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공항에서 제주4·3평화공원까지 차로 30여 분 걸린다. 시내를 지나는 동안 곳곳에 현수막이 보였다. ‘제주4·3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 서늘한 문장을 지나 중산간 지역에 접어들자 풍경이 바뀌었다. 서울보다 앞서 벚꽃이 흐드러진 길가에 이런 현수막도 있었다. ‘4·3 망언 태영호는 즉각 사퇴하라.’ 4·3 75주년을 앞둔 제주는 ‘현수막 전쟁’ 중이었다.   

3월24일 제주시청 앞에 제주4·3 왜곡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사IN 이명익
3월24일 제주시청 앞에 제주4·3 왜곡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사IN 이명익

평일 오전, 4·3평화기념관은 교복 차림의 단체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4·3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야외의 위패봉안실에는 위패 1만4000여 개가 마을별로, 가나다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길은 행방불명인 표석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만난 최상욱씨 가족은 서울에서 여행 겸 들른 참이었다. 부부는 두 아이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해도 ‘정서’는 기억될 거라고 말했다. 분홍색 패딩을 입은 아이가 위패를 보며 눈물 흘리는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최씨도 제주도 여행을 하며 현수막을 보았다. “화도 나고 놀라기도 했다. 찾아보고서야 사정을 알게 되었다. 떼지 못하게 하니 어떤 현수막은 찢겨 있더라.”

제주도 전역에 현수막 80여 개가 붙었다. 앞서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제주4·3 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라고 말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4·3 흔들기’다.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는 문제의 현수막이 정당 명의라 통상적인 정당 활동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제주4·3 단체들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어디에도 북한 지령설이나 공산 폭동이라는 내용이 없다며 규탄했다. 결국 시 당국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상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불법 현수막으로 판단해 추념식 하루 전날 철거를 결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4·3 추념식에 불참하기로 했다.

4·3평화기념관 4층에는 제주4·3연구소가 있다. 1989년 개소한 이후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천착해온 민간 연구단체다. 허호준 〈한겨레〉 기자를 그곳에서 만났다. 제주 출생인 그는 1989년 기자가 된 뒤 ‘운명적으로’ 4·3을 만났다. 입사 바로 전해가 4·3 40주년이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던 시기다. 30여 년 동안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 몰두했다. 취재와 연구를 병행했다. 제주 지역 대학에서 4·3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연구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1회 4·3언론상을 수상했다.

최근 4·3을 다룬 책 〈4·3, 19470301-19540921〉을 펴낸 허호준 〈한겨레〉 기자. ⓒ시사IN 이명익
최근 4·3을 다룬 책 〈4·3, 19470301-19540921〉을 펴낸 허호준 〈한겨레〉 기자. ⓒ시사IN 이명익

최근 그는 4·3 생존 희생자, 유족들 100여 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4·3을 다룬 책 〈4·3, 19470301-19540921〉을 출간했다. 숫자는 4·3의 시작일과 끝나는 날을 의미한다. 400여 쪽 분량으로 통사를 다루되 미국, 여성, 북촌, 4·3 디아스포라 등 4·3의 주요 포인트를 짚었다. 5년 전 〈한겨레〉에 연재했던 내용을 담으려다가 결국 대부분 새로 썼다. 4·3의 배경과 오늘날까지의 역사, 그 시간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 제주 곳곳에 남은 흔적까지 30년 취재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소감이 남다를 만도 한데 기자 생활 중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75주년 4·3 기획’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책은 해방 직후 제주도 상황에 대한 기술로 시작한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해방군으로 여겼던 미군이 친일 경찰과 손잡았다. 최악의 흉작에 콜레라까지 겹쳤다. 일제강점기 일본 등으로 떠났던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인구는 늘었으나 일자리가 없었다. 이 가운데 1947년 3월1일 3·1절 행사 후 거리 행진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차여 아이가 넘어졌다. 항의하는 도민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해 6명이 숨졌다. 성난 민심이 동요했다.

