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AP Photo

나를 절망에 빠트린 작가가 몇 있다. 최초 ‘수필가’로서 김훈이 왔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뒤를 이었다. 나는 아직도 〈자전거 여행〉과 〈몰락의 에티카〉를 처음 접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외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작가는 부지기수다. 존 쿠시, 리처드 도킨스, 도리스 레싱 등, 리스트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만큼 내 필력이 가난하다는 뜻이리라.

가장 많이 탐독한 분야는 아무래도 음악 평론이다. 그렇다. 빼어난 평론과 음악 역사에 대한 글을 많이 읽어야 더 잘 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 평론들 중 잊히지 않을 충격을 준 문장, 당연히 있다. 바로 비평가 앤서니 드커티스가 커트 코베인 사망 후 너바나의 명곡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에 바친 헌사다. 끝내주는 역설의 연쇄로 건져 올린 위대한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누군가 나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음악 평론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곧장 이 글이 떠올랐다. 워낙 역사적인 노래이므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쓴다.

“정치를 언급하지 않는 정치적인 노래,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찬가, 상업성을 비판하는 커다란 상업적 히트곡, 소외에 대한 집합의 외침. 이 곡은 새로운 시대와 불만에 가득 찬 새로운 무리의 젊은이들을 위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었다. 그것은 만족 불능에 대한 엄청난 만족의 선언이자 (부모를 향해 날린) 거대한 ××였다(A political song that never mentions politics, an anthem whose lyrics can’t be understood, a hugely popular hit that denounces commercialism, a collective shout of alienation, it was “(I Can’t Get No) Satisfaction” for a new time and a new tribe of disaffected youth. It was a giant fuck-you, an immensely satisfying statement about the inability to be satisfied).”

이 곡으로 커트 코베인은 X세대의 대변자로 떠올랐다. 미국 X세대는 냉소적이고, 현실에 불만족한다는 특징을 지녔다. 당시 미국에서 급증한 부모 세대의 이혼율과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전례 없이 심각해진 빈부격차가 결정타였다. 따라서 그들은 기성세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앤서니 드커티스가 “소외에 대한 집합적 외침” “(부모를 향해 날린) 거대한 ××”라고 쓴 이유다.

또한 ‘Smells Like Teen Spirit’은 해석 불가능한 파편적 단어의 나열로 X세대의 정신에 남겨진 상흔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따라 부르는 찬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에 대한 언급 없이도 한 세대의 정치를 상징하는 송가가 되었다. ‘아이 캔트 겟 노 새티스팩션((I Can’t Get No) Satisfaction)’은 1965년 빌보드 1위에 오른 롤링스톤스의 대표곡이다. 해석하면 “나는 ‘진짜’ 만족할 수 없어”가 된다. 이런 배경들이 있었기에 “만족 불능에 대한 엄청난 만족의 선언”이라는 표현이 쓰인 것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게 있다. 음악을 그냥 들어도 좋지만 공부하면 더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는 거다. 하나 더 있다. 언급한 모든 문장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절망에 빠진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 경지에 결코 닿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가능한 차선이 아닌 불가능한 최선을 꿈꾼다. 절망을 원동력으로 어떻게든 전환하려고 애쓰고, 발버둥 친다. 내가 가진, 정말이지 몇 안 되는 한 줌 크기의 재능일 것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