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펼쳤는데 맨 앞에 안톤 체호프의 문장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종소리가 울렸다. 뎅, 뎅. 오래된 절집의 묵은 종소리가 사위로 스미듯 마음속으로 퍼져갔다. 그 아침 해야 할 일의 무게에 짓눌렸던 마음이 비로소 떨치고 일어섰다. 에르노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다시 체호프에게 돌아갔다. 긴 가출 끝에 돌아온 아이처럼 그가 내주는 문장에 기댔다. “결국 체호프가 또 우리를 이길 것이다”라는 연출가 카마 긴카스의 말을 떠올리며, 이런 패배라면 언제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생각하면서.

체호프는 44년의 생애 동안 의사로 일하며 〈벚꽃 동산〉 같은 걸작 희곡들과 함께 40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국에는 단편집이 여러 종 있지만 중복 번역이 많으니 소개된 건 10분의 1이나 될까. 하나 상관없다. 그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워 다른 걸 욕심내게 되지 않는다. 읽고 또 읽고, 매번 처음인 양 놀라고 감탄하며 읽는다. 언제나 새로운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몇 해 전에는 그의 만년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나의 인생〉 〈삼 년〉 같은 소설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데 이번엔 〈굴〉 〈구세프〉 〈로실드의 바이올린〉 같은 초·중기작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이 짧은 소설들을 읽으며 비로소 내가 왜 체호프를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며 누구도 쉬 용서하지 않는다. 괜찮다는 말 대신 다들 얼마나 애쓰는지 보여줄 뿐이다.

슬픔은 삶의 조건이며 의무

체호프는 세상이 한심해하는, 쓸모없다고 포기하는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절망을 말할 기회를 준다. 그는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대신해 글을 쓴다. 그의 문장은 그들의 목소리다. 우리 모두의 예정된 운명을 떠올리면, 그의 소설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에서 늘 필요한 위로를 얻고,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마다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읽은 막심 고리키는 이런 편지를 썼단다. “당신은 리얼리즘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는 누구도 당신보다 더 멀리 갈 수 없을 겁니다.” 맞다. 하나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 또한 그러하니, 삶이든 글이든 반드시 더 멀리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진실하기만 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샤오훙을 읽었다. 체호프가 죽고 6년 뒤 중국에서 태어난 샤오훙은 불과 서른 해를 살면서 최선을 다해 체호프의 그늘을 넉넉히 감당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단편을 모두 모은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읽으면서 나는 빼어난 재능이란 개인적 자질이되 또한 시대의 소산이기도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샤오훙의 단편에서 리얼리즘의 극한을 보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그 시대의 언어였다.

체호프처럼 샤오훙의 작품도 쉬 읽히지 않는다. 괴로움은 선명하고 위로는 더디다.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삶의 진상을 기록한 샤오훙을 읽는 내내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내 고통, 내 아픔, 내 슬픔이 얼마나 유구하며 얼마나 당연한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끝에서 슬픔을 사는 것은 삶의 조건이며 의무임을 투정 없이 받아들였으니,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누군가 위로의 문장을 구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다 읽으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수록 작품 19편을 다 읽을 여유가 없다면, 단 한 편밖에는 못 읽겠다면, 표제작 〈가족이 아닌 사람〉을 권하련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냉정한 의붓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샤오훙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집안일을 하는 ‘유 둘째 아저씨’에게 남다른 정을 느낀다. ‘나’는 툭하면 어머니가 정한 금지사항을 어기고 매를 맞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하지만 아저씨는 쉬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내 편인가 싶으면 어느새 어머니 편을 들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듯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게 먼저다. 가족인 듯 가족이 아닌 애매한 경계 위에 둘은 서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평생을 헌신하며 그 집안 사람이기를 꿈꿔왔던 사람과 가족에게 실망하고 다른 가족을 꿈꾸던 사람의 미망이 깨어질 때 가장 상처 입는 건 누구인가. 샤오훙은 자신의 미망이 다른 이의 더 큰 환상에 기댄 위안이었으며, 그 환상이 깨질 때 자신은 외면했음을 거짓 없이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외로운 삶을 토로하는 대신 자신보다 더 외롭고 아픈 삶이 있었음을 기록한다.

내 안의 고통에 붙들려 위로를 구하는 인생을 체호프와 샤오훙은 위로하지 않는다. 더 불행한 인생으로 위안을 삼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모두가 이 불행의 늪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러니 사랑하라고, 더 늦기 전에 서로의 아픔을 들여다보라고 속삭일 뿐이다. 큰 기대나 희망은 없이, 그러나 아주 절망하지는 않고 속삭인다. 속삭임이 무슨 힘이 있냐고? 100년 전의 속삭임을 여전히 듣는 귀가 있음을 떠올려보라. 때론 속삭임이 웅변보다 오래 귓전을 흔드는 법이다. 가녀린 눈발이 봄을 멈춰 세우고 우리의 발목을 붙들듯이. 그리고 멈춤 뒤에 늘 새롭게 봄이 오듯이.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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