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3일(현지 시각)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REUTERS

주한 독일 대사를 지낸 한스 울리히 자이트는 한국과 독일의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한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과 분단,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에너지 빈국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에너지 절대 빈국이고, 독일 역시 퇴출 수순인 석탄 말고는 뚜렷한 에너지 자원이 없는 나라다. 에너지 빈곤을 딛고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것 역시 두 나라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두 나라는 에너지 정책 면에서 다른 길을 걸었다. 일찌감치 선진국으로 떠오른 독일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탈원전을 기치로 재생에너지 최강국의 길에 들어선 반면 후발 추격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은 지금도 ‘에너지 전환(화석연료와 원전 대신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공급 체계를 바꾸는 것)’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 보급률에서 한국은 OECD 국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최하위권이다. 경제 규모에 비해 한참 뒤처진 에너지 전환 속도는 한국이 ‘기후악당’이라는 비난을 당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독일은 저만치 앞서 있고, 한국은 이를 부러운 시선으로, 또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시작됐다.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는데 특히 에너지 문제를 강타했다.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 맞서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를 잠가버리면서 유럽, 그중에서도 천연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독일이 직격탄을 맞았다.

‘탈원전 재생에너지 강국’ 독일의 위기는 국내의 ‘원전 지지파’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국내 공론장에서는 독일이 성급한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으로 에너지 위기를 초래했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독일이 탈원전 정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보도까지 나왔다.

〈시사IN〉은 독일 외무부의 초청으로 사단법인 기후솔루션, 에너지전환포럼과 함께 지난 9월 독일을 찾았다. 에너지 위기 속에 독일의 탈원전 기조가 정말로 흔들리는 것일까. 앞으로 8년 뒤인 2030년까지 전체 전력공급의 8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이 나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늦은 밤 불 꺼진 베를린 대성당의 모습. ⓒ시사IN 이오성

■ 한국과 다른 독일의 전력시장

늦은 밤 독일 수도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의 조명이 꺼졌다. 또 다른 명소인 베를린 대성당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전기 사용을 줄이려는 정부 당국의 조치다. 병원, 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제외한 공공기관 건물의 겨울철 실내 최고온도도 22℃에서 19℃로 낮췄다. 지하철 역사 등 시내 곳곳에서는 ‘에너지를 아끼자’는 캠페인이 이어진다. 이런 에너지 절약 조치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민간의 일상에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베를린 시내 식당, 바, 편의점 등은 늦은 밤에도 문을 열고 있다. 베를린의 자랑인 대중교통도 정상운행 중이다. 지하철(U-Bahn)과 지상철(S-Bahn) 모두 오전 4시30분에 운행을 시작해 각각 다음 날 오전 0시30분, 오전 1시30분까지 운행한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24시간 운행한다. 버스와 트램도 마찬가지다.

독일 시민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앞으로 닥칠 에너지 요금 인상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독일은 전기료 납부 방식이 한국과 다르다. 첫 달 사용량 등을 기준으로 월 전기료를 미리 정해놓고 연간 계약을 맺은 뒤 추후 정산한다. 1년 뒤 그보다 더 썼으면 더 내고, 덜 썼으면 돌려받는다. 1년 단위로 요금을 추산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얼마나 더 많은 요금을 내야 하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는 이들도 많다. 다만 지역의 전력공급 회사가 소비자에게 속속 요금 인상 안내문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기료가 10배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국내 언론 보도와 달리 독일 현지에서는 현재 1년에 평균 700유로(약 95만원)를 납부하는 가구의 경우 3000유로(약 410만원) 이상 전기료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적은 돈이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비싼 독일의 전기료 체계에서 시민들의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전기료가 왜 비싼지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독일의 전기료 문제를 이해하려면 전력시장 구조를 알아야 한다. 독일은 한국전력 독점체제인 한국과 달리 민영화된 전력시장을 갖고 있다. 여러 전력공급(배전) 회사가 서로 다른 요금체계를 놓고 경쟁한다. 소비자는 ‘체크24’ 같은 가격 비교 사이트를 통해 어떤 상품을 고를지 따져본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무조건 제일 싼 상품을 고를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각각에는 해당 상품의 ‘원료’가 표시된다. 이를테면 어떤 회사는 원자력 10%, 석유화력 20%, 가스화력 20%, 재생에너지 50%로 구성된 상품을 내놓고, 다른 회사는 원자력 10%, 석탄화력 10%, 가스화력 20%, 재생에너지 60%로 구성된 상품을 내놓는 식이다. 상품별로 발전 과정에서 얼마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는지도 표시된다. ‘친환경’ ‘지속 가능’ 같은 옵션을 선택해 회사를 고를 수도 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운영하는 ‘그린플래닛에너지’도 이들 회사 가운데 하나다.

