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밴드 시대를 풍미한 프랭크 시내트라. ⓒWikipedia

겨울, 그것도 한 해의 끝자락에 어울리는 장르가 있다. 바로 빅밴드 재즈다. 먼저 빅밴드 재즈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유행한 음악으로 특정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빅밴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이런 태그가 붙었다고 보면 된다. 한국어로는 ‘악단’이라고 썼는데 스윙(Swing) 감을 지닌 곡을 주로 연주한다는 이유로 스윙 재즈라고도 불렸다.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포맷이었기에 빅밴드 재즈에는 지휘자가 있었다. 대표적 인물 두 명만 언급하자면 글렌 밀러와 베니 굿맨이 있다. 전자의 대표곡으로는 ‘인 더 무드(In The Mood)’ ‘문라이트 세레나데(Moonlight Serenade)’가 꼽히고, 후자의 경우 저 유명한 ‘싱싱싱(Sing Sing Sing)’이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얼굴 역할을 맡은 가수도 있었다. 프랭크 시내트라, 페기 리 등이 빅밴드로 출발해 이후 세계적인 솔로로 거듭난 주인공들이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여러분은 아마 연말 내내 이어진 고된 술자리 행군에 지친 상태일 것이다. 지치다 못해 쓰러진 몇몇은 새해맞이 금주를 결심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어쨌든, 놀랍게도 개인이 아닌 국가가 금주를 선포한 시절이 있었다. 바로 빅밴드가 대유행을 타던 1919년 미국에서였다.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한 이유는 여럿이지만 중요하게 내세운 슬로건은 ‘술로 인한 폭력 예방’이었다. 또한 이민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 역시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류업 종사자 대부분이 이민자였던 까닭이다. 물론 금주법이 시행 중이라 해도 술을 구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시 술은 의료용으로 처방될 수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약 처방을 통해 약사들이 벌어들인 수익이 무려 4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로부터 무조건적 금지는 결국 음성화만 초래할 뿐 실제적인 효과는 미미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음성화된 것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술 자체였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는 속담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강제한다고 해서 술을 끊지는 않을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금주법 이후 술 관련 사업을 마피아가 독점하면서 그들이 운영하는 비밀 클럽 사이에 뇌물을 통한 커넥션이 형성됐다. 폭력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금주법이 거대한 폭력 조직인 마피아의 성장을 지원해준 꼴이 된 셈이다.

당시 마피아는 밀주를 마실 수 있는 비밀 클럽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대중음악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 비밀 클럽에서 밀주를 마시면서 빅밴드의 라이브를 듣는 게 당대 가장 힙한 문화였다. 이러한 속성을 말해주듯 비밀 클럽은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라고도 불렸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 전까지 빅밴드는 비밀 클럽의 호황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역사는 이 시기를 ‘포효하는 1920년대(The Roaring 1920’s)’라고 기록한다.

결과적으로 금주법 시대에 금주는커녕 음주 소비가 400% 늘어났고, 범죄율은 25% 상승했다. 한 국가의 정책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즉, 금주법이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는 오직 하나, 대중음악의 성장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금주는 무리다. 국가 차원에서도 실패했는데 이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새해에는 우리, 절주하도록 하자.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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