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트〉 사무실에는 ‘기후, 정의, 대안(Climate, Justice, Solutions)이라는 미션이 벽에 크게 적혀 있다. ⓒ시사IN 조남진

201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언론은 기후위기를 주요 의제로 다루지 않았다. 기후위기를 보도할 때면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기후 부정론자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함께 내보냈다. 주류 언론의 공백을 메운 건 디지털 기반 신생 매체다. 기후위기를 심층 취재하고 적극 보도해 그 심각성을 알렸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기후위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오랫동안 뒤처진 미국 주류 언론의 태도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시사IN〉은 미국의 비영리 환경 전문 독립언론 〈그리스트(Grist)〉와 뉴스룸을 네트워킹하고 지원하는 ‘커버링 클라이밋 나우(Covering Climate Now)’, 유색인 환경 전문기자 네트워크 ‘업루트 프로젝트(Uproot project)’를 현지 취재했다. 주간지 〈타임〉의 환경 전문기자 저스틴 월랜드와는 서면 인터뷰했다. 오는 12월6일 ‘기후위기 시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제6회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sjc.sisain.co.kr)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계단으로 올라가도 괜찮아요?” 건물 앞에서 마주친 니킬 스와미나선 〈그리스트(Grist)〉 대표가 이렇게 물었다. 그 옆에는 캐서린 배글리 편집장이 있었다. 스와미나선 대표는 미국 남부의 조지아주에서, 배글리 편집장은 동부 코네티컷주에서 막 서부의 워싱턴주 시애틀에 도착한 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스와미나선 대표의 제안으로 다 함께 건물 6층 〈그리스트〉 사무실까지 계단을 이용했다.

〈그리스트〉는 기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국의 비영리 독립언론이다. 구성원은 총 50여 명이지만, 사무실이 위치한 시애틀에서 일하는 건 8명 정도다. 나머지는 미국 각지에 흩어져 일한다. 〈시사IN〉 취재진이 사무실을 찾은 10월17일은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했던 〈그리스트〉 전 구성원이 3년 만에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시애틀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빌딩 중 하나다.” 시애틀 사무실로 출근하는 클레이턴 얼든 〈그리스트〉 선임 데이터 전문기자가 사무실을 이렇게 소개했다. 건물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로 전력을 얻는다. 사무실에서 쓴 물은 재사용된다. 화장실에서 나온 찌꺼기는 비료로 쓰인다. 에어컨은 없다. 천장에 있는 팬을 돌리거나 창문을 여닫는 것으로 온도를 조절한다.

사무실의 한쪽 벽엔 출력된 〈그리스트〉의 ‘두 번째 홈페이지 화면’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1999년 블로그를 기반으로 시작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언론사다. 5년 전 25명 규모이던 직원은 현재 50여 명까지 늘었다. 이 중 기사를 쓰는 사람은 30명 정도다. 2021년을 기준으로 지난 3년간 예산은 3배 가까이 늘었다. 〈그리스트〉 멤버십에 가입하는 후원 회원도 증가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그리스트〉 수입의 90%는 재단이나 고액 기부자의 기부금이고, 이러한 기부가 꾸준히 늘고 있다. 패트릭 슈미트 개발팀 디렉터는 “기부자들은 우리를 믿고 지지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수백만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겠다는 우리의 계획이 통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트〉는 기후위기 보도에서 다양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배글리 편집장은 “때때로 과학적 정보도 전달하지만, 우리는 기후위기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더욱 초점을 둔다”라고 말했다.

9월19일부터 21일까지 〈그리스트〉는 ‘범람, 퇴거, 되풀이(Flood, Retreat, Repeat)’ 시리즈를 연속 보도했다. 해수가 범람해 피해를 본 세 지역의 주민들을 만났다. 배글리 편집장은 “대부분의 언론은 매년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 것인지를 보도한다. 우리는 주민들을 만나 해수면 상승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들이 어떻게 대처하며 적응해가고 있는지 중점을 두고 보도했다”라고 말했다.

범람 피해를 당한 지역을 재건하지 않고 주택을 매입해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건 미국 각 주의 기후위기 대책 중 하나다. 〈그리스트〉의 보도는 정부가 집을 팔고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하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했을 때 세 지역의 주민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줬다.

〈그리스트〉의 캐서린 배글리 편집장, 클레이턴 얼든 선임 데이터 전문기자, 니킬 스와미나선 대표(왼쪽부터). ⓒ시사IN 조남진

‘버려지는 유전’에 관한 놀라운 통계

이주가 시작된 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됐다. 부유한 사람들은 거주지를 옮긴 후에도 사회적 유대감 및 자본을 지킨 것과 달리, 소득이 낮을수록 이웃과 멀어지고 사회적 유대가 약화됐다. 주 정부가 제안한 매입 금액으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수준의 주택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생겨났다. 여러 이유로 반복되는 재난에도 동네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에 방치됐다.