어떤 에너지를 사용하느냐는 전기료에도 영향을 끼친다. 독일의 에너지 문제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이하 아고라)’ 소속 한국 담당 선임연구원 염광희 박사는 베를린에 거주한다. 그는 이번 전기료 상승 파동에도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집은 100% 재생에너지 상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연료비용이 따로 들지 않는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국제 에너지 가격 등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업계에서는 이를 재생에너지의 변동비가 ‘0원’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재생에너지 100%가 아닌 상품을 택한 소비자는 요금이 오를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염광희 박사 집에서 사용하는 재생에너지 전기는 남쪽 멀리 프랑스 접경지역에 있는 쇠나우 마을에서 온다. 이 마을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에너지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쇠나우시민전력회사(EWS)를 설립했다. EWS는 현재 독일에서 중요한 재생에너지 전력공급 회사로 성장했다.

이런 전기 상품 가운데는 노르웨이로부터 수력발전 재생에너지를 수입해 만든 것도 있다. 전력망이 국경을 넘어 촘촘하게 이어진 유럽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라 간에 전기를 수출·수입할 수 있으므로 재생에너지의 약점인 간헐성(날씨가 좋지 않은 날 발전량이 떨어지는 문제)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은 지역의 작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이 손쉽게 전기 판매에 뛰어들게끔 하는 요인이 됐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독일의 전력 생산 에너지원은 재생에너지 40.9%, 갈탄 18.7%, 천연가스 15.4%, 원자력 11.9% 순이다. 반면 한국은 석탄 34.3%, 천연가스 29.2%, 원자력 27.4%, 재생에너지 7.5% 순이다(2021 〈전력통계〉). 40.9% 대 7.5%. 현격한 차이다. 이마저도 한국의 경우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풍력과 태양광으로만 재생에너지 범주를 한정하면 그 규모가 4%대로 줄어든다.

2000년 독일 에너지 정책의 방향타가 된 재생에너지법(EEG) 제정 이후 독일의 전체 발전량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줄었다. 반면 천연가스 비중이 꾸준히 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반감이 유난히 높은 독일에서 천연가스가 원전의 자리를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9월 현재 독일의 가스 저장률은 평소 대비 80% 정도다. 당장 가스 공급 중단 사태가 터질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난방비, 전기료 상승과 더불어 산업 부문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다. 가스 가격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4배나 치솟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는 염려가 나온다.

독일 정부는 에너지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가스 수입선 다변화, 에너지 절약 대책 등과 함께 민생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9유로(약 1만2000원) 티켓이 대표적이다. 지난여름 9유로만 내면 전국의 근거리 대중교통을 한 달 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시민들에게 ‘에너지 지원금’ 명목으로 300유로(약 41만원)를 지급했다.

