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어 살 무렵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다. 소설 줄거리도 기억 못하는 걸 보면 딱히 감동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하다. 어린 제인이 고아원 비슷한 기숙학교에 가서 호밀빵(요즘 번역본엔 귀리빵)을 먹은 것. 소설에서는 퍽 불행한 일처럼 묘사했지만 나는 집을 떠나 아이들만 있는 기숙학교에 가고 생전처음 보는 호밀빵을 먹는 제인이 부러웠다. 호밀이 뭔지는 몰라도(나는 호밀이 외국어인 줄 알았다) 어쩐지 부드럽고 특별한 빵일 것 같았다. 나는 기숙사와 호밀빵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생애 최초의 소설을 썼다. 작은 공책에 서너 장 쓰다가 말았지만 어쨌든 소설을 써본 건 처음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진짜 호밀빵을 먹었는데 골판지 같았다. 어린 날의 오독을 반성하며, 그걸로 〈제인 에어〉와는 끝인 줄 알았다.
수십 년 만에 〈제인 에어〉를 다시 읽었다. 잘못 안 건 빵 맛만이 아니었다. 어려서 읽은 뒤로는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로 그 소설을 안다고,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이라 여겨 다시 보지 않았는데 다시 읽은 소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제인 에어〉는 여성이 주인공인 드문 성장소설이었다. 열두어 살의 내가 그걸 읽고 글을 써보려 한 것은 당연했다. 바로 그것이 〈제인 에어〉가 가진 힘이었다. 여자아이에게 독립을 꿈꾸게 하고 다른 세상을 그리게 하며 자기 이야기를 써볼 마음을 내게 하는 것.
제인 에어는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예쁘지도 않다. 성격이 좋으냐면 그것도 아니다. 애교를 부릴 줄도 몰랐고 불뚝성까지 있었다. 여성이 살아가려면 사랑이나 적어도 동정이라도 받아야 하는 세상에서 그는 결격의 존재였다. 주위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굴라고 나무라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제가 옳다고 믿기도 했지만 그보다 불같은 성정과 그것을 제어할 줄 모르는 치기 때문에. 자신을 윽박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 때문에.
분노를 터뜨리고 잠시 만족했다가 이내 후회와 불안을 곱씹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익숙한가. 주위의 비난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선을 떨치지 못한 채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아직 젊던 나를 본다. 이제는 나이 들어 전처럼 격분하지 않는 나, 지혜로워져서가 아니라 비난의 시선에 길들여진 나를 본다. 돌이켜보면 나는 두려웠다. 어린 제인처럼. 붉은 방에 갇힌 그는 거울에 비친 유령을 본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질린 도깨비 같은 작은 유령, 세상이 원하는 착한 여자애가 되지 못하면 황야의 골짜기를 떠도는 괴물이 될 거라는 두려움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두려움에 발목 잡힌 나와 달리 두려움은 제인을 막지 못한다. 찬바람 부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면서도 그는 집안에서 냉대를 견디는 대신 차디찬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가난의 무서움과 세상의 냉혹함을 알면서도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계몽된 이상에 이끌려 길을 떠난다. 제인 에어는 세상이 요구하는 복종과 정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주인, 자신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집을 찾아 떠난다. 자아의 독립, 평등한 관계라는 이상을 푯대 삼아 순례의 길에 오른다.
게이츠헤드의 친척 집을 나선 제인이 처음 이른 곳은 저지대숲 로우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달리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차분한 템플 선생과 헬렌을 만난다. 교사이자 어머니, 언니이며 친구인 두 여성은 한동안 그의 이상적 자아가 된다. 그는 이들과 달리 무모하리만큼 이상적이고 반항적인 자신의 내면을 깨닫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내면의 불길을 감추고 얼음장 같은 세상에서 차갑게 관조하는 법을 배운다. 자매애에 힘입어 자신의 다름을 자랑도 혐오도 없이 받아들인 그는 이제 새로운 관계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순례의 끝에서 찾은 평등한 관계
이윽고 닿은 곳은 손필드. 그곳에서 제인은 자신이 꿈꾸던 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상대를 만난다. 지체 높고 돈 많고 나이도 스무 살이나 연상인 로체스터가 그 상대다. 로체스터는 인습에서 벗어난 제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처 입은 두 영혼은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둘이 결혼으로 이어지려는 순간, 다락방에 감금된 미친 아내 버사의 존재가 드러나고 제인은 다시 길 위에 선다.
괴물 같은 버사는 사랑의 장애물처럼 보이지만, 유명한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길버트와 구바가 탁월하게 그려냈듯, 그는 제인의 또 다른 자아다. 버사는 자신을 집안의 천사로 만들려 했던 남편과 오빠를 공격하고, 결혼을 앞두고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제인을 대신해 면사포를 찢는다. 그 덕분에 제인은 가시덤불(손필드)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찾는 순례를 계속한다.
죽음을 무릅쓴 순례의 끝에서 제인은 마침내 자아의 독립을 이루고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두 눈이 멀고서야 제인 에어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로체스터는, 당찬 연인과의 평등한 관계를 통해 한쪽 눈을 뜨게 된다.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를 통해, 세상이 말하는 눈먼 사랑이 아니라 편견에 멀었던 눈을 뜨게 하는 힘센 사랑을 말한다. 세상은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들 하는데, 샬롯 브론테는 편견에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사랑이라 말하는 듯하다.
두려움과 환상에 발목 잡혔던 한 생애가 저물어가는 이즈음, 〈제인 에어〉를 읽으며 늦은 꿈을 꾼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의 사랑도 삶도 달라졌을까. 아니, 제인 에어라면 이런 뒤늦은 후회 대신 짐을 꾸렸으리라. 새로 떠오른 해를 향해, 아직 남은 아침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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