미국,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알았다

이날의 발포는 민관 총파업 사태로 이어졌다. 타지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가 들어왔고 제주에 붉은색이 덧입혀졌다. 1년이 되지 않아 25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허 기자는 제3세계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친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말을 빌린다. “민중의 무장투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있다.” 1948년 제주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오고 있었다. 경찰의 검거와 고문, 우익단체의 테러, 남로당의 와해 위기 등이 배경이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무장대가 봉기했다. 군경, 서청 단원으로 이루어진 토벌대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사이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학살을 정당화했다.

4·3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 비석 4000여 기가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되어 있다. ⓒ시사IN 이명익
4·3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 비석 4000여 기가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되어 있다. ⓒ시사IN 이명익

허호준 기자는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한라산을 보며 1948~49년을 생각한다. 몇 개월 사이 학살이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해안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고 산속 피난민들은 굶거나 얼어 죽었다. 산으로 떠난 가족이 있는 집안에서는 누군가 대신 죽었다.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토벌대를 피해 중산간 동굴에 지내다 밤이 되어 나오면 눈에 다리가 푹 빠질 정도였다. “우리 삼촌(어른을 친근하게 부르는 제주어 명칭)들은 저 추운 데서 어떻게 살았을까. 나였으면 어떻게 할까.” 4·3 특별법에 따르면 4·3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희생자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한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큰 규모다.

2021년 〈4·3 미국에 묻다〉를 쓰기도 했던 허 기자는 이번 책에서도 미군정의 책임을 강조한다. “4·3이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에 일어났다는 건 다 아는 일이다. 진상규명 활동가들도 미국의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미국 문서를 찾고 발췌해 연구하며 4·3이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았다. 단언컨대 미국은 4·3에 대해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다.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4·3을 겪은 당사자들도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어한다. 총 든 미군을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남한 최초의 단독 총선거(5·10 선거)를 성사시키는 데 몰입했던 미군정은 여론을 의식해 직접 개입하는 대신 경비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제주에서 5·10 선거가 투표 과반수 미달로 실패한 뒤에는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직접 파견했다. 그가 지휘한 경비대 11연대는 중산간 지역에서 수천 명을 검거했다. 허 기자가 확인한 각종 문서와 기록에도 미국 개입의 증거가 남아 있다.

4·3을 세계사 속에서 보려는 시도도 있다. 그가 보기에 4·3은 지역 단위 사건이 아니다. 냉전체제 형성기에 일어난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 독일은 그리스 점령 이후 산간 지역 마을을 저항 세력의 근거지로 지목해 초토화했다. “그리스 내전과 4·3은 대단히 유사한 사건이다. 그리스가 독일에서 해방된 이후 미국 등 외세가 개입해 학살이 일어난다. 그리스인이 좌우익의 희생양이 됐다. 4·3의 시작인 3·1 사건처럼 그리스에서도 집회 후 평화행진을 벌이는 중에 경찰의 발포로 사건이 확대된다.” 남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반공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유럽 남동부에 그리스 내전이 있었다면 동북아의 변방에 4·3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민관 총파업 등을 계기로 타지에서 온 경찰과 서청은 제주도민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주어가 그만큼 낯설어 통역이 필요할 정도였다. 오히려 일본어로 하니까 통하더라는 기록도 있다. “동족이 아니라 이민족을 대상으로 할 때 학살의 죄의식이 옅어진다고 제노사이드 이론에도 나온다. 한국어가 안 통하는데 한국 사람으로 봤겠나. 제주도 출신이어도 노인들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70년 전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1949년 1월17일 민간인 300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 북촌리 일대. ⓒ시사IN 이명익
1949년 1월17일 민간인 300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 북촌리 일대. ⓒ시사IN 이명익

4·3은 7년7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가해와 피해가 자로 잰 듯 선명하지 않다. 토벌대는 물론이고 무장대도 주민을 학살했다. 어느 사건에서 민보단(경찰의 협조 단체) 단원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허 기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가해자 피해자가 확실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군과 경찰을 앞세웠던 국가폭력이 정당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로당원이었다가 고문을 받고 전향해 경찰이 되었던 분이 한 말이다. 폭도(무장대)가 법 없이 사람을 죽여도, 국가는 법 없이 죽이면 안 된다고, 그런데 그때는 함부로 죽였고 그게 폭력이라는 거다.”

