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베트남전 포로로 잡혀 북한으로 강제 이송된 안학수 하사의 동생 안용수 목사가 미국 국방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종전 45년이 넘도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포로와 그 가족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국방부를 상대로 국가의 본분을 저버린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고 있다. 더 나아가 스스로 진상규명에 뛰어들어 박정희 정권과 군부가 감춰온 베트남전 당시 한국인 포로의 진실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다.

〈시사IN〉이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두 가지 기밀 해제 문서들 또한 그들의 피눈물이 밴 산물이다. 두 문서는 베트남전 한국인 포로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해묵은 숙제를 일깨워준다. 하나는 미국 국방부 내의 ‘전쟁포로 및 실종자 담당부서(DPMO)’가 작성한 베트남전 기간 한국인 포로와 실종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또 하나의 비밀문서는 박정희 정권 당시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포로 가족을 상대로 수십 년 동안 벌여온 ‘간첩 공작’이다.

1990년대 말에 기밀 해제된 미국 국방부의 포로 관련 문서에는 한국인 실종자와 포로 18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미국 국방부는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을 전쟁포로(PP), 포로수용소 사망자(KK), 전사자(BB), 송환자(RR), 협상에 따른 유해 송환자(NR), 무단이탈 및 탈영자(AA) 등으로 분류했다. 이 명단에서 한국인 18명은 전쟁포로(PP)나 포로수용소 사망자(KK)다. 무단이탈 탈영자(AA)로 분류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중 군인은 박성렬 병장, 김인식 대위, 정준택 하사, 안학수 하사, 조준범 중위, 안삼이 상병, 이용선 병장, 박양정·임준성·이윤동씨 등이다. 민간인으로는 김성모·김흥삼·민경윤·이기영·김수근·이창훈·신창화·채교상씨 등이 명단에 올라 있다. 민간인 가운데 김성모씨와 김흥삼씨는 ‘포로 수감 중 사망자’로 분류됐다.

미국 국방부의 포로 관련 문서에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연합군 포로 명단도 실려 있다. 모두 3000여 명에 달한다. 연합군 포로의 경우 대다수가 미국과 월맹(越盟, 베트민)의 지난한 협상을 거쳐 생환되거나 유해라도 송환받았다. 하지만 한국인 포로 중에는 그런 사례가 단 한 명도 없다.

ⓒ연합뉴스1966년 7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모습.

“1인당 3000달러에 북으로 강제 이송”

미국 국방부의 포로 관련 문서는 2005년 기자가 베트남전 종전 이후 최초 입수해 공개한 한국 외무부 비밀문서 〈베트남 전쟁 포로 및 실종자 송환〉(CA0006682)과 일부(15명) 명단이 겹친다. 미국 국방부와 한국 외무부가 각각 작성한 베트남전 포로 관련 비밀문서를 비교 분석하면 한·미 양국 정부가 한국군 포로 송환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미군은 물론 박정희 정권조차 종전 무렵까지 한국인 포로와 실종자에 대해 철저히 은폐·왜곡했다는 사실만 드러난다.

국군 포로는 베트남전 파병 초기인 1965년부터 발생했다. 국방부와 주월(주베트남) 한국군사령부는 실종된 군인에 대한 별다른 구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부 내에서조차 일부 참전 국군 포로에 대한 정보가 최초로 공유된 것은 베트남 파병 4년여가 흐른 1969년 말부터였다. 그해 8월19일 주한 미국 대사는 베트남전 미군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 외무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1969년 9월6일부터 13일까지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제21차 국제적십자사 총회에서 전시 미군 포로 상태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집중하고자 하니 한국 정부가 적극 동의해달라.”

한국 외무부는 이 전문을 국방부에 보내 “파월 한국군 가운데서도 공산(월맹) 측에 포로로 잡힌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 현황을 알려달라”라고 회신을 요청했다. 1969년 8월20일 국방부는 실종자 3명의 명단만 달랑 보냈다. 1965년 11월3일 정찰을 나갔다가 실종된 박성렬 병장(맹호부대)과 1966년 9월9일 외출 중 실종된 육군건설지원단 소속 안학수 하사, 그리고 1967년 12월2일 타고 있던 헬기와 함께 실종된 박우식 대위였다. 국방부는 당시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들 실종 군인 3명에 대해 “포로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포로로 간주한다”라고 공식 의견을 달았다.

