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는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이태원 참사 유족의 물음은 2023년 한국 사회에도 무겁게 울린다. 세월호 참사 8년 만에 일어난 국가적 비극 앞에서, 우리는 왜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지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실패’가 만연한 곳이 있다. 바로 일터다. 한국에서 매년 800명 넘는 사람들이 일하다 죽는다. 그중 절반 이상이 ‘추락’이나 ‘끼임’ 같은 재래형 사고다. 한국 산업안전 수준은 OECD 38개국 중 34위. 어떻게 보아도 한국은 선진국이 아니다.
한국도 다른 나라처럼 산업안전에 관한 법이 존재한다. 교육도 하고 감독도 하고 처벌도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인가? 당장 무엇을 바꿔야 할까? 그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애초에 뭐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나?
이 질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사회가 있다. 반세기 전의 영국이다. 1966년 영국 웨일스의 탄광촌 애버밴. 전날 내린 폭우로 불안정해진 석탄 폐기물 더미가 무너져 작은 초등학교를 덮쳤다. 7세에서 10세 어린이 116명을 포함해 144명이 사망했다. 앞서 수십 년간 주민들이 사고 위험이 있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했지만 무시되었다.
사고 후에야 광산 주변을 관리하기 위한 법안이 만들어졌다. 당시 집권당이던 노동당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다. 바버라 캐슬 고용·생산성부(노동부) 장관은 기존 법률보다 훨씬 포괄적인 새 안전 법안을 제출했지만 번번이 의회에서 막혔다. 여야도 노사도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즈음 영국노총(TUC)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녀는 이렇게 쓴다.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처리하는 방법은 오직 ‘고위급 외부 조사’를 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의장과 서너 명 정도 위원으로 구성된 작은 기구여야 합니다.”
이에 따라 1970년 5월29일 꾸려진 기구가 바로 ‘로벤스 위원회’다(정식 명칭은 일터안전보건위원회). 아이러니하게도 애버밴 참사 당시 국영석탄공사 사장으로 책임자 위치에 있던 앨프리드 로벤스가 위원장으로 선택됐다. 이에 대해서는 영국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지만, 노동조합으로부터 두텁게 신임을 받고 있던 점이 고려되었다. 노동당 정치인 출신인 로벤스는 최악의 노사관계를 경험하고 있었던 석탄공사의 사장으로 10년간 재임하며 석탄 산업의 쇠퇴를 최대한 늦추고, 탄광 지역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위원회 구성에만 반년 가까이 걸렸다. 여야 합의가 필요했기에 보수당 의원 머빈 파이크가 들어왔다. 노측 대표 시드니 로빈슨과 사측 대표 조지 비비도 합류했다. 법학 교수·방사선 전문의·경영 컨설턴트를 포함해 총 6명으로 구성했다. 위원회는 정부 부처 20여 곳과 관련 기관 100여 곳, 개인 38명으로부터 총 183개 보고서를 제출받았다. 공장과 연구소를 찾았고, 감독관들과 비공식 토론을 했으며, 캐나다·미국·독일·스웨덴을 방문했다. 그렇게 2년간 활동한 끝에 1972년 ‘일터에서의 안전과 보건(Safety and Health at Work)’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로벤스 보고서(Robens Report)’라 불리는 이 보고서는 영국 산업안전을 획기적으로 바꾼 기념비적 보고서로 평가받는다.

