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사진) 씨는 2월7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1심 소송에서 이겼다. ⓒ시사IN 신선영

한국인이 즐겨 찾는 베트남 중부 휴양도시 다낭에서 12㎞ 떨어진 꽝남성 디엔반현에 퐁니·퐁넛이란 마을이 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12일 오전, 이 마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수색 정찰 도중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빵을 나눠줄 테니 모여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모이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74명이 즉사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이 등이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8세 소녀 응우옌티탄도 끼어 있었다. 올해 63세인 응우옌티탄 씨에게는 그날의 참상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1초 단위로 선명하다. “당시 우리 마을은 남베트남 군인 가족이 많이 살아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날 한국군이 느닷없이 들어와 사람들을 줄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 74명이 죽은 현장에서 나는 배에 총을 맞고 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로 기어다녔다. 오후에 들어온 미군이 나를 발견해 헬기로 다낭에 있는 미군 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응우옌티탄 씨는 일가족 다섯 명을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녀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다낭에 있는 숙부 댁으로 들어가 아기를 돌봐주며 자랐다. 그녀는 55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에 짓눌려 산다. “창자가 나온 배를 움켜쥐고 구조하러 온 미군 헬기를 탔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비행기 소리나 헬기 소리만 들으면 놀라 정신없이 뛰곤 한다.”

평생을 민간인 학살 생존자로 고통 속에 살아온 응우옌티탄 씨는 퐁니·퐁넛 학살 55주기를 닷새 앞둔 지난 2월7일, 한국 법원으로부터 뜻깊은 ‘결정’을 받았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그녀가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 1심에서 재판부가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응우옌티탄의 부모와 언니, 남동생 등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오빠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판시했다.

판결은 민간인 학살이 특정 군인 개인의 일탈이나 게릴라전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 한국군의 작전 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어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정부 측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응우옌티탄)에게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사유가 있었다”라며 배척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1심 승소 소식을 접한 응우옌티탄 씨는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영혼들이 저와 함께하며 응원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영혼들도 이제 안도할 수 있을 것이고, 위로가 될 것 같아 무척 기쁘다”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은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한 지 11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다. 한국 시민사회는 지난 20년간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에 골몰해왔다. 이를 위해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결성해 지원했다.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는 한국인이 많이 찾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12㎞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다. ⓒVnExpress 갈무리

줄곧 모호한 태도 취한 한국 정부

2013년부터 한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증언 활동을 펴기 시작한 응우옌티탄 씨는 2015년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로서는 최초로 방한해 한국 정부에 책임 있는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녀는 당시 〈시사IN〉과 한 인터뷰에서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을 상대로 진실규명과 용서, 화해를 호소했다(제396호 ‘여덟 살 아이를 향한 한국군의 총구’ https://www.sisain.co.kr/22926 기사 참조).

그녀는 2018년 한국 시민사회 네트워크 주도로 서울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도 원고로 참여했다. 이 민간 차원의 ‘모의 법정’이 모델로 삼은 행사가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2000년 일본 도쿄)’이다. 김영란 전 대법관 등으로 구성된 당시 재판부는 한국에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배상과 진상조사를 하라고 판결했다. 이어 응우옌티탄 씨는 2019년 청와대를 방문해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유가족 103명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때 서울지방변호사회와 베트남 법률가협회도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 조치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020년 4월 제20대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하자는 특별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줄곧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명확히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취했다. 길고도 지루한 한국 정부의 외면 속에, 응우옌티탄 씨는 일본 정부의 외면으로 한국의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걸었던 길, 즉 ‘위자료 청구 소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2020년 4월 국가배상 소송을 냈다.

퐁니·퐁넛 학살은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사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증거자료와 증인이 있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참전 관련 단체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은 대부분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의 교전’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퐁니·퐁넛 학살 사건의 진상을 통해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였음이 드러났다.

