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4일 〈스트릿 우먼 파이터〉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리정, 가비, 효진초이, 안쏘, 리헤이, 모니카, 허니제이, 아이키(왼쪽부터). ⓒMnet 제공

여자가 춤을 춘다. 그리고 여자가 싸운다. 별다른 꾸밈 없이 깨끗한 사실만 적시한 이 문장들은 그러나 듣는 이로 하여금 분명 달갑지 않은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에너지와 기교보다는 귀여움이나 애교를 강조한 춤사위들, 뚜렷한 목표를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냉혹한 승부가 아닌 서로를 견제하며 헐뜯는 게 주가 되는 미묘한 공기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온 여성과 춤, 여성과 싸움의 이미지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흡사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정된 이미지를 심어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리트댄스 크루를 찾겠다’며 야심 차게 출발한 엠넷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이런 찜찜한 분위기에 도전장을 내던지다 못해 문을 발로 걷어차며 등장한 프로그램이다. 평생을 걸고 다져온 춤 실력으로 정면 승부를 하고자 다짐하는 출연자들은 장면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합으로 ‘이리 오너라!’를 외친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덟 크루 멤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듯 두둑한 배짱이 허세가 아닌 실력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탄탄한 실력은 물론 개성으로 빛나는 여덟 명의 리더 아래 모인 47명의 댄서는 모두 자신만의 서사와 자랑스러운 커리어를 갖추고 있다.

‘댄서들의 댄서’라는 평을 받는 모니카가 이끄는 ‘프라우드먼’과 대한민국 걸스 힙합과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허니제이의 ‘홀리뱅’이 대선배 격이라면,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댄스팀 저스트 저크(Just Jerk)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멤버로 활약했던 리정의 ‘YGX’와 리더 아이키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1999년에서 2003년생 사이로 이루어진 ‘훅’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신의 젊은 피다. 유명 댄스 스튜디오 원밀리언의 초기 멤버로 잘 알려진 효진초이의 크루 ‘WANT’나 청하·카드(KARD)·에스파 등의 안무를 담당하며 케이팝 신의 떠오르는 브레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라치카’, 각각 모던함과 섹시함을 앞세운 ‘WAYB’와 ‘코카N버터’ 모두 실력이면 실력, 개성이면 개성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다.

지금 한국에서 춤이라고 하면 손꼽히는 이들을 모았으니 보는 사람들은 그저 잘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올리면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새삼 손끝이 차가워진다.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곳은 다름 아닌 엠넷. 대한민국의 길지 않은 서바이벌 역사에서 찬란한 성공과 끔찍한 바닥을 전부 경험한 곳이다. 특히 〈언프리티 랩스타〉(2015~2016)나 〈굿걸〉(2020) 등 여성 출연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일수록 더 깊은 함정을 파놓는 것으로 명성 높은 이곳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밑그림을 제시했다. 첫 방송 전 공개된 예고편에는 폭발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출연자들의 반응에 음소거 효과를 남발하는 광경이 담겼다. 이는 이 프로그램이 단순히 춤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장이 아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아비규환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경고문 같았다. 낯설 것도 없었다. 앞서 언급된 과거 프로그램들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늘 처했던 그 상황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결과의 무게를 견디는 게 어른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위)를 만든 엠넷은 그동안 〈언프리티 랩스타〉 〈굿걸〉 등을 방영했다. ⓒMnet 화면 갈무리

어느 정도 정해진 파국을 끝내 이겨내고 프로그램을 성공으로 이끈 긍정적 힘은, 결국 진짜 춤으로 진짜 싸움을 하려는 출연자들의 실력과 의지, 그리고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에서 왔다. 상대 팀의 멤버에게 ‘노 리스펙트(No Respect)’ 스티커를 필수로 붙여야만 하고,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1승의 간절함에 정신력이 무너져가는 상대를 희생양으로 삼고, 이제는 누군가의 뒤에 서는 것이 아닌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이들을 다시 누군가의 백업으로 보내는 압박 롤러코스터 같은 진행이 이어지지만, 출연자들의 에너지와 결기는 그 모든 부비트랩을 스스로 찢고 나온다. 오해와 불화 속 멀어진 허니제이와 리헤이가 다시 춤으로 만나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순간 사람 사이의 질긴 인연이, 무릎 부상에도 아랑곳없이 멤버들을 북돋는 효진초이의 모습에서는 좋은 리더의 조건이 떠오른다. 비참할 수밖에 없는 탈락의 순간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책임을 지고 그 무게를 견디는 게 어른이다. 어른이 됩시다, 우리”라고 담담하게 전하는 모니카의 말은 ‘진짜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포화 속의 평화’와도 같다. 여자, 춤, 싸움이 있는 곳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댄스 파이터들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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