사람들은 왜 안전에 관심이 없을까
로벤스 보고서 제1장은 “매년 영국에서 약 1000명이 일터에서 사망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보고서는 영국의 산재 사망이 다른 나라보다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 식의 통계 비교는 타당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자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전개는 다소 의외다. “직장 내 사고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무관심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체로서의 사회는 재해에 민감하게 반응할지 몰라도, 사실 일터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사고란 개인의 경험 차원에서는 드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기이한 역설”을 고려하면, 평소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안전의식을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그러므로 법을 더 많이 만들어서 지키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놀랍게도 보고서의 답은 부정적이다. 바로 그 “엄청난 분량의 법”이야말로 사람들이 안전을 “외부 기관이 강제하는 상세한 규칙의 문제로 여기도록” 길들인다는 것이다. 앞서의 ‘무관심’은 바로 이런 토양에서 나온다. 따라서 대전제는 이렇다. “작금의 산업재해와 질병 수위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위험을 발생시키는 사람과 위험을 안고 일하는 사람에게 있다.” 보고서는 영국에 당시 존재하던 9종류의 법과 500개 규정들이 5개 부처와 7개 감독국에 걸쳐 중복되고, 그러면서도 5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법 바깥에 방치하고 있으며, 개정하는 데 평균 5년에서 길게는 15년이 걸릴 만큼 지식과 기술의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더 효과적인 자율규제(self-regulation)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것은 규제를 완화하자는 뜻일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로벤스가 인간 본성에 너무 많은 신뢰를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로벤스 보고서에 가해진 대표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로벤스가 말하는 자율규제는 규제완화가 아니다. 특히 사업주에게는 자율규제가 훨씬 더 부담스럽다”라고 말한다. “전에는 정부가 일일이 간섭했다면, 이제는 자기 사업장에 위험요인이 뭐가 있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그 방법도 알아서 정하라는 것이다(이를 ‘위험성 평가’라고 부른다). 국어·영어·수학 공부를 한다고 해보자. 이전에는 책상에 몇 시간 앉을지, 밥을 언제 먹어야 할지 선생님이 정해주었다면, 자율규제에서는 90점 이상 맞는지만 본다. 물론 교재도 주고 시험에 뭐가 나오는지도 알려준다. 단, 공부는 자기가, 즉 노사가 해야 한다.”
로벤스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1974년 만들어진 ‘일터에서의 안전과 보건 등에 관한 법률’을 보면 로벤스식 자율규제의 작동방식을 알 수 있다. 과거 공장법 제1조는 작업장 청소 규정부터 시작했다. “모든 작업장의 바닥은 적어도 주 1회 물청소를 해야 한다”라는 식이다. 1974년 일터안전보건법 제2조는 이렇게 쓴다. “모든 사업주는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so far as is reasonably practicable)… 모든 자신의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 및 복리를 보장해야 한다.” 사업주의 일반적인 의무를 규정하되, 그 구체적인 방식은 하위 법령(regulations)에 위임했다.
정부가 하위 법령으로 일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표준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만, 꼭 이것만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으로 정하지 않았어도 산업현장에서 만들어지고 통용되는 ‘실무 규범(code of practice)’들이 있다. 로벤스 위원회의 권고로 만들어진 독립 행정기구인 영국 보건안전청(HSE)은 노·사·정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 실무 규범을 검토해 승인한다. 없으면 직접 만들고, 낡은 것은 개정하거나 폐지하기도 한다.
승인된 실무 규범은 법령이 아니지만 법령에 준한다고 인정받는다. 지키지 않았을 경우 법령 위반이 될 수 있으며, 감독관들은 이를 근거로 개선 통지를 내릴 수 있다. 각 사업장의 노사는 하위 법령이나 실무 규범 중에서 자신의 사업장에 맞는 것을 선택해 지키면 된다. 이것이 보고서가 말한 ‘자율규제’의 실체다. 심지어 보건안전청이 하위 법령을 고치거나 폐지할 수 있다. 법령을 없앤 게 아니라 유연하게 적용되도록 바꾼 것이다. 규제완화 우려를 일축하며 보고서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나태한 접근을 지지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와 산재 사망과의 관계
로벤스 위원회가 출범하던 당시 매년 1000명 수준이던 영국 산재사고 사망자는 반세기 만인 2021년 123명으로 줄었다. 치명적인 부상은 일터안전보건법이 제정된 1974년 대비 약 88% 감소했다. 이 기간 영국의 산업이 중공업·광업·제조업 대신 서비스업 위주로 재편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데이터는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고 말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86년에서 2003년 사이 영국에서는 치명적이지 않은 부상이 3분의 1로 줄었는데, 그중 60%는 영국의 산업구조 변화 때문이었으며, 나머지 40%는 안전기준 개선을 포함한 다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로벤스는 후에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로벤스 위원회 이후의 영국도 풍파를 겪었다. 안전 규제가 지나쳐서 영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난이 심심치 않게 제기됐다. 그럼에도 50년이 넘도록 영국 일터안전보건법의 큰 틀은 바뀌지 않고 있다. 안전에 대한 영국식 접근은 유럽연합의 안전 지침에 영향을 주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도 로벤스 방식을 차용했다. 아직까지도 로벤스 보고서가 산재 판결에 인용된다.
