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4년, 이광호 작가는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이야.” 유난스러운 ‘자기애’가 아니다. 도둑은 도둑질을 해서 도둑이고 중요한 사람은 중요한 일을 해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중요하지만 살면서 내가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지난 3~4년 그걸 수시로 자각하는 삶이었다.”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은 〈노회찬 평전〉과 관련되어 있다. 2018년 12월 노회찬재단의 송년 모임에서 집필 제안을 받고 거절했다가 이듬해 5월 수락했다. 안 하자니 평생 후회할 것 같았고 수락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만일 쓰겠다고 하다가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면?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막상 쓴다면 누구 얘기를 어디서부터 들어야 하지? 비어 있는 구석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나중에서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적임자’라서, ‘노회찬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제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노회찬 의원 5주기를 앞두고 〈노회찬 평전〉을 펴낸 이광호 작가. ⓒ시사IN 조남진

위인전이 아니라 평전이다. 정치인 노회찬에 대한 평가보다 62년 삶의 여정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모범생과 반항아 사이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직업 전투원’을 결심한 스무 살 무렵의 결의, 용접공으로 시작한 노동운동과 ‘인민노련’ 결성, 감옥에서의 시간과 민주노동당 창당 및 분당 사태,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삼성 X파일 사건을 비롯한 의원 시절의 의정 활동, 진보정의당 출범과 ‘6411버스 연설’을 지나 짧았던 ‘마지막 봄’에 대한 기억까지 연대기로 정리했다.

〈미디어오늘〉 〈노동과 세계〉 〈레디앙〉 등을 창간하고 편집국장을 지낸 이광호 작가는 1990년대 초 노회찬 전 의원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이었다. 한 살 위인 노회찬 전 의원과는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함께 일했으나 진보정당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다른 당 소속이기도 했다. 요약하면 ‘그의 탁월함에 의지했고 기대를 걸었지만 그와 같은 편에 서 있지는 않았다’. 인터뷰를 앞두고 질문지를 요구하는 취재원은 많지만 이광호 작가의 경우 이유가 좀 달랐다. “내 얘기가 아니라 노 의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평전 출간을 앞두고 수능을 치른 뒤 점수 발표를 앞둔 기분이라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공덕동 노회찬재단을 찾았다.

재단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64116411’이다. 2012년 진보정의당 출범 당시 당대표를 수락하며 했던 ‘6411번 버스 연설’이 평전에도 등장한다. 노 전 의원이 국회에서 쓰던 책상과 각종 유품, ‘노회찬의 서재’도 보존되어 있다. 책에서의 ‘한 줄 한 줄’이 물화된 공간이다. 1992년 인민노련 활동으로 투옥된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쓴 마지막 편지도 재단 소유다. 평전에도 소개되는 편지의 일부 대목이다. “훗날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으나 이 나라와 민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남겨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노회찬 평전〉 출간과 함께 6월27일부터 7월9일까지 노회찬 5주기 추모 전시가 서울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서 열린다.

노회찬재단에는 그가 의원 시절에 쓰던 책상이 보관되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노회찬재단에는 그가 의원 시절에 쓰던 책상이 보관되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평전을 쓰기 위해 220명 넘는 인물을 인터뷰했다.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도 있는데.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1987년 출범한 인천 중심의 노동운동 조직. 진보정당 건설의 모태가 되었다) 시기를 다루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당시 현장 노동자와 학출(학생운동 출신)을 만났는데 노 의원도 평소 인민노련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얘기를 했다. 그게 사실이다. 전두환 시절, 학출들이 노동 현장에 갔는데 주로 직속 위아래 ‘선’만 만났다. 인천에서 운동했지만 점조직이라 자신이 어디 소속인지 모른다는 사람도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임을 할 수 없었고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굉장히 수공업적으로, 생산성이 낮은 상태에서 조직화를 한 거다. 젊은 분들은 이해가 안 될 거다. 거의 고구려 시대 (그만큼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다.

취재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겠다.

