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너무 오래 사람을 보느라 내 안이 텅 빈 걸 몰랐다. 빈 마음에 남의 시선과 말들이 가득 차 쉴 곳이 없다. 지친 나를 데리고 뒷동산을 오른다. 나무에 푸른 물이 오르고 봄빛 아래 매화 꽃송이가 벙글고 있다. 눈이 환해지고 귀가 열린다. 깍깍 까악 삐이익 꾸룩꾸룩 또로롱, 소리를 찾아 고개를 젖힌다. 까치·까마귀·직박구리·멧비둘기는 익숙한데 가지 틈의 주황색 깃털, 저 새는 뭐지? 딱새인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이 시도록 올려다본다. 그 덕택에 머리 까만 박새도 보고 까치 부부가 아옹다옹 집 짓는 것도 제대로 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뻣뻣한 몸을 일으킨다. 걸음을 떼기 힘들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다. 사람을 아랑곳 않는 새들 덕에 모처럼 무념무상의 시간을 누렸다.

그날 이후 새에게 자꾸 눈이 간다. 유명한 과학 저술가 제니퍼 애커먼의 〈새들의 방식〉을 펼친다. 3년간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과학자와 연구 현장을 취재하고 쓴 책인데, 첫 장의 그림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새냐 물고기냐? 400쪽이 넘는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사이 마감이 닥쳤다. 남은 부분은 대충 훑어보고 쓰자고 마음먹지만 그럴 수가 없다. 말하기·일하기·놀기·짝짓기·양육하기로 이루어진 새들의 이야기가 계속 예상을 뛰어넘는 통에 한 줄도 건너뛸 수가 없다. 그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계가 하도 신기해서 마감의 공포까지 잊었다.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걸까.

책을 읽기 전, 새들의 방식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날기 하나였다. 새는 날기 위해 이빨과 위장을 없애고 뼛속까지 비웠다는 말을 듣고, ‘오, 나는 무엇을 위해 전부를 버릴 만큼 절실한 적이 있었던가’ 반성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서 나는 이런 ‘사람의 시선’을 버렸다. 날기 위해 몸을 비우는 것은 새란 존재의 아주 작은 시작일 뿐, 새는 그보다 훨씬 크고 비상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단 새는 말을 한다. 사투리도 있다. 우리가 듣는 새의 ‘노래’는 많은 의미를 담은 새의 말이자 대화다. 이 노래엔 독창·이중창·합창, 심지어 모창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말을 배우듯 새도 열심히 배워서 노래한다. 짝을 지키기 위해 이중창을 하는 암수는 음성을 통제하는 뉴런이 동시에 발현되면서 절묘한 주고받기를 하며, 새끼들은 이것을 학습한다. 새의 언어는 아주 복잡하고 구체적이다. 음의 개수 하나하나에 포식자와의 거리, 위협의 수준 등을 담을 정도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경계음이 들리면 종이 다른 새들도 귀를 기울인다. 본능인 것 같지만 실은 폭넓은 학습의 결과다. “여러 종의 경계음을 인지한다는 건 여러 외국어를 아는 것과 같다.”

감각능력도 대단하다. 특히 새의 후각은 오랫동안 무시되어왔으나, 칠면조독수리는 가스 파이프의 누수 지점을 찾아내는 “개코 같은 능력”을 가졌고, 바닷새는 광활한 바다에서 크릴이 만드는 화합물 냄새로 먹이를 추적할 만큼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다(안타깝게도 그 때문에 바닷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는다). 어디 그뿐이랴. 새의 인지능력은 인간에 버금간다. 단적인 예로, 새들의 세계에서 도구 사용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 도구를 사용하는 새들이 있고 어떤 새는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까지 한다. 이 분야의 고수인 뉴칼레도니아까마귀는 (인간과 유인원처럼) 둘 이상의 도구를 결합할 수 있으며, (인간만 만드는) 고리 달린 도구도 만들 줄 안다. 그에겐 도구 제작에 필요한 단계적 행동을 ‘사전 계획’하는 고도의 지능이 있으므로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편견과 오류에 가려진 새의 본모습

가장 놀라운 건 새가 불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불로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만 불을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세계 전역에서 맹금류들은 불이 난 곳에서 도망가는 먹잇감을 사냥하며,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칭 불매(fire hawk)처럼 불붙은 가지를 이용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새가 불을 활용해 먹이를 찾고 방화까지 하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며, 원주민들의 전승 지식으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이들은 한 지역에 4만 년 이상 거주하며 쌓아온 토착민의 지식을 무시하고, “‘인간만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뿌리 깊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고집한다.

애커먼은 새들의 경이로운 방식이 최근에야 발견된 이유가 바로 이런 편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걸 인간 중심으로 보는 시각, 북미와 유럽 등 북반구에 치우친 연구의 지리적 편향, 남성 과학자가 주도하는 학계의 성별 편견이, 새의 감각과 지능을 폄하하고 새들의 세계에선 일부분에 불과한 온대지방의 수새를 조류의 표준으로 여기는 오류를 낳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첨단장비와 기술이 발전하고 열대지방으로 연구 지역이 확대되고 여성 과학자들의 활동이 커지면서, 그동안 편견과 오류에 가렸던 새들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거기엔 인간에 버금가는 똑똑한 지능부터 무리가 함께 새끼를 키우는 공동육아에 이르기까지 놀랍고 다양한 모습들이 포함된다. 새들의 이런 모습은 “예외의 힘”과 더불어 “인간이 생각만큼 유일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새가 어리석다고 비웃지만, 애커먼은 다른 동물은 물론 스스로를 멸종의 위협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절망하면서, “진화가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새롭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새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어쩌면 스웨덴의 한 조류학자가 농담처럼 예견했듯, 수백만 년간 존재해온 까마귓과 동물이 고도의 인지능력으로 동물 세계에 군림할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피하고 싶다면 새들의 존재 방식을 보고 배우라는데, 과연 어리석은 우리가 배울 수 있을까?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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