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독서 모임이 끝난 뒤 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림책 작가인 진은 요즘 들어 통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조언을 해야 했으나 장르만 다를 뿐 똑같은 고민을 몇 년째 하고 있는 나는 맞장구만 쳤고 나중엔 내 하소연이 더 길어졌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동료 겸 감시자로 삼아 작업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뭐가 됐든 일단 시작하고 서로에게 정기적으로 보여주자. 그러고 오는데 가슴이 설렜다. 아직은 말뿐이지만 그와 이런 얘기를 나눈 것 자체가 기쁘고 흐뭇했다. 독서회 덕분에 믿음직한 길동무를 또 하나 얻었구나,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환해졌다.

몇 해 전 독서회 친구들과 예술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글렌 커츠의 〈다시, 연습이다〉와 최혜진의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였는데, 앞의 책은 연주자의 길을 포기한 저자가 다시 악기를 손에 드는 이야기고, 뒤의 책은 잡지 디렉터로 일하던 저자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을 만나 창의성의 비결을 묻는 이야기였다. 좋아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던 내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책들이라 소개했는데 회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책에 고무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만의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 것. 연말에 발표회를 했는데 모두 어찌나 멋진 작품을 내놓았는지 질투가 날 정도였다. 특히 진의 그림은 아마추어라고는 할 수 없는 솜씨여서 깜짝 놀랐다. 대학 시절 그림을 공부했지만 결혼 이후 한 번도 그린 적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계속해보라고 다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계속할 줄은 글쎄, 나는 미처 몰랐다.

그러나 진은 그림책 작가 과정에 등록해 가장 나이 든 지망생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첫 작품으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다. 이후 국내 공모전에 당선돼 첫 책 〈나와 자전거〉(신혜진, 웅진주니어)를 내놓더니 곧바로 우즈베키스탄 글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하고 중국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상을 받으며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니 그림이 안 된다는 말은 내 보기엔 그저 과로의 후유증일 뿐이었다. 지난 3년간 그렇게 열심히 그렸는데 당연히 쉬어야지.

하지만 2주 뒤 그는 내 앞에 공들인 그림 두 장을 내놓았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수줍은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놓을 것이 없었던 나는 그를 보며 자문했다. 이 힘은 어디서 나오나? 계속 새로운 작품을 할 수 있는 힘,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무력감을 뚫고 나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최혜진의 책을 다시 펼쳤다. 내친김에 국내 작가들과의 대화를 담은 후속작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한겨레출판, 2021)도 함께 읽었다. 그리고 배웠다.

다할 수 있고 다했다는 자신감

우선 뭔가를 하는 데 특별한 이유나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배웠다. 무엇을 하지 않을 이유 혹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참 많다. 시간·재능·돈·건강·사람…. 지금 내게 없는 것들이 다 이유가 된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국내외 작가 스무 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없다고 못하는 건 아니라고,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증거로 보여준다. 남다른 상상력이 없어서 창작을 못한다는 변명은, ‘감탄하는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해 섬세한 그림책을 내놓는 조엘 졸리베 앞에서 힘을 잃고, 몸이 아파서 작업에 몰두할 수 없다는 핑계는,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다발성통증증후군을 진단받고도 8년간 무려 14권의 그림책을 발표한 고정순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아무리 그래도 재능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못 그리네요”라는 신랄한 평을 받고도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세르주 블로크와, “특출나지 않은” 그림으로 매일 12~16시간씩 작업하며 자신을 증명한 유설화를 보니 바보 같은 생각이었구나 싶다.

물론 뭔가를 하려면 있기는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걸 불러일으킬 자기 안의 질문과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물음에 답하려는 의지와 열망이 있어야 한다.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살다 보면 누구나 묻고 의심하고 열망하는 순간이 있다. ‘남들은 잘하는데 나는 왜 못하지?’ 같은 질문, 다들 한 번은 해보지 않았나? 남다른 창의성이란 이렇게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다. 자신을 주눅 들게 하고 의심하게 하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질문을 계속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거기서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처음 만난 외국인 인터뷰어에게 내밀한 가족 얘기를 들려준 클로드 퐁티처럼, 작가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은 물론 결핍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부터 든든한 지지를 보내준 좋은 부모를 둔 작가도 있지만, 더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아이의 기를 죽인 냉담한 부모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좌절한 이들도 있고, 일찍 그림에 재능을 보인 이들도 있지만 제대로 된 그림 공부도 해본 적 없고 뒤늦게 시작해 열등감에 시달린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꾸준히 하는 성실성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믿는 자신감이다. 세상에 없는 작품을 완성하려면 스스로를 믿고 계속 시도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믿음은 강한 자기 확신이나 자의식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그걸 채우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다할 수 있고 다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다. 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딴 건 몰라도 열심히 할 자신은 있으니까. 이 자신감으로 오늘부터 내 삶을 창작해야지. 어때요? 같이 하지 않을래요?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