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차림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연기가 나는 것으로 보아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둘러앉은 것 같다. 그중에서 자신들을 향한 카메라를 발견한 몇몇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보인다. 또 몇몇은 카메라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이들은 필리핀 루손섬 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소수 종족 이고로트족(Igorot)이다. 하지만 이 사진이 찍힌 곳은 필리핀이 아니다. 촬영 장소는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이고로트족은 이곳에서 자동차와 엑스레이 기계 등과 함께 전시되었다.
세계박람회에는 이고로트족을 비롯해 네그리토족(Negrito), 모로족(Moro) 등 30여 개 부족 1000여 명이 전시되어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장 차림을 갖춘 백인들은 울타리 안의 원주민 부족들을 이색적인 구경거리로 삼았다. 이러한 인류학 전시는 세계의 다양한 인종을 학문적으로 관찰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지녔지만, 실상은 ‘인간 동물원’과 다를 바 없었다. 동시대의 과학과 기술, 예술 등의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세계박람회에 포함되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던 인간 동물원은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재현해 백인 우월주의를 뽐내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인식을 전파했다.
인간 동물원에 전시된 부족들은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노출이 심한 전통의상만을 강요당했다. 다른 부족과 싸워 이겼을 때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를 먹는 의식을 치르던 이고로트족은 인간 동물원에서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매일 개를 잡아먹어야 했다. 관객들이 음식을 던지며 요구할 때마다 춤과 노래를 펼쳐야 했고, 때로 호전적인 전투 모습을 재현하다가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식수 부족과 위생 불량으로 질병에 시달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죽은 뒤에는 연구용으로 해부되거나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허술해도 탈출할 수 없었던 이유
더 비참한 것은 사진에 보이듯이 울타리가 허술했지만, 부족들은 동물원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설령 탈출한다고 해도 미국의 낯선 도시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벗어난다 한들 고향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거칠게나마 ‘인간 동물원’의 역사를 훑어보면 인간이 이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이 생긴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는 바로 인간이 아닐는지.
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인간 동물원’도 점차 관심을 잃고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그 계기에는 윤리적인 반성과 비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텔레비전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구경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듯이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고야 만다. 그것이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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