하지만 얼마 후 박정희 정권의 태도가 돌변했다. 각각 1965년과 1966년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포로로 잡힌 박성렬 병장과 안학수 하사는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 강제 이송된 후 북측의 대남방송에 나온 사실이 밝혀졌다. 월맹군이 생포한 한국군 포로를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구금한 뒤 북한으로 넘긴 것이다. 당시 북한은 하노이에서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한국군 포로를 강제로 끌고 가는 대가로 1명당 3000달러의 몸값을 월맹 측에 지불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월남 1군단 51특수보병연대 합동작전상황실 소속 하사관으로 베트남어·영어 동시통역을 맡았던 황민수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1970년 11월 하순 월남군에 붙잡혀 포로가 된 북한군 심리전 장교 피○○ 심문장에 통역관으로 참여했다. 여러 정보 중 한국군 포로 및 납북자 문제가 핵심이었다. 그는 당시 월맹 측에 3000달러를 주고, 포로로 붙잡혀 있던 안학수 하사의 신병을 넘겨받은 뒤 북한에 강제로 데려가 대남 심리전 방송에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심리전 장교 피씨는 심문 순간에도 한국군 포로 6명이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곧 북한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즉각 이 내용을 파월 1군단 사령부에 비밀 보고했다. 귀국한 뒤에 국방부와 보안사로부터 ‘북한군 포로 심문 과정에서 취득한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황씨는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포로의 진실을 조사한다면 사실대로 증언할 용의가 있다며 포로 유족에게 확인서를 써주었다.

미국 국방부와 한국 외무부 기밀문서를 종합해보면 1970년 들어 월맹 측과 월남 정부, 그리고 국제적십자사 간에 포로 교환 협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중에는, 1970년 12월10일 제94차 파리 회담에서 베트남 외무장관이 월맹 공산군 포로 9000여 명을 잡고 있다면서 월맹이 억류한 연합군 포로 1000여 명과 맞바꾸자고 제안하는 내용이 나온다.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 포로 실종자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던 1971년 봄, 미군과 월맹군은 포로 570여 명을 상호 송환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미국 측은 한국군 포로 명단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송환받기 위한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 정부(외무부)가 한국군 포로 문제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계기는 1972년 11월19일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가 한국 정부에 보낸 한 장의 서한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사면위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억류된 민간인 포로 석방과 송환을 분쟁 당사국 간에 체결하게 하고자 합의 의정서 시안을 만들어 당사국인 한국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앞으로 서한을 보낸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인권 개념이 희박했던 유신체제 인사들은 국제사면위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외무부 장관은 주영국 한국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이 단체의 정체를 자세히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연합뉴스안학수 하사(왼쪽)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1966년 9월9일 실종됐다. 이후 납북돼 북측의 대남방송에 나온 사실이 밝혀졌다.

국제사면위원회의 움직임을 계기로 한국군 포로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인도적 비난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한 외무부는 부랴부랴 한국군 포로와 실종자 파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외무부의 독촉에 1972년 12월18일 국방부는 3년여 만에 추가 실종자 7명의 명단을 ‘2급 기밀’ 딱지를 붙여 제공했다. 이 문서에는 앞서의 박성렬 병장과 안학수 하사가 북으로 가서 대남방송에 나서면서 북한 체류가 확인되었다고 적혀 있다. 나머지 실종자로는 정준택 하사, 안삼이 상병, 이용선 병장, 김인식 대위, 조준범 중위 등이 추가되었다.

