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이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와 한 인터뷰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 전반에게 공감을 끌어냈다. ⓒ빅히트 뮤직 제공
RM이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와 한 인터뷰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 전반에게 공감을 끌어냈다. ⓒ빅히트 뮤직 제공

최근 케이팝 신을 떠들썩하게 한 화제 가운데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El Pais)와 인터뷰한 RM이 있다. 인터뷰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케이팝의 엄청난 성공이 아티스트를 비인간화한다고 생각하나요?’ 한국 매체였다면 아마 질문 사전 수급 단계에서 과감히 삭제당했을 이 질문에 RM은 대답한다. 개인을 위한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것이 케이팝을 빛나게 한다고. 20대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로 안무와 영상,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싸우고 그 모든 것으로 인해 빅뱅이 일어난다고.

뒤이은 질문은 좀 더 핵심을 파고든다. “아이돌 시스템은 비인간적인가요?” RM은 이 질문에 좀 더 복합적으로 답한다. 우선 자신이 그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회사가 싫어한다며, 그 비인간적인 면이 케이팝의 특별함과 결국 어느 정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계약서나 수익분배, 교육과 심리상담 측면에서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실질적 변화도 언급한다. 더불어 같은 질문에 조금이라도 부정적 뉘앙스로 대답할 경우 ‘케이팝은 젊은이들을 파괴하는 끔찍한 시스템’이라며 쉽게 장작을 넣어 불을 때는 언론의 태도를 따끔히 꼬집는 것도 잊지 않는다.

케이팝의 경계를 넘은 이들에게도 특별히 호평받은 건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젊음에 대한 숭배, 완벽함에 대한 숭배’를 예로 든 기자의 질문에 RM은 ‘서양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로 운을 뗀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았던, 그러면서도 수세기에 걸쳐 타국을 식민지 삼아 부를 축적한 1세계인들에게 끊임없이 ‘한국에서의 삶에 스트레스가 너무 많겠다’는 질문을 꾸준히 들어야만 하는 한국인의 삶. 이 대답은 해당 인터뷰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한국은 70년 전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맹숭맹숭한 아이돌의 말을 만들어온 세상

이 인터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케이팝 지문이다. 세계적 스타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젊은이로서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을 경험에 비추어 담은 답변들. 이 인터뷰가 케이팝 팬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 전반에게 공감을 끌어낸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인지한 위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을 담백하고 무르지 않게 설명하기. 그런 현시대가 한국 젊은이들을 어떻게 지치게 하고 있는지, 너무 빠른 속도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 부가적 질문이 나왔다면 더 흥미로운 내용이 이어졌겠지만, 인터뷰는 이후 RM의 앨범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수집가적 면모,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방향을 돌린다. 새 앨범 발표 후 프로모션을 통해 해외를 찾은 음악가 인터뷰로서 어쩌면 이쪽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케이팝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아이돌의 입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신선함도 컸다. 여전히 아이돌을 인형 취급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이돌이 자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실상을 보자면 크게 틀리지 않은 분석일지도 모른다. 세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아이돌은 연습생이라는 단체 생활 속에서 10대의 삶을 영위한다. 즉,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혼자가 아닌 연대책임으로 자연스럽게 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다는 의미다. 연대의 범위는 작게는 내가 속한 그룹, 발언 수위에 따라 소속사 관계자, 넓게는 팬덤까지 뻗어나간다. 나의 말로 내가 아닌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걸 직간접으로 반복 학습하는 상황 속에서 거르고 깎인 안전한 답변만 양산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듯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현실은 물량 공세로 대결하는 케이팝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더욱 강고해졌다. 다각화된 SNS 활용에서 소속사의 자체 제작 콘텐츠를 비롯해 24시간 쏟아지는 각종 ‘떡밥’,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라이브 방송까지. 무엇이든 지켜보는 거대한 사우론의 눈 아래 예상치 못하게 샌 바가지는 순식간에 박제되어 영원히 인터넷 세상을 떠돈다. 요즘 사랑받는 남성 아이돌의 덕목 가운데 ‘조신함’이 있는 건 괜한 일이 아니다. 슬픈 건 말실수가 아닌,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표현해도 문제시되는 상황이 그만큼 많다는 점이다. 흔한 베스트셀러 한 권, 유명 브랜드의 휴대폰 케이스 하나만 사용해도 사상검증의 단두대에 오르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돌에게 정치와 종교, 젠더나 섹슈얼리티 같은 이슈에 대한 자유 발언을 요구하는 건 사실상 어불성설이다.

출발점은 자신의 발언이 한 사람의 책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한 가지치기였지만, 결국 아이돌이 말하는 범위를 규정해온 건 그 말을 들어온 세상이다. RM이 인터뷰에서도 직접 언급하듯, 대다수의 언론은 아이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전달하는 데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루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수십, 수백 개씩 양산되는 기사들 가운데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거나 의미 있는 분석을 담은 글도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한 오해와 자극의 한판 장이 벌어지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다. 이는 발언을 한 아이돌이 유명할수록, 또 그 말이 평소 아이돌에게 들을 수 없는 소신을 담은 내용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오랜 데이터 수집을 통해, 말하고 수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말하지 않고 원론만 반복하는 것이 낫다는 업계의 결론 아래 지금의 맹숭맹숭한 아이돌의 말이 탄생했다. 리스크도 없지만, 재미도 없다. RM의 말이 저렇게 ‘숙성’해 진짜 말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그렇게 고민하고 번뇌해 끝내 자기 말을 하는 아이돌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담는 언론을 보고 싶다. 아이돌을 직업으로 삼아 지금을 살아가는 젊음의 말을 듣고 싶다. 아이돌의 말을 더 듣고 싶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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