어떻게 한 변화가 이토록 오래갈 수 있는가? 관건은 합의에 있었다. 로벤스 위원회는 노동당 정부하에서 출범했는데, 한 달 뒤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했다. 위원회는 보수당 정부하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보수당 내각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권고를 반영한 일터안전보건법은, 다시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 때 통과되고 집행되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은 이렇게 말했다. “전임 정부의 보고서나 위원회가 버려지지 않고, 보수당과 노동당이 초당적으로 협력했다. 의회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정당들이 일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일이 된다는 것이다. 로벤스 위원회를 보라. 내각의 장관이자 하원의원이 노사와 여야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꾸렸고, 시간을 들여 문제를 근본부터 돌아봤다. 보고서가 나왔을 때 영국노총과 영국산업연맹(CBI) 모두 환영했다. 그 결과 법안이 만들어졌고 독립적인 보건안전청이 설치됐다. ‘어젠다 빌딩(의제 구축)’은 이렇게 하는 거다. 한국의 수많은 위원회와 보고서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영국에서 애버밴 참사로 기소되거나 해임된 사람은 놀랍게도 한 명도 없다(로벤스는 석탄공사 사장 사직 의사를 밝혔으나 반려되었다). 이 역시 적절했는지 비판의 여지가 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사 이후의 영국 사회가 안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어떠했을까. 세월호 참사 직후 대통령이 해양경찰 해체를 선언했고, 해경 관계자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장은 무기징역, 선원들은 징역 1년6개월~7년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8년 만에 이태원 참사를 맞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래프가 하나 있다. 연도별 산재 사망자 수다. 현재 공식 산재 통계는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은 시점이 기준이다. 통상 사망사고에서 보상까지 몇 개월에서 5년까지 걸리므로 시차가 있다. 이를 보정해 실제로 매년 몇 명이 산재로 사망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위 〈그림〉을 보면, 2014년 산재 사망자 수는 전년의 1111명에서 932명으로 무려 179명(16.1%) 감소했다. 지난 13년간 이 정도로 단기간에 산재 사망이 감소한 것은 처음이다.
이 데이터를 계산한 박두용 전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해당 기간에 특별히 산업안전 제도가 바뀐 건 없다. 예산이나 인력이 크게 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산재 사망이 이만큼 줄어든 건, ‘사고 나면 큰일 난다’라며 기업도, 일하는 사람도 극도로 조심했다고 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 직후 ‘안전’이 강조되던 사회적 분위기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림〉을 보면, 세월호 참사 때 크게 감소한 산재 사망자 수는 2015년에 다시 상승선을 그린다. 박두용 전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2015년 그 1년 동안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안전 규범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아니라 정치 싸움으로 만들어버렸다. 정부는 이 문제에 진지하게 마주하기를 회피했고 유가족은 고립됐다. 2014~2015년의 그래프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해준다. 하나는 획기적인 예산이나 인력, 제도 변경이 없이도 기업 내에서 조금만 관리하면 산재 사망을 줄일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추가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현장의 변화는 쉽게 후퇴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산업안전과 관련해 최근 몇 년 사이 두 가지 큰 정책 변화를 겪었다. 하청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다.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이 법으로, 적어도 사내하청에 대해서는 원청 기업도 안전을 책임지게 됐다.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법)’은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명확하지 않던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의무를 명시했다. 이 의무를 위반해 사람을 죽게 하면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두 법 모두 여야가 합의했기에 통과될 수 있었지만, 2022년 1월27일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는 논란이 거세다. 김용균법 때와 달리 중대법은 입법 당시 더불어민주당도 소극적이었다(당시 민주당은 중대법 같은 특별법을 따로 제정하기보다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는 데 무게를 두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법 완화 의지를 드러냈다. 