기억의 문제도 있다. 기억과 관련된 책도 읽었다. 전문가들은 ‘엊그제같이 기억이 생생하다’는 말을 믿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노 의원도 기억에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의원의 아버님이 원산 도서관 사서라고 생전에 인터뷰를 했는데 원산이 아니라 흥남이었다. 의원의 고등학교 동창을 인터뷰했는데 디테일하게 기억했다. ‘서울에서 우연히 회찬이를 만나 단골집에서 술을 마시고 김민기가 나오는 행사가 있다기에 광주에 가기로 해서 술집 주인에게 돈을 꿔 기차표를 사서 광주에 내려가 행사 끝나고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광주에 큰일이 났다고 얘기했다’더라. 들으며 ‘스토리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확인을 하니, 실제와 날짜가 달랐다. 근거가 없는 건 아닌데 기억이 재구성되는 거다. 가족도, 본인도 디테일에서는 기억이 서로 다르다. 전체적인 흐름에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책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팩트’가 중요하다. 내 입장에서는 그 부분을 신경 썼다. 아마 그런 ‘짓’을 하라고 내게 제안을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관점을 어느 정도 투영할지 고민이었다고.

평전기획위원회 회의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노 의원이 생전 이런 행동을 했고 이런 발언을 했다는 걸 충분히 전달하는 것으로 역할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터뷰 내용 중 선택을 해서 쓰기 때문에 관점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읽는 사람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개인의 관점은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어떤 이념을 가졌다고 하기보다, 평소 그의 말과 글을 통해 그걸 표현해야 했다. 실제로 생전에 이념이나 ‘~주의자’ 같은 표현을 안 쓰기도 했다. 인민노련에서도 이념 논쟁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양보하지 않고 뛰어든 논쟁이 하나 있다면 노동조합의 조직 노선에 관한 것이다. 1987년 민주 노조들이 많이 생길 때 기존 한국노총을 민주화하자는 쪽, 민주 노조를 만들자(현 민주노총)는 쪽으로 나뉘었는데 노회찬은 후자를 주창했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 정치사 등 다양한 각도에서 노 의원을 조명하는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불판 발언’ 에피소드로 시작한다(노 의원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한다. 같은 판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진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대표적 일화지만 많이 알려져서 선도가 좀 떨어지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 출판사의 제안이었다. 편집자분들이 나이도 젊고 나는 아무래도 고려 시대, 고구려 시대 사람이어서 출판의 전문성을 가진 분들을 존중하자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원래는 1972년 10월17일 유신을 선언한 저녁, 노회찬 의원이 37번 버스를 타고 오는 데서 시작할 계획이었다. 37번이라는 걸 확인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스스로 공적 생활의 기원을 그날로 잡고 있다. 1992년 3월25일 옥중에서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도 인상적이라 후보 중 하나였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은 고1 때 장래 희망을 정치가라고 적었고 줄곧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힘썼다. ⓒ시사IN 포토
고 노회찬 전 의원은 고1 때 장래 희망을 정치가라고 적었고 줄곧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힘썼다. ⓒ시사IN 포토

고1 때 장래 희망을 정치가로 적었다. 이런 생각에 영향을 미친 요인이 뭘까?

스스로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사회의식이 없었다고 얘기하고, 당시 글만 봐도 굉장히 평범하다. 다만 수학여행(교지에 실은 기행문에서 수학여행에 못 가는 친구가 생각난다며 고르지 못한 세상이 한스럽다고 썼다)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어디에서 연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항적 면모는 외삼촌 쪽 영향이지 않나 싶다(그의 외삼촌은 서울대 재학 중 국가 변란 목적의 이적단체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7년 복역 후 출소했다). (고입 재수를 위해 부산에 있는) 어머니를 벗어나 서울에 온 것도 결정적 변화다. 동생 노회건씨와 서울역에 내리면 서울의 공기는 자유롭다고 했다고 한다. 유신을 만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노 의원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을 읽었지만 영향을 준 사람은 박정희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다리〉 같은 체제 저항적 잡지를 읽기도 했다. 재수하면서 16년 후 세상을 내다보는데 당시 일기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자세하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사고 대상으로 삼았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용접 노동자로 시작해 인민노련을 만들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이후 정치 생활에 미친 영향이 큰 것 같다.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이 ‘타투(인민노련의 전신)’에서 일했는데 윗선한테 자주 들은 말 중 하나가 실사구시라고 했다. 교조적이거나 이념적인 것 말고 현실을 보라는 의미다. 또 하나는 자율성을 강조했다. 연구 논문을 보면 혁명적 노동운동 그룹의 수많은 정파들의 수명이 평균 1년이다. 윗선을 ‘치면’ 없어지는데 인민노련은 안 그랬다. 결국 민노당(민주노동당)까지 이어진다. 다른 쪽에서는 실사구시라기보다 현실 타협이라고 비판했지만 제일 오래간 셈이다. 노 의원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조직 문화를 그렇게 만드는 데에는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진보정당 건설에 천착해왔다.