배글리 편집장은 직접 현장에 가서 주민들을 만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재난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보통 재난 상황에만 주목한다. 우리는 재난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과 터전을 망가뜨리는지에 집중한다. ‘사람 이야기’에 초점을 두면 독자들에게 기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리스트〉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데이터’라는 명칭을 직책에 달고 일하는 건 2명이지만, 보통 3~6명이 데이터 작업에 참여한다. 지난해 ‘버려지는 유전(Waves of Abandonment)’ 보도에서 자체 개발 통계 모델을 활용해 텍사스주와 뉴멕시코주에 버려진 유전을 보여주고, 가까운 미래에 버려질 유전의 증가 추이를 예측했다.

클레이턴 얼든 기자는 이 보도에서 통계 모델링과 데이터 시각화를 맡았다. “버려진 유전 문제를 처음 알게 됐을 땐 어떤 통계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데이터를 들여다보다 통계 모델을 만들었을 때,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얼든 기자는 유전 7000개가 버려져 있으며 1만3000개가 추가로 버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버려질 유전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10억 달러(약 1조4255억원)로 추산했다.

〈그리스트〉의 보도는 외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2021년 전 세계 언론사를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저널리즘 어워즈’에서 ‘대상(소형 언론)’ ‘탐사 데이터 저널리즘(소형/중형 언론)’ ‘토픽 리포팅(기후위기)’ 세 분야를 휩쓸었다. 2022년에도 ‘기획’ 부문에서 수상을 이어갔다.

스와미나선 대표는 올해 9월 취임하며 독자층 확대를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리스트〉는 비영리 매체다. 기사를 팔거나 광고를 받아 수익을 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트〉 보도를 ‘공공재’로 생각한다.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보도를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그리스트〉 기사를 꼭 이 언론 홈페이지에서 보지 않아도 된다. 어디든 다양한 플랫폼에서 독자에게 닿을 수만 있으면 된다. 〈애플 뉴스〉 〈앵커리지 데일리 뉴스〉 〈NPR 스테이션〉, 인스타그램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목표는 하나다. 〈그리스트〉의 기사를 읽고, 함께 기후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최근 독자들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그리스트〉 독자들은 주로 미국 동부와 서부의 대도시인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에 거주한다. 〈그리스트〉는 자신들의 보도가 닿지 않는 소도시나 시골 지역이 주로 밀집한 곳의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현지에서 활동하는 기자를 채용했다. 그들을 현지 라디오 방송에 출연시킨다는 구상이다.

현재 미국 남부 조지아주에서 애틀랜타 라디오 방송국과 공동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다. 〈그리스트〉가 채용한 조지아주의 환경 전문기자가 자기가 속한 주에서 일어나는 기후문제를 취재한 내용을 라디오로 전달한다. 메이컨, 애선스, 서배너 같은 조지아주 도시의 신문에 이 보도가 실리기도 한다. 그동안 〈그리스트〉를 한 번도 접하지 못했을 독자들이다. 앞으로 시카고, 미시간, 켄자스, 미주리 등을 중심으로 현지 라디오 방송국과 협업할 계획이다.

〈그리스트〉 사무실 벽에 ‘두 번째 홈페이지 화면’이 걸려 있다. ⓒ시사IN 조남진

‘기후, 정의, 대안(Climate, Justice, Solutions)’은 〈그리스트〉의 미션이다. 스와미나선 대표는 이 미션을 전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독자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후위기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극적으로 감소해야 한다. 모두가 빠르게 현실이 되어가는 미래에 적응하고, 이 과정에 아무도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기후위기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한 곳에서 독자를 늘리고 싶다.”

이 언론사는 기후위기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실험실 픽스(Fix)’를 운영하고 있다. 보도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트〉의 미션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단편소설 공모전 ‘2200년을 상상하라:미래의 조상을 위한 기후 소설(Imagine 2200:Climate Fiction for Future Ancestors)’도 하나의 실험이었다.

스와미나선 대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미션을 우리와 접점이 없던 새로운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사람들이 함께 해결하게 나설지 고민”한 끝에 단편소설 공모전을 열었다고 말했다. 참가자 1100여 명의 상상력이 2200년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데 쏠렸다. 픽스는 그중 12개를 선정해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픽스는 기후 해결을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도 주목한다. 2016년부터 매해 ‘픽서(Fixer)’라고 불리는 ‘그리스트 50(Grist 50)’을 뽑았다. 정치·예술·미디어·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다. 픽스는 매년 50명씩 올해까지 모두 픽서 350명을 선정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했다.

얼든 기자는 ‘그리스트 50’을 뽑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친환경 에너지, 탄소중립 농업 등에 대해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으로 잘 설명해줄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실질적 변화는, 예컨대 저소득층에게 더 적은 가격으로 태양광 패널을 공급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들에게서 온다. 독자들은 변화를 만들어낸 픽서들과 함께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리스트〉는 독자를 만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회사의 재정 구조상 수익의 10%는 ‘멤버십’에 가입한 4000여 회원의 후원금에서 온다(나머지 90%는 앞서 밝힌 것처럼 재단이나 고액 기부자다). 니킬 스와미나선 대표는 후원회원이 “단순히 구독자라기보다는 우리의 방향성을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리스트〉는 비정기적으로 자사의 보도를 접하는 독자를 200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이 숫자를 늘리는 게 1차 목표다. 그다음 단계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스트〉를 알게 된 독자를 기후위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결하려는 ‘후원 회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기자명 시애틀·이은기 기자 다른기사 보기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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