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더글러스가 출연한 스릴러 영화 〈위험한 정사〉는 미국에서만 8주 동안 1위를 기록한 흥행작이다. 한국에서는 1988년 개봉했으나 보름 만에 극장에서 내려왔다. 한국 관객들이 외면한 이유는 영화보다는 뱀 때문이었다. 영화가 상영된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 객석에서 뱀 네 마리가 발견된 데 이어 신영극장 여자 화장실에서 뱀 열 마리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영화시장이 개방된 뒤 미국 영화사가 세운 UIP코리아의 첫 직배(직접 배급) 영화였다. 뱀 소동은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배후 조종 혐의로 영화감독 두 명이 구속됐다. 미국 영화 직배 반대 운동을 하던 영화인들이 뱀 장수를 사주했다는 경찰 발표가 있었다. 영화인들은 〈위험한 정사〉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지만 ‘거대한 개방’의 흐름을 실뱀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997년 여름, 중국에서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시청률이 15%를 기록했다. 한국이 수출한 첫 드라마였다. 타이완도 관심을 보였다. 타이완 케이블 채널이 MBC프로덕션에 제안한 드라마 구매 가격은 당시 잘나가던 일본 드라마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낮은 가격이지만 우리 상품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수출 계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외환위기가 닥쳤다. 타격은 아시아 국가 전체에 왔다. 타이완에서 한국 드라마를 더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환율 때문에 일본 드라마를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 계약 덕분에 후속 계약을 빠르게 진행했다. 1998년 한국 드라마 수출액은 전년의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위의 두 사건은 김윤지 문화산업 연구자가 꼽은 한국 문화산업사의 9가지 결정적 장면 일부다.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BTS 노래가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요즘, 직배를 막기 위해 극장에 뱀을 푸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비현실적이다. 고작 30년 전 일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경제지 기자를 거쳐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문화콘텐츠산업, 경제정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김윤지 연구자가 영화시장 개방부터 BTS에 이르는 30여 년 한국 문화산업사를 정리해 책으로 냈다. 〈한류 외전〉에서 그는 한류 상품 개별의 성공 요인보다 ‘상품을 지속적으로 배출해낸 축적의 과정’을 좇았다. 핵심은 산업화였다. 언뜻 한류와 연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사건과 정책, 기술 발전이 한데 만나 지금의 한류를 만들었다. 그에게 한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 대해 물었다. 대화는 뱀 투척 사건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문화산업사를 정리한 책 〈한류 외전〉의 저자 김윤지 연구원. ⓒ시사IN 신선영

산업사의 측면에서 한류를 짚었다. 극장가 뱀 사건을 시작점으로 삼은 게 인상적이다.

특정 문화상품에 대한 인기 요인이나 팬덤에 관한 연구는 많은데 콘텐츠를 공급하는 쪽의 연구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류 역사를 보면 공급 측면이 크게 변화해왔다. 산업이 어떤 식으로 변했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요인이 뭐였는지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루과이라운드 또는 영화관에 뱀이 풀린 사건을 시작점으로 본 이유도 그 시점에 시장이 한꺼번에 개방됐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대중문화산업은 우리끼리 잘 즐기면 되는 정도의 규모였다. 시장이 개방되는 순간 외국 자본이 몰려오고, 그럼 우린 고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생겼다. 뱀을 풀 정도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장이 개방됐으니 뭔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여론이 처음 형성됐다.

결정적 장면 중 ‘〈쥬라기 공원〉 1년 흥행수입이 우리나라 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해서 얻는 수익과 같다’는 문구의 탄생기도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자주 언급되었던 말이라고.

한류에서 정책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논의할 때마다 나오는 문구다. 이 효과로 산업정책이 시작되었다고 볼 정도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일깨운 말이라고 평가된다. 처음 자동차에 빗댄 수출 효과가 나왔을 때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영화 같은 분야가 어떻게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와 비교될 수 있는가’ 싶어서다. 이 화두가 김대중 정부 때까지 이어졌다. IMF(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존과 다른 산업 동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때 마침 (정부가) 벤처투자자들에게 영화 투자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투자가 시작됐고 당시 투자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 식으로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정부 주도로 한류를 키웠다는 식의 접근은 좀 문제가 있다. 케이팝만 해도 또 다르다. 자료를 보면 저래도 되나 싶은 흔적들이 있다. 케이팝이 잘나가기 전에는 가요나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를 알려야 한다는 식의 뉘앙스도 있었다.

한류에 대해 ‘설계되지 않은 성공’이라고 했는데.