인천으로 간 게 1983년 말이고 노동자로 살면서 운동하려고 했는데 ‘광주 세대’가 몰려와서 학출이 늘었다. 상황은 변했지만 불변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 이 체제에서 어려움을 겪는 다수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는 목표였다.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지나 1987년 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며 시대가 변하고 전략 전술도 바뀌지만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목표와 동급인 수단이 정치이자 정당이었다. 지하에서 운동을 하다 지상에 올라가 성공적인 대중 정치인이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의식과 목표는 지하에서나 지상에서나 변한 게 없었다. 예를 들면 노동자들과 얘기할 때 외계어를 쓰는 게 아니라 알아듣는 얘기를 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현장 노동자나 후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노회찬은 말이 많지 않고, 파업하라고 하지 않았고 TV에 나와 하는 농담을 평소에도 했다”라고 말한다. 그때는 ‘아재 개그’라는 식으로 반응했는데 방송에서 터진 것이다. 가지고 있는 장점이 쓰일 수 있는 무대가 열렸고 그게 성공했다. 노 의원이 수줍음을 탄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중학교 동창과 가족들만 예외였다. 특히 운동하며 만난 사람들, 심지어 (의원 시절 정무수석보좌관이던) 고 오재영과도 내외하냐고 할 정도(로 낯을 가렸)다.

2004년 17대 국회 개원을 맞아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보좌진이 국회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감사와 다짐"을 발표하고 있다. ⓒ시사IN 포토

고독한 정치인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1990년 통합민중당이 실패하고 노 의원이 감옥에서 4월1일 나왔다. 왜 (통합이) 안 됐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세 가지 이유였다. 정파가 통합되지 않았고 대중조직의 공식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선거제도라는 제도적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한 점도 있다. 이게 한꺼번에 해소된 시기가 1997년 권영길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서다. 정파들이 모인 것이 성공 요인이자 분열의 요인이었다. 분열을 막는 것이 정당 리더십인데 정파의 이해관계가 정당의 이해관계보다 우위에 놓였을 때 정당 리더십이 발휘되기 어렵다. 정파가 조직 내 활력을 주는 긍정적 면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당의 이해관계에 앞서면 문제가 된다. 노 의원도 그런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동의하는 수많은 개인들이 표를 주었지만 조직이 준 표는 없었다.

세 번 다 끝내지는 못했지만 3선 국회의원이다. 의정 활동은 어땠나?

사람들이 토론회에서 한 ‘촌철살인’을 주로 기억하는데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게 신뢰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신뢰는 인기와도 다르다. 이 양반은 모든 이슈에 역량이 있었다. 노 의원이 대중에 어필하고 신뢰를 쌓은 것은 한·미 FTA처럼 어려운 주제에 대해 잘 알고 대안을 얘기하는 부분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세상의 아픈 현장에 끊임없이 갔다. 진보정당에 관한 논쟁 중 하나가 정당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진보정당이 사회운동적 성격을 가져야 하는데 여의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정당이 운동단체도 아닌데 정치를 해야지 왜 운동을 하느냐는 시각도 있다. 노회찬은 현장의 사회운동적 문제를 국회로 가져와 정책적으로 풀어나갔다. 진보정치의 모범을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2006년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석한 노회찬 전 의원. ⓒ시사IN 포토

