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재즈 뮤지션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받았던 질문을 잊지 않고 있다.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재즈가 죽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뮤지션의 대답이다. “그럼, 제가 죽은 사람이라는 건가요?”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관점에 따라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답변이기도 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흐름이 시들해지면 거의 습관적으로 단언하고는 한다. “그건 이제 죽었어.” 그러나 조금만 곱씹어보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재즈 전문 잡지 10월호와 11월호를 쭉 읽었다. 언제나 그랬듯 거장과 신예를 막론하고 신보를 무진장 발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록도 마찬가지다. ‘록은 죽었다’는 말은 이제 너무도 진부해져서 그것을 발화하는 순간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아니, 재즈 뮤지션들도 멀쩡히 살아서 새 앨범을 내고 있는데 록이라고 다를 게 있겠나. 끝내주는 록은, 당신이 더 이상 찾지 않았을 뿐이지 얼마든지 발표되고 있다. 당장 홍대 앞 인디 신만 대충 둘러봐도 흥미진진한 록 뮤지션과 밴드가 여럿 활동 중임을 알 수 있다.
그중 이 밴드의 존재감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ABTB다. 예전 이 밴드의 음반에 대해 이미 쓴 적이 있다. 지면에서 중복은 피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신보 〈iii〉가 그만큼 훌륭한 결과물인 까닭이다. 물론 그들의 전작이자 2집인 〈데이드림(Daydream)〉(2020)은 한국 록 역사에 새겨진 어떤 봉우리였다. 그것은 절정에 달한 연주력과 탁월한 작곡 실력이 최상의 상태에서 드라마틱한 화학작용을 일궈낸 작품이었다.
만약 당신이 레드 제플린과 푸 파이터스의 팬이라면 이 음반,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1집을 선호하는 팬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2집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기타리스트 신윤철이 참여한 타이틀이자 하드 록,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를 넘나드는 ‘데이드림’의 광활한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꼭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게 하나 있다. 〈iii〉에는 기존 멤버 한 명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바로 프런트 맨이었던 박근홍이다. 대신 ABTB는 그의 빈자리를 효율적인 구성으로 대체했다. ‘한가락 하는’ 록 보컬리스트들을 섭외해 각각에 어울리는 곡을 녹음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에서 우리는 총 4명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뭐 하나 빠지는 곡이 없다. 단언컨대 전곡 각각의 표정이 다 다르고, 그 표정마다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다르다. 조규현은 ‘점프(Jump)’에서 꼼꼼하게 설계된 기타 리프와 질주하는 리듬 위로 활강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배인혁은 ‘스릴러(Thriller)’의 신경질적인 가사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색깔로 곡이 지닌 감정선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낸다. 그렇다. 이 앨범은 무엇보다 ‘정확한’ 앨범이다. 위대한 록 밴드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에너지를 마구잡이로 분출하지 않는다. 잘 단련된 연주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성취일 것이다. 이 앨범에서도 한 곡만 꼽으라면 저 유명한 김바다가 참여한 ‘블러핑(Bluffing)’을 택하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헛된 탑 위에 건설된 게 아님을 호쾌하게 증명한다. ‘과연’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그 와중에 조규현이 참여한 ‘산티아고(Santiago)’가 이내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 좋은 음반이 대개 이렇다. 들을 때마다 ‘최애’가 자꾸만 수정된다. 달리 말하면, 앞서도 강조했듯 모든 곡이 빼어난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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