어느 논문에 나온 표현인데 개념이 와닿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가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어느 한 가지 때문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하기 어렵고 여러 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갑자기 시장개방이 이루어졌고 외환위기를 계기로 드라마 수출 시장이 열렸다. 동아시아 경제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 게 우리로서는 기회였고 정부 정책도 마침 잘 나왔다. 아이돌이 인기를 얻었고 초고속인터넷이라는 기술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각각 요인들의 발생 원인은 있지만 누가 한꺼번에 조율하는 건 아니다.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문화산업정책이 본격적으로 행정 체계를 갖춘 시기를 김대중 정부로 본다. ‘팔길이 원칙’도 이때 나왔는데.

‘지원하지만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이때 세웠다. 문화산업정책의 지원 논리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문화산업의 특성을 잘 이해한 말인 것 같다. 행정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팔길이만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화는 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정부가 뭔가 정하고 골라서 지원해주면 잘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연가〉가 산업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대장금〉이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당시 한류 드라마가 아시아에서 잘 팔리다 보니 ‘문화적 근접성’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시아권의 문화가 비슷하니까 같은 아시아에서 한국 드라마가 잘 맞는다는 건데 아시아를 넘어 시장이 넓어지니까 나중에는 문화적 혼종성(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이면서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라는 틀을 인용했다. 무엇보다 초고속인터넷의 등장이 컸다. 문화산업에서는 기술 환경의 변화가 굉장히 중요한데 초고속인터넷과 OTT의 등장이 두 번의 기점이라고 본다. 이전까지 드라마 수출 과정이 까다로웠다. 방송사가 국가별로, 방송사 채널 단위로 영업을 했다. 시도를 많이 했지만 아시아 국가 말고는 뚫기가 힘들었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초고속인터넷이다. 드라마 파일을 공유할 수 있게 됐고 필요한 자막도 인터넷 사이트 안에서 해결했다. OTT 시대가 열리면서는 한 번 더 장벽이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 준비가 미흡해 상대적으로 수익이나 저작권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한국에서도 미드(미국 드라마) 전성기가 있었는데 당시 대중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수준 높은 미드를 접하며 한국 드라마가 시시하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드라마가 유통 당시 저작권 정책을 제대로 못 펼쳐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 데 비해 돈을 못 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느슨한 정책 때문에 한류가 커질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OTT로 넘어가기 전 한국 드라마의 가치가 평가받은 시기다. 일본은 저작권 정책이 까다롭다. 관련 위원회에서 완벽하게 합의되지 않으면 수출을 못한다. 저작권 문제는 깔끔한데 그 때문에 수출되는 작품이 얼마 안 된다. 당시에는 일본의 저작권 정책을 부러워했는데 우리의 여건이 거꾸로 시장을 넓히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2006년 1월 스크린쿼터 사수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는 배우 안성기씨(맨 오른쪽).ⓒ연합뉴스
2006년 1월 스크린쿼터 사수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는 배우 안성기씨(맨 오른쪽).ⓒ연합뉴스

한국 영화가 산업화해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기에 여러 상상력이 발휘됐다. 1990년대 이전에는 한국 영화로 돈을 벌 수 없었다. 외국 영화로 돈을 벌고 한국 영화는 그냥 극장에 거는 정도였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돈도 벌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할 무렵 마침 대기업이 들어왔고 합이 잘 맞았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오자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해 빨리 물러난다. 그때 벤처투자자들에게 길이 열였다. 코스닥의 시대다 보니 영화사가 투자 대상이 되었다. 투자로 인해 규모가 커졌고 산업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다. 투자자와 영화 제작자의 성향이 달라 충돌이 많았지만 2004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구축해 관객 수가 몇 명인지 투자를 위한 기초 데이터를 공유했다. 금융자본이 문화산업전문회사(SPC)를 만들어 프로젝트 단위의 투자도 이루어졌다. 나중에 다시 대기업이 들어왔을 때 문화 사업의 경험이 없는 신생 기업이라 조심스러웠고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업계 전문가들과 손을 잘 잡은 쪽이 살아남았다.

요즘 극장 상황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전망하나?

영화관이 옛날과 같은 영화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번 시장이 죽으면 영상산업의 흐름도 끊기게 된다. 산업 측면에서는 국내 OTT가 기존의 영화관 같은 역할을 해야 투자도 제작도 위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다. 외부 투자를 받은 시리즈나 영화들을 배포하고 수익도 나누는 구조를 말한다. OTT 시대가 되고 보니 투자는 다 OTT가 한다. 투자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국내 OTT는 자본력 싸움에서 어려운 입지에 있다. 어차피 국내 시장만 겨냥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해외로 가려면 현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투자자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형태가 가능하려면 영화관 통합전산망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봤는지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고 수익도 거기에 맞춰 나누고 이런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케이팝의 해외 진출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내 시장은 너무 작고 해외 반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니 자본이 부족하다. 영화는 벤처투자자들이 투자해주고 드라마는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대는데 케이팝은 해외로 가려고 보니 돈이 없었다. 코스닥에 등록해야만 했다. SM이 가장 먼저 활로를 열었고 다른 기업들도 뒤따랐다. 코스닥 입성으로 케이팝 기획사가 정상적인 수익 모델을 가진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케이팝 분야에서 문화 기사보다 투자 기사가 많이 늘어난 것도 산업화로 인해 나타난 변화다.