4·3은 반세기 가까이 언급조차 ‘금기’였다. 희생자는 폭도나 ‘빨갱이’로 몰렸고 유족도 연좌제로 취업 등에 제한을 받았다. 민간 영역에서 4·3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일본에서였다. 당시 제주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밀항선을 탔고 일본에 건너간 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4·3을 정리했다. 1987년이 되어서야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후보가 정치인 최초로 4·3 진상규명 공약을 제시했고 그가 대통령이던 2000년에는 4·3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도 4·3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하며 임기 중 세 차례 추념식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기억 아래 묻어뒀던 참혹한 실상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30여 년 동안 허호준 기자가 만난 4·3 피해자만 1000명이 넘는다. 인터뷰를 하며 숱하게 울기도 했다는 그는 이 말을 전하며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큰오빠가 사라진 뒤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온 가족이 죽음을 당한 김평순씨네도 그중 하나다. 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은 뒤에도 두 번 더 칼에 찔렸다. 어머니와 오빠도 죽자 김씨는 산으로 갔다. 토벌대가 쫓아와 동굴로, 나무 사이로 계속 숨을 자리를 옮겼다.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이 김씨 대신 죽었다. 그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서툰 글씨로 자식들에게 기록을 남겼다. 4·3 때 외가 식구 11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자신이 죽더라도 4·3 위령제에 가야 한다고 당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만난 피해자들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3자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했다. 기자 생활을 한 지 10년쯤 지났을 때 만난 주민도 잊히지 않는다.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 때 제주도 서귀포시 영남마을에 살던 분이었다.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자식의 머리를 감고 가는 걸 상상해봤느냐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군인이 참수를 한 뒤 그 머리를 어머니에게 주면서 갖고 가라고 했다는 의미였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 만난 생존 피해자들은 특히 이야기를 꺼렸다. 한국에 대한 불신이 강해서 다른 사람이 겪은 일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 정부를 신뢰하지 않지만 자신을 ‘제주도 사람’으로 여겼다.

“살암시난 살앗주”

“내가 글을 알면 소설책 한 권은 쓸 거야.” 가족을 잃고 배움의 기회를 놓친 피해 생존 여성들이 말했다. ‘주운’ 글이라고 했다. 간판을 보며 단어째 한글 모양을 익혔다. 잿더미가 된 가정을 일으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여성의 노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나무로 집을 짓고 물질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4·3을 겪은 여성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살암시난 살앗주.” 허 기자도 이 말을 가족에게 들은 적이 있다. “외삼촌이 4·3 당시 형무소에 들어가 7년6개월을 살다 나왔다. 외숙모에게 외삼촌이 들어갔을 때 어땠느냐고 물으니 그거 생각하면 못 살지, 잊어버려야지 하면서 ‘살암시난 살앗주’ 하더라. ‘살아야 하니까 살았다. 살다 보니 살아졌다’ 이런 말인데 생존의 열망 같은 것도 읽힌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전시물 ‘백비’가 있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불려온 제주4·3이 아직 정식 이름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비석이다. 4·3은 40여 년간 폭동으로 규정됐다.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에 무게를 둔 이들은 항쟁이라 부르자고 한다. 항쟁적 측면이 존재하지만 무장대의 살상 등 과오를 고려해 사건이라고 부르자는 쪽도 있다. 사건과 항쟁 그 어디 중간쯤에 있지 않나 하는 게 허호준 기자의 생각이다. “무장대에 의한 학살도 학살이다. 그렇지만 전개 과정에서 항쟁적 측면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사건과 항쟁 그 어디 한 지점에 있지 않을까.” 동학난이 동학농민혁명이 되기까지도 100년 걸렸다. 4·3의 ‘정명’ 운동은 오랜 연구와 성찰 끝에 사회적 합의에 이를 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명 운동 말고도 남은 과제가 많다. 4·3 수형인에 대한 재심은 ‘현재진행형’이다. 2주일에 한 번 제주지방법원 203호 법정에서 재심이 열린다. 허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의 법정은 ‘기억 투쟁의 장’이다.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가족이 70여 년 전 자행된 불법적인 재판과 4·3의 진실을 법정으로 소환한다. 올해 1월까지 무죄를 받은 4·3 수형 희생자들이 1200여 명에 이른다. 전체 수형 희생자들의 절반 정도다.