노회찬에게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

어떻게 보면 국회의원이 된 후 대중에게 알려지고 화려하게 등장도 했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이 사람이 달린다. 앞서 말한 3가지 실패 요인을 봉합했다.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을 받았고 2002년부터 단체장 선거에서 1인2표(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관념이 아니라 현실로서 진보정당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무슨 무기가 있어야 하고 언제쯤 던져야 하는지 내다보던 사람이다. 지나놓고 보니 그렇다. 민주노동당에 같이 있을 때는 잘 몰랐다.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내고 13% 비례정당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당적 리더십을 만들지 못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어느 정파에만 책임을 돌릴 수 없지만 (일부는) 당시 패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으로 이어졌는데 선거운동 도중에 당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준 실망과 배반감은 복원이 힘들었을 것 같다. 2004년의 성공(초선의원이 된 해이기도 하다) 이후 정당의 이합집산 궤적이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2012년 통합진보당이 다시 분열됐을 당시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고까지 했다.

그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반대파들도 인정한다. 유산이라는 게 온전치는 않고 정의당도 상황 자체는 좀 어려운데 들여다보면 NL과 PD 계열이 같이 있다. 여기에 자유주의 계열의 ‘참여계’도 있고 최근에는 페미니즘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도전이자 기회라고 봤다. 다양한 입장들이 있으니 진보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사민주의로 가자는 게 노 의원의 생각이었다. 사민당으로 할지 진보정의당으로 할지 당명 정할 때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정의당이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멜팅폿(용광로)’처럼 섞여 있지만 당이 리더십을 발휘해 화학적 결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노 의원이 고민을 많이 했다. 리더십의 실패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노회찬이라는 남다르게 훌륭한 정치인도 못해낸 걸 보면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노 의원과의 개인적 인연을 들려달라.

술자리도 손에 꼽을 정도다. 첫 술자리가 민노당 기관지 만들 때였다. 노 의원은 당 부대표였다. 기자들 고기를 사주었는데 서로 소설 얘기를 많이 해서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고 다른 동료들이 말하더라. 마지막은 2016년 창원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때 ‘삼성과 권력(검찰)이 죽인 노회찬(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부활시키는 것보다 노회찬에게 더 힘을 주는 것은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썼는데 그때 사적으로 술을 한잔 했다. 절대 위인전을 쓰지 않겠다고 얘기했는데 평전을 쓰면서 훌륭한 정치인이었구나, 내가 이 양반의 반도 몰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74년 일기를 보면 유신에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은 그 말고도 꽤 있었지만 그렇게 ‘자기 인생의 실천’으로 나아간 경우는 드물다. 거대한 야망이 있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다. (서재를 가리키며) 이 책들을 보라. 전모를 파악하려는 노력과 직업 전투원으로서 항상 70%의 긴장감을 갖고 살았다.

2009년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사IN 포토
2009년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사IN 포토

마지막 부분을 쓰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써야 되나, 생각도 했다. 기억도 아니고 기록도 아니고 내 생각을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유서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을 텐데 '당에 누를 끼쳤다'고 표현했다. 당이 곧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삶에 누가 된다는 것이다. 방어하기 힘든 잘못이 있고 당에 걸림돌이 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받은) 돈의 액수가 크고 작은 건 그래서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런 선택을 할 정도의 무게가 있는 일이었고 본인 삶의 토대가 붕괴해버리는 일이었던 것 같다.

평전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으면 하나?

내 바람과 무관하게 각각의 몫이 있을 것이다. 진보 정치인,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로 인정해줄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삶과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선택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기가 쉽지는 않은데, 본인의 기준에 따르면 행복한 삶을 살다 떠난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행복한 삶을 사는 조건 중 하나다. 모든 사람이 꿈을 직업으로 가질 수는 없지만 노회찬은 그랬다.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걸림돌 때문에 그렇게 됐으나 그의 삶 전부가 재해석될 필요는 전혀 없다. 자신이 하는 일이 일상의 목표와 연결될 수 있는 사회를 노회찬은 원했다. 직업을 온전하게 가지면서 일상에서는 최소한의 꿈을 이뤄나갈 수 있는 사회, 그게 ‘노회찬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닌가. 누구나 그런 사람이라면 노회찬이다.

2017년 6월 '〈시사IN〉 인터뷰 쇼'에 출연한 노회찬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
2017년 6월 '〈시사IN〉 인터뷰 쇼'에 출연한 노회찬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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