BTS의 성공이 산업 측면에서 남긴 건 뭘까?

우리도 공연 수익이 굉장히 클 수 있다는 걸 처음 확인시켜주었다. 빅뱅이나 2NE1도 외국 공연을 했지만 규모 면에서 달랐다. 케이팝 기업의 수익은 크게 공연, 음원이나 음반, IP(지식재산권)로 나뉘는데 각각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면서 가야 한다. 공연 수익이 약했는데 BTS로 인해 케이팝의 사이즈가 달라졌다. 더 중요한 것은 팬덤을 수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케이팝 산업을 일으킨 게 팬덤이다. BTS에서 끝난 게 아니라 다른 아이돌 그룹과도 연계가 되어 있다. 해외 팬들은 이제 국내 아이돌 팬클럽이 하듯 포토카드를 100장씩 사 모은다. 영업을 직접 뛰는 셈인데 요즘은 너무 팬덤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런 말이 나올 때가 된 것 같다.

2022년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BTS 콘서트를 찾은 팬들. ⓒ연합뉴스
2022년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BTS 콘서트를 찾은 팬들. ⓒ연합뉴스

요즘 OTT에서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은 어떻게 보나?

넷플릭스 순위 사이트를 자주 체크하는데 나라별 순위를 볼 때 놀란다.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 넷플릭스에선 톱10 중 7개가 한국 작품이기도 하다. 넷플릭스도 그걸 아니까 아시아 태평양 시장을 개척하려면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사실 죽어가던 넷플릭스를 일으켜 세운 것이 한국 드라마다. 꾸준히 투자할 것이다. 문제는 너무 넷플릭스 중심으로 가면 작품이 전 세계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저작권 때문에 수익을 많이 낼 수 없게 된다. 요즘 화두는 IP인데 ‘우영우 모델’처럼 제작사가 IP를 가지려면 뒷배가 필요하니 또 돈 싸움이 된다. 자본이 어느 정도 있으면 ‘넷플릭스 너네에게 조금만 받고 팔래’ 이렇게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면 제작비를 다 받고 IP를 넘기게 된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투자자와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류는 결과적으로 ‘설계되지 않은 성공’이었지만 ‘개방’에 대응하는 자세가 동력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루과이라운드 당시 논란의 핵심이 쌀과 영화였다. 둘 다 중요한 산업인데 지금 와서 굉장히 차이가 난다. 쌀은 계속 어렵다. 지원금을 주는 제도라 일시적으로 살아남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산업으로 바꿔나간 쪽이 살아남는게 아닌가 싶다. 영화가 그걸 해냈다. 개방이라는 힘든 조건 속에서 산업으로 만들어 살아남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의 체급 차이가 말도 안 되게 컸다.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영화시장 하나를 개방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스크린쿼터 논의가 있을 때 시장을 여느냐 마느냐로 굉장히 치열했다. 1차 논란(1998년)과 2차 논란(2006년)의 성격이 다르고 결국 축소되었지만 그사이 영화산업이 성장했고 여러 제도가 도입되었다. 1차 논란 때 바로 축소해버렸다면 지금 같은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싸워야 얻어낼 수 있는 것 같다.

현재 우려하는 점이 있거나 앞으로 눈여겨보는 분야가 있다면?

OTT 시대에 접어들어 한국 드라마는 두 가지 한계에서 벗어났다. 하나는 제작비고 다른 하나는 소재다. 방송국에서 틀어야 하니까 소재가 한정적이고 제작비 규모도 적었는데 OTT가 들어오며 소재도 다양해지고 제작비도 올랐다. 그 시기 나온 드라마를 ‘K드라마’라고 해서 기존 한류 드라마와 좀 다르게 본다. 과거를 돌아보면 산업이 계단식으로 발전해왔다. 한번 치고 나갔다가 정체기가 온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이 잘되었다가 기대했던 〈태양사신기〉 이후 정체기가 왔다. 지금 그런 시기가 온 것 같다. 비슷한 소재가 반복되거나 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라 남들이 못 만드는 걸 만든다고 하는데 그 역동성이 살아나야 할 것 같다. 다음 눈여겨보는 쪽은 웹툰이다. 해외 작가들도 한국 플랫폼에 주목하고 있고 인재가 몰리는 분야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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