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행사를 주관한 평화박물관 한홍구 상임이사(성공회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방일했을 때나 노근리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방미했을 때도 참전 일본군과 참전 미군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라고 개탄했다.
광복 70주년이자 베트남 전쟁 40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평화박물관(이사장 이해동 목사)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피해자 2명과 베트남 호찌민 시 전쟁증적박물관 관장을 초청했다. 민간인 학살 현장 생존자들의 방한은 1965년 10월 한국군이 베트남에 전투 병력을 첫 파병한 이후 50년 만이며, 1975년 4월30일 베트남에서 포성이 멎은 지 40년 만이다.
베트남 전쟁 기간(1965~1975년)에 한국군은 연인원 34만명을 파병했다. 베트남의 한국군 주둔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 그들이 민간인이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공식 부인해왔다. 하지만 베트남 현지에는 한국군의 범죄를 증언하는 생존자가 많고 학살 부대 등이 기록된 위령탑 또한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베트남 정부는 민간인 약 5000명이 한국군 주둔지에서 학살당했다고 집계한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종전 30년 만인 2000년 6월 ‘기밀 해제’된 문서에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이번에 방한한 응우옌티탄 씨가 살아남은 퐁니퐁넷 마을 학살사건이다. 미군 기록에는 한국 해병대(청룡부대)가 총격을 받아 1명이 부상하자 근처에 있던 퐁니퐁넷 마을에 쳐들어가 어린이와 부녀자를 줄세워 74명을 학살했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주 베트남 미군사령부 감찰부에서 현장조사를 벌인 후 주 베트남 미군사령관과 고위 장성들에게 보낸 보고서와 학살당한 어린이들의 사진으로 이뤄져 있다.
〈시사IN〉은 4월6일 오전 이번에 방한한 학살 현장 생존자 응우옌떤런 씨(59)와 응우옌티탄 씨(54·여), 그리고 호찌민 시 전쟁증적박물관 후인응옥번 관장(52)을 만났다.
응우옌떤런
응우옌티탄(티탄):1968년 12월12일, 여덟 살 때 사건을 겪었다. 우리 마을은 미군과 연합한 남베트남군이 많아 보호받고 있었는데 한국군이 들어와 사람들을 줄 세워놓고 쏘았다. 74명이 학살당한 현장에서 젖먹이 2명이 살아남아 죽은 엄마 품에서 기어 다녔다.
떤런:그날 한국군이 마을로 수색작전을 하러 왔다. 군복 어깨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맹호부대라는 걸 알았다. 아침 7시에 마을로 들어와 우리 가족과는 오후 4시에 맞닥뜨렸다. 폭격이 심해 집 앞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는데 한국군이 총으로 위협하며 나오라 해서 가족이 끌려 나갔다. 마을 앞 논바닥에는 20여 가구 사람들이 남녀노소 모두 붙잡혀 한군데 모여 있었다. 한국 군인들이 빙 둘러서더니 지휘자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엄마와 동생과 엎드렸는데 포연이 자욱했다. 사람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등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의식을 잃었는데 수류탄 파편에 온몸을 맞았다. 다연발총과 기관총, 수류탄 등이 동원되었다. 현장 생존자는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티탄:나는 배에 총상을 입고 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는 상태에서 미군 헬기에 발견돼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다낭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고아 처지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다낭에 있는 숙부님 댁에 가서 애를 돌봐주며 자랐다.
부상 후유증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떤런:사건 직후 마을 사람이 돌봐줘 소를 키우며 살았다. 몸속에 수류탄 파편이 박혀 고통스러웠지만 치료할 엄두도 못 내고 지내다가 몇 년 전 한국에서 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의사들 도움으로 큰 수류탄 파편은 제거했다. 아직도 작은 파편들이 몸속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잘 때 통증이 몰려오는데 벌판을 마구 달려야 겨우 통증을 잊는다.
티탄:여덟 살이었지만 그날 일이 1초 단위로 마치 영화 필름처럼 선명하다. 창자가 나온 배를 움켜쥐고 미군을 구조하러 온 헬기를 탔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비행기 소리나 헬기 소리만 들으면 놀라 도망가곤 한다. 그날을 떠올리는 것은 아직도 힘들다.
한국군 참전 단체에서는 당시 떤런 씨가 소년 베트콩이어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떤런
베트남 정부의 지원은 없는가?
떤런
후인응옥번 관장(응옥번):베트남 전쟁 기간에 300만명이 사망하고 200만명이 부상했다. 고엽제 피해자만 400만명에 달한다. 베트남은 종전 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고 전쟁 후유증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 악조건이라 피해자 지원이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었다. 전쟁 실종자 30만명 이상을 찾지 못해 정부가 전국을 돌며 아직도 찾아다니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군에 희생된 피해자 문제를 따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는 베트남 고엽제 군인회, 퇴역군인회 같은 단체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고통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사업들을 벌인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난 소감은?
티탄
호찌민 전쟁증적박물관에 한국군 관련 기록도 전시돼 있나?
응옥번
참전 한국군 단체는 당신들의 방한을 규탄한다.
티탄:내가 한국에 온 것은 여덟 살 때 겪은 끔찍한 난리에 대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참전 한국 군인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한국에 올 때는 참전 군인도 좀 만나고 싶었다. 한국은 그럴 수 있는 나라인 줄 알았다. 이런 일(규탄 및 추방 촉구 시위)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겪은 사실, 진실만 말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이런 태도를 보여 너무 가슴 아프고 억울하다.
떤런:인천공항에 내린 뒤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환대에 감사하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참전 군인들과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일은 무척이나 슬펐다. 진실을 인정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돕는 것이 참전군 단체가 할 일 아닐까? 억울함을 좀 덜어달라고 하소연하고 싶다. 우리가 한국에 요청하는 것은 물질적 지원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한국 정부가 이런 진실을 인정해줬으면 한다. 인정하고 위로하는 것은 베트남과 한국이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참전 군인들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고향에 돌아가면 내가 한국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
응옥번:가슴 아프고 무섭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참전 군인들에 비해 한국의 참전 군인들은 호찌민 전쟁증적박물관을 찾는 일이 드문 편이다. 지금까지 한국 참전 군인과 전쟁박물관에서 공식으로 만나는 행사가 딱 한 번 있었는데 다들 불편해하고 무거워하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손을 내밀었더니 그 참전 한국군은 베트남 노래를 하나 부르고 싶다고 했다. 참전 기간에 배웠다면서 ‘가을은 죽었나’라는 베트남 옛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베트남 사람들과 서로 포옹한 뒤 그제야 경직된 자세를 풀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 참전 군인과 마음을 열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진실에 대한 솔직한 시인과 상대의 아픔에 대한 어루만짐이 우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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