‘9·24기후정의행진’ 행사가 열린 9월24일 서울시청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 ‘자유 에너지’ 향한 독일 시민의 노력

2022년은 독일의 탈원전 정책이 마침표를 찍는 해였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한 2011년, 메르켈 정부는 숙고 끝에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세계가 주목한 이 계획은 단계적으로 큰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여론이 흔들렸다. 지난 8월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분의 3이 원전 수명 연장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슈피겔〉은 “옥토버페스트와 함께 독일 정체성의 일부였던 반핵 운동이 잠잠해지고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환기할 것이 있다. 독일 에너지 위기의 본질이 ‘러시아산 가스 위기’라는 점이다. 가스의 단기적 대체재로 원전이 대두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일부 여론처럼 이를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원전 3기 중 2기를 내년 4월까지 폐쇄하지 않겠다는 독일 정부의 발표 역시 비상시를 대비해 예비전력으로 남겨두겠다는 것일 뿐, 원전 가동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 현지에서 만난 정부 부처, 에너지협동조합, NGO 관계자, 시민들은 에너지 위기라는 데에는 공감했지만, 탈원전 기조와 재생에너지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천연가스 악마’ 푸틴이 쳐놓은 ‘에너지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좀 더 일찍 재생에너지를 확대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대다수였다. 독일 시민들이 재생에너지를 일컬어 ‘자유 에너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무엇보다 독일 정부의 좌표에 흔들림이 없다. 현재 독일은 사회민주당·녹색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다. 각 당을 상징하는 적·녹·황 색깔에 빗대 ‘신호등 정부’라 불린다. 지난해 말 출범한 신호등 정부는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도 재생에너지 확대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치를 당초 65%에서 80%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도 발표했다. 현재 발전 비중의 두 배 가까운 목표치다. ‘기후 총리’로 불리던 메르켈 시절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에도 목표는 하향되지 않았다. 지난 4월에는 이른바 ‘부활절 패키지’를 통해 풍력·태양광 발전 시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등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를 더욱 높이기로 했다. 특히 연방정부는 2032년까지 전체 국토의 2%를 풍력발전 단지로 만들기로 하고, 각 주정부에 이를 할당했다. 지방분권 시스템을 갖춘 독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조치다.

‘50헤르츠’는 베를린 등 독일 동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송전 회사다. 소비자에게 직접 가는 배전 회사는 경쟁체제이지만, 전력망 인프라를 관리하는 송전 회사는 4개 사업자가 독일 전역을 도맡는다. 각 지역에 분산된 재생에너지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가 전국으로 전달되려면 이런 송전 회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50헤르츠에서 사업 개발을 담당하는 폴 나마커는 “1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유통하는 전력 중 재생에너지 비중이 25%였는데 지금은 70%에 이른다. (연방정부의 목표와 별개로) 우리는 2032년까지 100% 재생에너지 보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정뿐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도 재생에너지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전력망 회사가 정부보다 한발 나아간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치를 정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핵심은 비용이다. 한국에서 재생에너지의 대중적 이미지는, ‘좋은 건 알지만 너무 비싼’ 에너지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인식이 전혀 다르다.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라는 용어가 있다. 재생에너지와 화석연료의 발전비용이 같아지는 시점을 뜻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태양광의 균등화 발전비용(투자비·운영비·사회적 비용 등을 합산한 비용)이 석탄 및 가스 발전보다 싸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제는 원전이다. 원전의 사고 위험비용, 폐기물 비용 등을 어떻게 추산하느냐에 따라 값이 제각각이지만, 국내에서는 원전이 재생에너지보다 발전단가가 싸다는 주장이 먹히는 분위기다. 지난 2월 대통령 선거 TV 토론에서는 이재명 당시 후보가 “10년 안에 원전 발전단가가 재생에너지보다 비싸질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국내 원전의 건설비용, 사고 위험비용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한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독일은 이미 그리드 패리티를 달성했다. 더욱이 원전보다 재생에너지가 더 싸다. 아고라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독일의 균등화 발전비용은 ㎾h(킬로와트시)당 태양광과 육상풍력이 5.4~7유로센트(약 76~98원)로, 원전(7~11유로센트)보다 싸다. 디미트리 페시아 아고라 선임연구원은 “재생에너지 기술 발전으로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는 ㎾h당 2유로센트 이하로도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신규 원전에 비해 월등히 저렴하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그리드 패리티 달성은 물론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정부 차원의 대규모 투자와 지원이 있었다. 원전과 화석연료 진영의 반발, 태양광이나 풍력시설 설치를 놓고도 한국처럼 적잖은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시사IN 최예린

무엇보다 독일 시민이 ‘에너지 전환비용’을 기꺼이 분담했기에 가능했다. 위 〈그림〉은 독일의 가정용 전기료의 추이와 그 구성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초록색이 ‘재생에너지 부담금(EEG Umlage)’이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정책 전반에 쓰이는 돈이다. 한국도 전기료에 기후환경요금이 포함돼 있지만, 그 부담은 독일만큼 높지 않다.