가해에 대한 기록을 찾는 일도 남은 과제라고 허호준 기자는 말한다. 처벌을 떠나 누가 가해자인지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희생자는 저렇게 많은데 가해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하루에 300여 명이 학살당한 북촌리의 경우도 중대장, 대대장 이름은 알지만 누가 총을 쐈는지 모른다. 또 무장봉기 주도 세력이라는 이유로 4·3 희생자 선정에서 탈락한 희생자와 유족들이 있다. “특별법이 규정하는 희생자는 희생된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데 그 사람들은 제외되는 거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해 세력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송요찬(4·3 당시 지휘관)은 훈장을 다 반납해야 하나. 특별법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화해와 상생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 시대에는 배제자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나 생각한다.” 이번 현수막 논란처럼 4·3의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세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바른 길을 찾는 운동 역시 필요하다는 견해다.

지금은 관광객 사이에서 이름난 함덕해수욕장 인근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시사IN 이명익
지금은 관광객 사이에서 이름난 함덕해수욕장 인근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시사IN 이명익

허호준 기자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정년인 올해까지 평생 제주에서 일했다. 어쩌다 육지에 가 호남고속도로를 타면 야트막한 산맥이 펼쳐지는데 답답한 기분이 든다. 매일 보는 바다가 안 보여서다. 엊그제도 4·3을 경험한 할머니를 만났다. 어떻게 사셨냐고 묻자 바다 때문에 살았다고 답했다. 바다를 보면 좋고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고. 제주에서 4·3을 피하고서는 기자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면에서 그에게 4·3은 운명이었다. 하다 보니 깊숙이 발을 담갔다. 48년 만에 유해 11구가 발견된 다랑쉬굴 발굴 사건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4·3특별법 제정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발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다”라고 말할 때는 감동받았다. 4·3 당시 계엄령이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써서 보수단체에 고발당해 서울까지 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년을 앞둔 지금 좀 더 열심히 해서 4·3 진상규명에 일조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그는 곧 〈한겨레〉에 발행될 ‘4·3 기획기사’를 잘 쓰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의미 있게 잘 하고 싶은데 시간은 촉박하고 아이디어는 안 나온다.” 30여 년으로는 부족했던 셈이다.

허호준 기자와 헤어져 그의 책에도 나오는 북촌마을 너븐숭이 애기무덤을 찾았다. 1월17일 단 하루 북촌리 학살사건 희생자는 300여 명이다. 아이들이 묻힌 무덤 앞에는 천으로 만든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반인륜적 학살이 이루어져 차마 책에 그 내용을 담을 수 없었다는 장소는 북촌리에서 멀지 않은 함덕해수욕장 근처다. 아직 쌀쌀한데도 해변과 카페 앞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제주를 오갈 때 여전히 남아 있는 4·3의 흔적을 잠시라도 떠올려주기를 바란다는 책 속 글귀가 떠올랐다.

기자명 제주 / 글 임지영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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