당시 국방부는 외무부에 1972년 9월30일 기준으로 작성한 ‘베트남 전쟁 사망·실종·부상자 통계자료’도 넘겼다. 이 기밀 문건에 따르면, 당시까지 베트남전에서 국군 3722명이 전사했고, 935명이 순직했으며, 179명은 ‘일반 사망’했다고 분류되어 있다. 포로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종자는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모두 5명으로 파악되었다. 이 서류들에는 극비 사항이므로 “12월 말일까지 파기하라”는 국방부 직인이 찍혀 있다. 당시 군부와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 피해 실상과 포로 문제가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 했다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2년 말은 베트남 전쟁 종전 협상이 마무리되고 철군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17일 유신헌법을 공포해 철권 독재체제를 구축하느라 온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베트남 전쟁 자체를 유신 선포의 명분으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국군 포로나 민간인 실종자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1973년 봄 들어 베트남 전쟁 종전을 앞두고 포로 송환 문제가 국제 이슈로 부각되었으나, 한국 정부는 ‘한국군에 포로는 없다’는 공식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해 3월15일 귀국한 이세호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박 대통령을 만난 뒤 기자회견을 자청해 “월남전에서 한국군 포로는 단 1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발표했다.

이런 대국민 기만극은 오래갈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군에 들어간 주월 한국군사령부와 박정희 정권을 포로 문제로 난처하게 한 쪽은 북베트남(월맹)이었다. 3월23일 사이공에 있던 주월 한국 대사가 “베트콩 측이 3월25일께 일방적으로 한국군 포로 1명을 석방한다고 미군에 통보했다”는 긴급 전문을 본국에 날렸다. 단 1명의 포로도 없다고 우기던 박 정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일주일간 국방부·외무부·주월 한국 대사관 사이에 숨 가쁘게 오간 ‘석방 포로맞이 비밀문서’들은 정부가 이 문제로 얼마나 혼비백산, 우왕좌왕했는지 드러내준다. 국방부에는 아예 포로 관련 자료가 없었다. 돌아올 포로에 대한 신원 파악은 현지 대사관 몫이었다. 처음에는 포로 이름이 인정철 준위라고 한국 측에 잘못 전해졌다. 포로를 사이공에서 맞을지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맞을지, 어떻게 귀국시킬지를 놓고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3월25일 포로의 신병을 인수한 뒤에야 송환 포로 신상이 본인 입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유종철 일병이었다.

그해 7월25일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은 포로의 신분을 밝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긴급 전문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맹호기갑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유종철 일병. 부산 영도가 고향인 유 일병은 1972년 4월19일 안케패스 작전 중 베트콩 기습으로 포로가 되었다.’

ⓒ연합뉴스1973년 3월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베트남전 참전군 환영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열을 하고 있다.

사망 처리됐던 호적에 ‘부활’이라 적혀

군부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이미 유 일병을 전사자로 처리해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시킨 뒤였기 때문이다. 포로로 붙잡힌 유 일병을 전사자로 처리한 군은 1972년 5월11일 그에게 인헌무공훈장까지 추서했다. 유족에게는 전사 통지서와 함께 유품이라며 관물 24점을 전달했고, 장례비 100만원을 주어 장례도 치르게 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73년 3월27일 밤 9시, 국방부가 ‘죽인’ 유종철 일병은 군인 신분을 감추기 위해 민간인 복장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해 가족 품에 안겼다. 사망 처리되었던 그의 호적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유종철 일병이 살아서 돌아온 뒤 국방부는 더 이상 한국군 포로는 없다고 주장했다.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한술 더 떴다. 국군 실종자를 ‘찾을 필요가 없는 쓰레기’에 비유한 것이다. 1973년 3월27일 열린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박정희 정권의 국군 포로에 대한 인식과 보호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주월 한국군 실종자는 전투 중 발생한 행불자가 아니고 모두 자의에 의한 탈영자로서, 일부는 북한에서 방송한 사실이 있고, 나머지도 범법 도배자들이므로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송환 요청을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의 포로 실종자 담당 부서에서 조사해 작성한 한국군 실종자 및 포로 관련 문서는 내용이 다르다. 베트남에서 사라진 한국인 18명 중 16명은 ‘전쟁포로’이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자’로 기록돼 있다. 박 정권이 주장하듯이 부대 무단이탈이나 탈영 등 군형법상 범죄를 저지른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원인 모를 실종자 2명이 포함돼 있을 뿐이다. 결국 베트남전 한국군 포로와 민간인 실종자들은 박정희 정권과 군 수뇌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국제미아가 된 후 구출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밀림에서 죽어가거나 북한으로 팔려갔던 것이다.