2010년 이후 재생에너지 부담금 비중이 점차 늘더니, 2017년의 경우 전기료의 20% 이상을 차지했다. 1년 전기료가 700유로(약 95만원)라면 140유로가 부담금인 셈이다. 2011년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이 더욱 공격적인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펼친 결과라 볼 수 있다. 부담금 비중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2022년 들어 하락했다.

독일 정부는 올해 하반기부터 이 재생에너지 부담금을 전격 폐지하기로 했다. 그리드 패리티를 달성한 데다 탄소배출권 거래로 쌓아둔 예산이 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염광희 박사의 설명이다. 20여 년 전부터 본격화한 에너지 전환 농사가 결실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년에 국제 에너지 가격이 안정될 경우 재생에너지 부담금 폐지로 인해 독일 가정의 전기료는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

■ 신호등 정부의 상징, ‘경제기후보호부’

재생에너지 강국 독일을 취재하면서 의아한 점이 있었다. 수도 베를린 시내에서 그 흔한 태양광발전 시설을 찾기 어려웠다. 이유는 이랬다. 베를린 시민의 80%가 세입자인 데다 주택의 지붕 색깔까지 지자체가 간섭하는 등 ‘도시 미관’을 중시하는 독일 사회에서 태양광 시설이 흉물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베를린 역시 서울처럼 풍력·태양광 시설이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년부터는 달라진다. 베를린시는 ‘태양광 도시 계획(Solarcity Master Plan)’에 따라 2023년 1월 이후 상업용·주거용 등 모든 신축 건물에 태양광 패널 설치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세입자의 태양광 설치를 돕기 위한 사회적 논의도 진행 중이다. 베를린의 도심 태양광 사업에는 국내 기업인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이 참여하고 있다.

독일 신호등 정부의 야심찬 목표를 상징하는 것이 ‘경제기후보호부’다. 경제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서로 맞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의제를 합쳐 부처를 만들었다(환경부는 따로 있다). 직전 독일 경제 부처의 이름은 ‘경제에너지부’였다. 베를린 시내에 있는 경제기후보호부 건물 벽엔 에너지(energie) 대신 기후보호(klimaschutz)라는 글자가 새로 붙었다.

독일 경제기후보호부 건물. 벽에 기후보호(klimaschutz)라는 글자가 새로 붙었다. ⓒ시사IN 이오성

경제기후보호부 신설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신호등 정부의 의지를 나타낸다. 녹색당의 로베르트 하베크 공동대표가 경제기후보호부 장관과 부총리를 겸한다. 경제기후보호부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행정법규를 마련하고, 관련 분야 연구개발(R&D)에 GDP의 3.5% 이상을 투자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미 앞서갔던 이 나라가 에너지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욱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9월15일 중요한 뉴스가 들려왔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전기를 사용하는 기업 삼성전자가 마침내 ‘RE100’을 선언했다는 소식이었다. 놀라움도 잠시, 삼성전자에서 사용하는 그 많은 전기를 어떻게 재생에너지 100%로 충당할지 물음표가 생겼다. 윤석열 정부는 오히려 재생에너지 축소와 원전 확대를 밀어붙이고 있다. RE100은 원전을 탄소중립 에너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베를린의 9월은 춥고 자주 흐렸다. 독일은 연간 일조시간이 한국의 60~70%에 불과하다. 그런 나라가 재생에너지 강국으로 성장했다. 탄소중립이 국경을 넘어 모든 나라에 절박하고 중대한 과제가 된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압축성장’할 처지에 놓였다. 독일이 수십 년 동안 겪은 사회적 논란도 단시간 안에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은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기자명 베를린·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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