기획재정부가 발주한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안전의무가 있는 ‘경영책임자 등’에 최고경영자(CEO)가 아닌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넣자는 법 개정 방향이 담겼다. 이러면 산재가 나도 중간관리자만 처벌받던 중대법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11월30일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로드맵은 벤치마킹 대상으로 영국 로벤스 보고서를 언급하며 “‘처벌·감독 단계’를 넘어 ‘자기규율 단계’에 진입”하겠다고 쓴다. 전형배 교수는 이런 접근이야말로 전형적인 오류라고 지적했다. “로벤스 보고서에는 ‘처벌이 심하니 자유롭게 풀어주자’는 내용이 없다. 자율규제가 되려면 처벌이나 행정규제 중 하나는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한국의 행정규제는 늘 약했는데, 감독관과 공무원이 산재를 다루는 숙련을 쌓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산재 문제를 직접 다루는 국내 산업안전보건 근로감독관은 현재 약 800명 수준이다. 이 중 절반 가까이는 행정직으로 3년마다 고용·실업급여·근로감독 등 부서를 돈다. 산재만 담당하는 감독관 중에서도 약 절반은 경력이 3년이 안 된다(문재인 정부 때 다수 채용되었다). 현직 산업안전보건 근로감독관 ㄱ씨는 “그래도 6년은 해야 사업주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현장에 숙련된 인력이 부족하다. 산재를 일으킨 사업주가 숙련된 감독관을 만날 확률은 약 4분의 1밖에 안 된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영국처럼 일터 안전을 다루는 독립된 전문 행정기구인 ‘산업안전보건청’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본부’로 승격하는 데 그쳤다. 윤석열 정부는 공무원 수를 줄이는 분위기다. 산업안전보건청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ㄱ씨는 산업안전 감독을 하며 느끼는 가장 큰 고충이 ‘수용성’이라고 했다. 시정명령을 내려도, 과태료를 물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진득하게 해결하고 싶어도 다음 점검을 나가야 하다 보니, 해당 기업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근원적인 해결책까지 가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행정처분만 내리는 경우가 많다. ㄱ씨는 수용성을 높이려면 행정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현장에서는 노도 사도 안전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 사측은 노동자들의 의견을 듣기 부담스러워하고, 노동자들도 가외 업무가 생긴다고 여긴다. 사고 때마다 들끓는 분노와 달리, 시민들은 에스컬레이터의 핸드레일을 잡지 않는다. (카페의 가파른 계단을 가리키며) 만약 저 계단에 안전조치를 하느라 이 커피를 20% 비싸게 판다면, 소비자들이 이해하고 구매할지 회의적이다. 안전사회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안전을 위한 비용을 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도 핸드레일을 잡지 않는다”
안전을 위한 비용 지불에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예컨대 건설 추락사고의 가장 큰 원인인 ‘강관 비계(강철로 된 관으로 만든 발판)’를 사고 발생이 덜한 ‘시스템 비계(일체형 작업 발판)’로 교체하는 변화는 더디다. 인건비를 아끼고 공기를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물연대가 파업하며 확대 적용을 요구한 ‘안전운임제’ 역시, 제도의 개선 여지에도 불구하고, 화물차 기사를 포함한 모두의 안전을 위해 누가 어떻게 비용을 댈 것이냐의 문제였다.
일터 안전과 시민 안전은 연결되어 있다. 로벤스 위원회 출범 전 영국에서도 건설현장 크레인이 관광버스 위로 무너져 승객 7명이 사망했다. 로벤스 보고서는 “공업 및 상업 활동에서 직접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일반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쓴다. 보호의 범위는 자영업자에게까지 확장된다. 특수고용직과 플랫폼 노동자가 늘어나는 오늘날 더 무겁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1970년대 영국과 2022년의 한국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럼에도 이 고전적인 보고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처럼 중소기업에 안전 규제를 면제해주는 게 맞을까? 노동조합이 없는 곳의 ‘자율규제’는 어떻게 가능할까? 로벤스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단 하나의 만병통치약도, 간단한 지름길도 없다. 이 분야의 진전은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개개인의 마음속에 일터 안전보건이라는 주제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태원 참사로 딸 조한나씨를 잃은 어머니 이애란씨는 딸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니?”라고 물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만병통치약과 지름길만 찾다가 시간을 보낸 건 아닐까. 반세기 전 타국의 보고서가 또다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참고 자료:류현철 외, 〈로벤스 보고서 번역 및 해제〉,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 정책보고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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