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월드컵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하도 재미있어 빠져들고 말았다. 당연히 질 줄 알았던 사우디가 역전승을 거둔 순간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축구, 참 재미있네! 한국을 비롯해 약체로 평가받던 팀들이 강팀을 이기는 이변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빼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이래서 월드컵, 월드컵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월드컵을 열광과 탄식의 무대로 만드는 것은 경기장에서의 명승부만이 아니다. 카타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묻는다면 잉글랜드전에서 이란 선수들이 국가 제창을 거부하던 것이라 답하겠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착잡한 얼굴들, 그들을 똑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관중석의 이란인들. 목이 멨다. 전반 22분 이란 응원단은 지난해 9월 의문사한 22세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을 내걸었고, 경기장 밖에선 ‘여성·생명·자유’를 외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다. 그날 이란 대표팀은 과거 조국을 유린한 영국에 대패했지만, 이란 응원단은 패배에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인권을 짓밟는 정부에 분노했고 무참히 죽어간 이들을 위해 울었다. 심지어 월드컵의 승리가 현실을 덮을까 봐 자국의 패배를 기원하기까지 했다.

한국에도 스포츠로 국민을 길들이려던 독재와 그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싸운 역사가 있기에 그들의 저항은 낯설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이란인들의 저항은 특별하고 놀라웠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조국의 패배를 바라는 국민을 본 적이 있던가. 이란 국민들이 지금 얼마나 뜨겁고 간절하게 싸우고 있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도대체 이란은 어떤 나라 어떤 사람들이기에 한 여성의 죽음에 저토록 분노하며 전 세계를 뒤덮은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대범한 투쟁을 보여주는가?

이란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려운 책은 싫어서 조그만 소설책을 골랐다. 마리암 마지디의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김도연·이선화 옮김, 달콤한책).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이란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데, 예전에 본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와 비슷한 듯 달랐다. 〈페르세폴리스〉를 보며 마르크스를 읽는 십 대 소녀, 당찬 반항을 일삼는 작가의 모습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통념과 전혀 달라 놀랐다면,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그 당돌한 정신이 마주한 이란의 엄혹한 현실에 놀랐다.

소설 맨 앞엔 ‘압바스에게’라는 헌사가 적혀 있고, 첫 장을 펼치면 “너는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죽을 것이다”라는 터키의 혁명가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말이 쓰여 있다. 솔직히 처음 히크메트의 문장을 마주했을 땐 공감하기엔 너무 무겁고 무서운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혁명에 참여한 스무 살 의대생이 동료를 지키려 3층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나는 같은 시기 우리가 겪은 숱한 죽음을 떠올렸고 히크메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아프게 수긍했다.

‘시’와 ‘이야기’에서 찾은 이란 시위 동력

마리암 마지디의 소설은 동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여성,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었으나 혁명이 배반당한 뒤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에 시달리며 꿈과 말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잃어버린 말을 증언하기 위해 그는 소설을 쓴다. 소설은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마지디의 여정을 한 축으로 삼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감옥에 갇힌 삼촌에서 시작해 젊은 어머니로, 강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로, 아이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청년 압바스로, 암매장된 반정부 활동가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와 앓아눕곤 하던 아버지로 계속 이어지는 낱낱의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노라면 천 개의 이야기로 자신과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했던 셰에라자드가 떠오른다. 무심코 떠올린 이 이름과 마지디 사이의 연관성을 깨달은 것은, 소설에 이어 최승아의

〈페르시아·이란의 역사〉를 읽고서였다. 이란의 긴 역사를 쉽고 깔끔하게 정리한 이 책을 통해 나는 비로소 〈아라비안나이트〉의 기원이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천의 이야기’였음을 알았고, 마지디가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은 수많은 압바스와 그들에 대한 기억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 이야기하려 애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수십 년간 이어진 이슬람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제된 히잡을 거부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란 시위의 동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800년이나 아랍, 튀르크,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페르시아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잃지 않은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그 힘의 원천이 ‘시’란 사실. 수백 년에 걸친 아라비아 지배하에서 이란인들은 페르시아의 전설과 역사를 6만 행의 시로 쓴 〈샤흐나메〉를 읽고 낭송하며 모국어를 기억하고 보존했다고 한다. 괴테 등 많은 시인에게 영감을 준 하이얌, 하피즈, 루미, 그리고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로 유명한 포루그 파로흐자드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위대한 시인들이 이란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왜 이런 고통을 겪는가. 좀 더 알고 싶어 도서관에서 일본 학자 신타로 요시무라가 쓴 〈이란 현대사〉도 찾아 읽었는데,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열강에 시달리고 그 그늘 아래서 쿠데타와 독재, 전쟁과 미완의 혁명을 겪는 모습이 동시대 한반도의 역사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국토와 자원을 유린한 외세, 그에 결탁한 권력층, 이들에 맞서 독립과 인권을 지키려는 안간힘이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상기시킨다. 아무 상관없다 여겼던 먼 나라 이야기에 한숨과 눈물로 공감하는 사이, 월드컵은 막을 내렸다. 구경은 끝났다. 이제 온몸으로 삶을 밀고 갈 시간이다. ‘여성·생명·자유’를 위하여.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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