1968년 1월30일 시작된 베트콩의 구정 공세에 맞서 미군과 동맹국은 총반격 작전을 벌였다. 1968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 수는 총 4만9869명이었다. 꽝남성 디엔반현에는 한국 해병대 청룡여단이 주둔했다. 당시 월맹(월남민주동맹)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에 맞서 디엔반현에서 청룡여단이 베트콩 수색 소탕작전을 전개해 월맹군 3사단과 한 달간 혈투 끝에 격퇴했다. 그 직후인 1968년 2월12일 청룡부대 일부(제2해병여단 제1대대 1중대)가 퐁니·퐁넛 마을 주위를 수색하다가 마을 주민을 불러 모아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하자 미군 측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마을이 남베트남 군인 가족이 몰려 살던 동맹군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퐁니·퐁넛 학살 이후 현장에 들어가 확인한 뒤 사진을 채증했다. 이 사진과 조사 자료들은 주월 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보고되었다. 미군 조사 자료는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통해 다시 한국의 군 당국에 넘어왔다. 퐁니·퐁넛 학살은 당시 한국과 남베트남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다.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당시 중앙정보부를 시켜 이 사건을 조사했다. 중앙정보부는 퐁니·퐁넛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 최 아무개 중위 등 3명을 조사한 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확인하고 조사 목록과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까지 조사 결과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베트남전 종전 30년 만인 2000년 6월 ‘기밀 해제’된 문서에는 한국군의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기록이 나왔다. 미군 기록에는 한국 해병대(청룡부대)가 총격을 받아 한 명이 부상하자 근처에 있던 퐁니·퐁넛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와 부녀자를 줄 세워 74명을 학살했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주베트남 미군사령부 감찰부에서 현장조사를 벌인 후 주베트남 미군사령관과 고위 장성들에게 보낸 보고서와 학살당한 어린이들의 사진으로 이뤄져 있다.

응우옌티탄 씨의 이번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한국 재판부는 국정원으로 하여금 이 사건 조사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처음에는 ‘외교적 불이익’을 내세워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거듭 공개 명령을 받자 이번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다시 거부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베트남전에 참전한 일부 군인들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적극적으로 학살 사건을 증언했다. 이 재판 증인으로 나온 해병대 출신 류진성씨는 자신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당시 한국군이 퐁니·퐁넛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류씨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정한지 내가 보고 행동한 것을 통해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2018년 4월23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 열린 ‘미안해요, 베트남’ 릴레이 기자회견에 참석한 응우옌티탄(가운데) 씨가 사과와 위로의 뜻을 담은 꽃을 전달받았다. ⓒ연합뉴스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

현지 피해 유족들의 조사와 주장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 9000여 명에 이른다. 현지에 위령탑이 세워진 대표적인 사건들은 퐁니·퐁넛 학살, 빈안 학살 등이 있다. 빈안 학살은 1966년 맹호부대에 의해 민간인 1004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하미 학살은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서 1968년 2월22일 역시 해병대 소속 청룡부대에 의해 민간인 총 135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보다 앞선 1966년 12월3일, 12월5일, 12월6일에는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에서 청룡여단에 의해 주민 430명이 희생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중 12월6일에는 빈호아사 꺼우 마을의 동코 우물가에서 벌어진 학살로 141명이 목숨을 잃었다. 처음 세운 위령비에는 한국군의 학살로 모두 131명이 죽었다고 적었으나 2013년에 위령비를 새로 건립하면서 학살 피해자를 추가로 조사하여 모두 141명의 희생자 명단이 담긴 위령비를 세웠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민간인 36명을 몰아넣고 학살했다고 하는 쭈옹딘 폭탄 구덩이 옆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들어서 있다. 증오비에는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빈호아 학살은 엉뚱하게도 영국과 일본인들이 나서서 당시 희생당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세웠다. 1994년 베트남에 있는 미라이 박물관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자료를 본 한 영국인이 모금 운동을 벌여 위령비를 건립했다. 또 일본의 민간단체 피스보트(Peace Boat)가 이 지역을 방문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초등학교를 지어주었다.

이번에 1심에서 승소한 응우옌티탄 씨 말고도 수많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 그동안 응우옌티탄 씨와 연대하며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공론 형성을 위해 노력해온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에 전향적 태도를 주문한다. 현재 국회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이 계류돼 있다. 이 법이 조속히 제정되어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제도적 차원의 기반을 확립하고, 관련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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