종전 후 이들의 신상 처리 문제는 타이에 있는 미군 실종자수색센터(JCRC)로 넘어갔다. JCRC는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미군의 행방을 탐색할 목적으로 미군이 운영하는 기구였다. 1973년 1월23일 사이공에서 창설된 이 기구는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타이 내 나콘파놈 공군기지로 옮겨 활동했다. 1973년 10월12일 주타이 한국 대사가 외무장관에게 짤막한 전문을 하나 보냈다.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제3국인 행방 탐색에 대해 미국 대표가 성명서를 발표함. 내용 요약: 미국 측의 거듭된 요망 사항에 공산 측 묵묵부답. 미국 측은 공산 측의 무성의와 비협조를 비난함.” 이것으로 박 정권의 베트남전 국군 포로 대응은 끝이었다. 이후 아무런 정부 대책도 없이 그들은 역사 속으로 잊혔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자국민 실종자 실태를 파악하고도 국민에게 쉬쉬했을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과 수교하는 과정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종전 이후 45년이 흐른 오늘도 베트남 전쟁 실종자를 찾아 수색을 벌이고 유해 발굴 작업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와 무척 대조된다.

한국 정부가 버린 베트남전 포로 문제는 잊히는 듯하다가 미군 포로 송환 과정에서 곁가지로 불쑥불쑥 드러난다. 한양건설 직원이던 김흥삼씨와 김성모씨는 1968년 베트남에 파견돼 한국군 작전을 지원하는 도로 건설공사 중 월맹에 납치되었다. 두 사람은 하노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들의 유해는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 사망자’로 따로 분류해 보존해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별다른 송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방치되다가 1981년 미군이 베트남전 유해 송환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신원이 드러나 그제야 고국 땅을 밟았다. 1967년 베트남에서 군사작전 도중 헬기와 함께 사라진 박우식 대위는 35년 만인 2002년 8월 미군 유해발굴단이 베트남에서 그의 유해를 찾아내 한국 내 유족에게 인계함으로써 실종 35년 만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 수 있었다.

1967년 10월 베트남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되어 월남군 7사단에서 근무하던 박정환 중위는 1968년 1월 베트콩에 납치된 후 캄보디아 형무소에 502일간 갇혀 있다가 1969년 6월 가까스로 한국에 돌아온 베트남전 국군 포로의 산증인이다.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북한으로 압송되던 도중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박씨는 북한으로 끌려간 포로와 실종자를 방치한 한국 정부를 이렇게 비판했다.

“내가 포로가 된 뒤 탈출을 시도하면서, 살아 돌아가면 환영을 받으려나 바보가 되려나 고민이 많았다. 캄보디아에서 감옥 생활 중 재판받고 실형을 다 산 뒤 고국에 돌아가면 어떤 대접을 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미군은 포로가 되어도 조국이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군 포로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다. 그 와중에 자신감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북한에 끌려간 포로도 상당수였을 것이다.”

ⓒ연합뉴스1987년 8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군 실종자 문제 처리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귀환 뒤에도 수십 년 동안 침묵 강요

박씨는 귀환 뒤에도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 등 정보 당국의 강요에 의해 포로가 된 사실, 북송 중에 태권도 교관의 기지를 살려 필사적으로 탈출한 경과 등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는 2009년 통일부 납북피해자지원단에 출석해 안학수 하사를 비롯해 납북 포로가 된 참전군인들의 실태를 증언했다. 또 자신이 포로가 된 후 강압에 의한 북송 도중 탈출한 사실에 관해서도 생생히 진술했다.

베트남 전쟁 포로 관련 연구 권위자인 경북대 허만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32만명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최소 20명 이상 국군 포로가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는 이역만리 전투지로 간 군인을 구출하는 역할을 포기했다. 파병 당시 야당의 거센 반대 속에 파병했으므로 비난 소지를 없애려고 포로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전 무렵 미국과 북베트남의 파리 평화회의가 열렸을 때라도 우리 측 명단을 보내 포로 송환을 요구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공익을 위해 희생된 이들, 안학수 하사 가족을 비롯해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분들에게 국가가 가한 잘못을 인정하고 적절한 보상과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라고 본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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