19 군사합의 파기’ 주장의 비논리성

문제는 실천이다. 그리고 날로 긴장의 수준이 높아지는 정세를 고려해 더 정교한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로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의 군사력은 나날이 강화되고 있다. 하마스와는 애초부터 비교가 안 된다. 하마스의 주력 무기인 카삼 로켓을 북한의 미사일과 비교한다면 장난감 정도에 불과하다.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를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도리어 상대로부터 위협이 더 커져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것이 안보 딜레마이다. 신뢰 구축 장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안보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하는 길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9·19 군사합의 파기로 연결하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쪽에 있는 극단주의자들이 평화를 파괴한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사실 하마스도 이스라엘 극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슬로 협정을 반대했다. 이스라엘 극단주의자들과 하마스는 오슬로 협정 체결 후에 이를 반대하기 위해서 적대적 의존관계를 형성했다. 오슬로 협정을 반대하던 사람이 지금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야당 지도자였던 네타냐후는 오슬로 협정을 이스라엘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라고 불렀다. 오슬로 협정을 부정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정착촌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오슬로 협정을 반대하는 하마스도 맞장구를 쳤다. 협상을 파탄 내고자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중동에서 전쟁은 이집트를 필두로 한 아랍과 이스라엘이 충돌한 네 차례 중동전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이른바 가자 전쟁이 1988년, 2012년, 2014년에 각각 한 번씩 총 세 차례 있었다. 벌써 앞선 가자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지금 하마스와 네타냐후는 극단 충돌하기 일보 직전이다.

네 번째 가자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바로 중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전쟁의 참화 속에 빠뜨린 주범이다.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극단적 가치만이 옳다며 서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이다. 9·19 남북 군사합의를 파기하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하마스와 이스라엘 집권 세력이 지금 보여주고 있다.

기자명 김창수 (전 코리아연구원 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